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아름다운 것들> by 정수년
https://www.youtube.com/watch?v=5OuZd4VvvfI
성인의 경지에까지 올라가진 못한다 해도
꾸준한 수련을 통해 내공을 쌓으면 그럴 수 있다고들 합니다.
결국은 덧없는 공(空)에 불과한 사랑, 그에 따른 집착과 미련
다 내려놓을 수 있다고 말이죠.
누가 누구를 그리는 것은 곧 본능에 의한 생화학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어렵사리 수련을 하지 않더라도 방법은 또 있다고 합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궤도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조금만 충실해지는 것.
때때로 하늘을 바라보며 멍한 표정으로 그릴지라도
살아가기 위해 살다 보면 머지않아 쓴웃음만 남을 거라고.
그런데 말입니다.
참 어렵습니다.
어렵네요.
수련에 정진했다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마음을 단단히 다스리려 노력했던 게 사실이고
현실에 집중하기 위해 삶의 무대를 바꿔보기도 한 게 사실인데
하...
몇 년이 지난 지금의 난
그때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또 바다로 달려왔어요. 푸른 하늘이 금빛으로 바뀌고 있네요.
금빛을 따라 당신이 실려옵니다. 오늘도.
애처롭고도 찬란한 이 금빛은
매정해지려는 결심과는 상극인 건지.
또 우리의 시작이 하늘에 그려집니다.
알고 있어요. 나는.
우리의 모든 순간을 순서대로 하나씩 떠올리면서
이 자리에 두 시간은 못 박혀 있게 될 것을.
치매에 걸리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이렇듯 기억을 수없이 되감기 하면서 뇌를 자극하고 있으니까요.
눈을 감는 마지막 찰나까지도 당신이 둥실 내 앞에 떠 있을 것이 너무도 확실해서
오히려 뿌듯하군요.
당신이 아니면 그 무엇이 그려질까요.
기적과도 같습니다.
오래된 앨범을 꺼내 볼 때처럼. 우리의 장면들이 하나씩 하나씩 포개지면서
한 편의 영화가 돼 버리는군요.
원의 넓이도
원의 중심점을 공유하는 무수한 삼각형의 합으로 구해졌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만을 둘러싼 세계관 역시
우리가 만든 무수히 빛나도록 아름다운 순간들과 시리도록 아픈 순간들이 겹쳐져 만들어진 것이겠지요.
물에 비치는 건 당신의 미소뿐입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나이가 들어가면 다 그럴까요?
우리의 악기가 내는 음이 이리도 구슬프게 느껴지다니.
아픈 기억을 실컷 아파하라고 채찍질해대는 노래가 있었고
그러지 말고, 딛고 일어서라고 힘을 주는 곡들이 많았습니다.
다르네요.
달면 단 대로, 쓰면 쓴 대로, 심장이 흘러가는 물결에 따라 고동을 맞추도록 자박하게 도와줄 뿐입니다.
상실에 아파하며 비탄에 빠진 나를
그저 아무 말 않고 바라봐주는 그런 친구 말이에요.
우리의 소리는 그랬습니다.
이제야 알게 됐다니.
음악시간에 교실 앞에 나와 있는
귀여운 소녀 같았어요. 당신.
분명 솜씨 가득한 연주였는데
새하얀 맨발에 노란 치마를 입고 긴장한 듯 바이올린을 켜는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데이지 꽃이었습니다.
이 소리는 어때요?
가슴으로 뚫고 들어오지 않나요?
해금이 잡고 있는 것은 두 줄 뿐입니다.
그런데도
가장 자유롭게 음을 넘나들 수 있는 현악기라고 하니 어찌 놀랍지 않겠어요.
바깥 줄은 유연하게 파도를 타고
안쪽 줄은 굳세게 중심을 잡아준다고 합니다.
예전의 우리와 닮지 않았나요?
우리는 해금의 두 줄과도 같이
내가 바깥 줄일 때 너는 안쪽 줄
네가 바깥 줄일 때 나는 안쪽 줄
변신에 능했다는 것.
동의하죠 당신도?
우리가 내는 음은 최고의 선율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 최고의 악기였습니다.
분리될 수 없는.
하늘을 봐도
그곳엔 여전히 당신입니다.
벗어날 수 없다면
차라리 들려주려 합니다.
이제는 없는 한 줄.
어쩔 수 없죠.
하나만 남은 줄이라도
소리는 낼 수 있을 테니.
거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투박할 것임이 틀림없어요.
그래도 활대를 잡아보겠습니다.
구구절절 늘어놓을 필요 없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두 줄에서 한 줄이 된
고장 난 우리 악기를 다시 무릎 위에 올려놓을 겁니다.
어색하네요, 오랜만이라.
준비됐어요?
시작합니다.
하늘에 있는 당신. 물 위에 비친 당신. 바람을 타고 떠도는 당신.
들어주면 참 고맙겠습니다.
이해해주세요.
한 줄 뿐인 악기의 소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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