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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al Eclipse Jul 27. 2021

숨이 막혀서

[냉정과열정사이]OST중<냉정과열정사이>by요시마타료

https://www.youtube.com/watch?v=2uqlNsLKn1Y







  꽤 시간이 흘렀네.

 잘 살고 있지? 그럴 거야. 그렇게 들은 것 같아, 언뜻.

 백이면 백 다 비슷해서 짜증 나, 뒤돌아선 지 한참 뒤의 감성들은. 어느 에세이를 집어봐도 그래.

 아픈데 없지? 좋은 사람 만났고? 가끔 네 생각이 나. 당신 덕분에 사랑을 알 수 있었어.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하길 바랄게. 나에게 너는 영원한 추억이야. 잊지 않을게.


 작정하고 쓴 삐딱한 글이 아닌 이상, 중간에 어느 길을 돌아가더라도 결국엔 이런 내용이거든.  

 사람은 다르고 사랑도 천차만별인데 왜 그럴까, 도대체? 

 결국 사람이란 동물의 한계인 걸까? 이별 후 뇌는 그렇게 작동하는 걸까? 모두가 비슷하게?

 

 나도 그래. 어쩔 수 없어. 사람이니까.

 그러니 너에게 건네고픈 말들은 뻔해. 조금 전 쓴 그대로야. 백이면 백이 비슷한. 실망했어도 별 수 없지.

 한 가지 억울한 것은.

 목놓아 울며 아파하던 둘이지만, 시간이 흘러 안부를 묻는 쪽은 항상 둘 중의 하나라는 거고.

 그게 나란 거야. 

 억울하지 않고 싶지만 내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니 방법이 없네.

 백기 들고 약자라는 걸 고백할게. 

 고백했으니 마음껏 그리워해도 되는 거지?


 네가 내 입술을 손가락 끝으로 만졌을 때가 기억 나. 생생하게. 촉감마저도.

 입술의 윤곽을 따라서 한 바퀴, 두 바퀴...

 난 내 입술 모양을 그때서야 알 수 있었어. 

 고흐가 살아 돌아와도 그런 붓터치는 하지 못할 거야.

 너 없는 오늘. 

 눈을 감고 내 손가락으로 입술을 대신 건드려봤지.

 이런 투박할 데가.

 네가 떠나고 난 내 입술 모양을 다시 잊어버렸어.


 언제나 스스로 빛을 냈던 너였지만, 가끔은 정도가 지나칠 때도 있었어.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옆에 누워있는 날 바라봤잖아.

 네가 날 보려 한 거지만, 날 보는 널 보며 난 숨이 멎는 줄만 알았어. 

 갈색 머리가 감싸고 있는 뽀얀 얼굴 속 날 바라보는 네 두 눈은.

 

 비현실이었어.

 현실을 모조리 빨아들이는.


 나라고 어쩌겠어. 다 너 때문이야. 헤아릴 수 없이 날 빨아들인 건 너니까. 


 넌 내 입술 모양 기억하고 있니?


   


 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


 천재들은 왜 요절을 해야 할까? 천재라고 불렸던 한 사람의 시는 이렇게 시작되더라구.

 세상의 이치가 뭘 그리도 시인의 숨을 틀어막았는지 띄어쓰기조차 없잖아.

 

 더 이상 통곡하는 나는 거기 없지만, 내 가슴속 액자들 안엔 여전히 숨 막히게 하는 너뿐이야.

 사각의 액자 속엔 또 다른 액자가 들어있지. 날 더 숨 막히게 하는 너.

 그 안엔 또 다른 액자가 들어있어. 이젠 질식하기 직전이야. 여기서 멈춰야 해.


 그러니 이 천재의 시는.

 전혀 다른 의미인 거지, 나에겐 말이야.

 누가 뭐래도 어때. 읽는 사람 마음인 거니까. 시란 게 다 그런 거지 뭐.   


 한 사람을 잊으려고 낯선 곳으로 향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었어.

 아니, 역효과만 날 뿐이야.

 누가 여행의 장점을 내려놓기라고 했을까? 한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라니까.

 아. 물론 낯선 곳에선 잡생각이 없어지긴 해. 알고 보면 쓸데없는 생각들.

 그런데 말이야

 쓸데없는 생각들은 없어질지 몰라도 집중력은 훨씬 강해지더라고.

 낯선 공간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사물들, 하늘과 바다, 숲...

 내 눈길이 섬세해지고, 온몸이 감각기관이 된 듯 서늘한 긴장감까지 느껴질 정도니까.

 잡생각이 사라지는 대신 생각 한 줌의 밀도가 얼마나 높아지는지 몰라.

 그러니 그게 널 잊는데 도움이 되겠냐구.


 넌 쓸데없는 생각이 아니잖아.

 오히려 네 생각만 바닥이 어딘지 모를 정도로 깊게 배어 나올 뿐이잖아.

 우리 모든 순간들이 그때보다 더 또렷이 재생되잖아.


 그러니 그게 널 잊는데 도움이 되겠냐구.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것은 결국

 너에게 다가가려는 발버둥이고 너를 향한 몰입이었던 것을.


 이젠 그냥 머물러 있어야겠어.

 힘드네, 낯선 곳이.


 이 영화의 원작.

 남자 작가는 남자 주인공 입장이 되어.

 여자 작가는 여자 주인공 입장이 되어 같은 제목의 소설을 썼다고 하잖아.

 독특한 방식이야. 훌륭해, 신선하기도 하고.

 

 너와 나의 이야기도 책이 될 수 있을 텐데.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해 보는 게 어떨까?

 난 네가 되어 나를 바라보는 너를 쓰고, 넌 내가 되어 너를 바라보는 나를 쓰는 거야.

 그리고 1년마다 한 번씩 바꿔 서로에게 읽어주는 거지.  

 아니, 미안해. 늦었구나 이젠.

 내 아이디어에 스스로 감탄해서 너와 헤어진 줄도 몰랐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렇게 하자 그럼.

 그 정도는 괜찮겠지?


 지금도 낯선 곳이라 하늘은 네 얼굴이네.

 하나 다행인 건.

 몰입이 잘 되니 썩 마음에 드는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는 거야.

 너와 헤어진 이유.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내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겠어.

 헤어지지 않았다면

 난 진즉에 숨이 막혀 버렸을 거야.


 흐뭇한 추억은 고통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하지만.

 숨이 막혀 죽지는 않을 것 같아.


 그러니 잘 되었어.

 액자 속에 담은 널 꺼내보는 걸로 만족할게.

 무엇을 주어도 갚지 못할 고마움 잊지 않을게.


 이젠 자리에서 일어나야겠다. 

 눈밑이 따갑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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