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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tal Eclipse Aug 31. 2021

외줄의 소리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들> by 정수년

https://www.youtube.com/watch?v=5OuZd4VvvfI








  성인의 경지에까지 올라가진 못한다 해도 

 꾸준한 수련을 통해 내공을 쌓으면 그럴 수 있다고들 합니다.

 결국은 덧없는 공(空)에 불과한 사랑, 그에 따른 집착과 미련 

 다 내려놓을 수 있다고 말이죠.

 누가 누구를 그리는 것은 곧 본능에 의한 생화학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어렵사리 수련을 하지 않더라도 방법은 또 있다고 합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궤도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조금만 충실해지는 것.

 때때로 하늘을 바라보며 멍한 표정으로 그릴지라도

 살아가기 위해 살다 보면 머지않아 쓴웃음만 남을 거라고. 

  

 그런데 말입니다.

 참 어렵습니다.

 어렵네요.

 수련에 정진했다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마음을 단단히 다스리려 노력했던 게 사실이고

 현실에 집중하기 위해 삶의 무대를 바꿔보기도 한 게 사실인데


 하...


 몇 년이 지난 지금의 난

 그때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또 바다로 달려왔어요. 푸른 하늘이 금빛으로 바뀌고 있네요.

 금빛을 따라 당신이 실려옵니다. 오늘도. 


 애처롭고도 찬란한 이 금빛은

 매정해지려는 결심과는 상극인 건지.

 또 우리의 시작이 하늘에 그려집니다. 

 알고 있어요. 나는.

 우리의 모든 순간을 순서대로 하나씩 떠올리면서

 이 자리에 두 시간은 못 박혀 있게 될 것을. 

 치매에 걸리지 않을 확률이 높습니다. 이렇듯 기억을 수없이 되감기 하면서 뇌를 자극하고 있으니까요.

 눈을 감는 마지막 찰나까지도 당신이 둥실 내 앞에 떠 있을 것이 너무도 확실해서

 오히려 뿌듯하군요.

 당신이 아니면 그 무엇이 그려질까요.


 기적과도 같습니다.

 오래된 앨범을 꺼내 볼 때처럼. 우리의 장면들이 하나씩 하나씩 포개지면서

 한 편의 영화가 돼 버리는군요.

 원의 넓이도

 원의 중심점을 공유하는 무수한 삼각형의 합으로 구해졌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만을 둘러싼 세계관 역시 

 우리가 만든 무수히 빛나도록 아름다운 순간들과 시리도록 아픈 순간들이 겹쳐져 만들어진 것이겠지요.


 물에 비치는 건 당신의 미소뿐입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나이가 들어가면 다 그럴까요?

 우리의 악기가 내는 음이 이리도 구슬프게 느껴지다니.

 아픈 기억을 실컷 아파하라고 채찍질해대는 노래가 있었고

 그러지 말고, 딛고 일어서라고 힘을 주는 곡들이 많았습니다. 

 다르네요.

 달면 단 대로, 쓰면 쓴 대로, 심장이 흘러가는 물결에 따라 고동을 맞추도록 자박하게 도와줄 뿐입니다.

 상실에 아파하며 비탄에 빠진 나를

 그저 아무 말 않고 바라봐주는 그런 친구 말이에요.  

 우리의 소리는 그랬습니다. 

 이제야 알게 됐다니.

  

 음악시간에 교실 앞에 나와 있는

 귀여운 소녀 같았어요. 당신.

 분명 솜씨 가득한 연주였는데

 새하얀 맨발에 노란 치마를 입고 긴장한 듯 바이올린을 켜는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데이지 꽃이었습니다.    


 이 소리는 어때요? 

 가슴으로 뚫고 들어오지 않나요?

 해금이 잡고 있는 것은 두 줄 뿐입니다.

 그런데도

 가장 자유롭게 음을 넘나들 수 있는 현악기라고 하니 어찌 놀랍지 않겠어요.

 바깥 줄은 유연하게 파도를 타고

 안쪽 줄은 굳세게 중심을 잡아준다고 합니다.


 예전의 우리와 닮지 않았나요?

 

 우리는 해금의 두 줄과도 같이

 내가 바깥 줄일 때 너는 안쪽 줄

 네가 바깥 줄일 때 나는 안쪽 줄

 변신에 능했다는 것.

 동의하죠 당신도? 


 우리가 내는 음은 최고의 선율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 최고의 악기였습니다. 

 분리될 수 없는.


 하늘을 봐도 

 그곳엔 여전히 당신입니다.


 벗어날 수 없다면 

 차라리 들려주려 합니다.

 이제는 없는 한 줄.

 어쩔 수 없죠.

 하나만 남은 줄이라도 

 소리는 낼 수 있을 테니.

 거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투박할 것임이 틀림없어요.


 그래도 활대를 잡아보겠습니다.

 구구절절 늘어놓을 필요 없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두 줄에서 한 줄이 된 

 고장 난 우리 악기를 다시 무릎 위에 올려놓을 겁니다.

 어색하네요, 오랜만이라.


 준비됐어요?

 

 시작합니다. 


 하늘에 있는 당신. 물 위에 비친 당신. 바람을 타고 떠도는 당신.


 들어주면 참 고맙겠습니다. 


 이해해주세요.


 한 줄 뿐인 악기의 소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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