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프로야구 정규시즌이 얼마 전 개막되었다. 우리나라에 처음 프로야구가 생겨난 것이 1982년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필자가 초등학교(당시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화창한 봄날의 토요일 오후, 텔레비전으로 서울 연고의 MBC 청룡과 영남(대구) 지역 연고 팀인 삼성 라이온즈의 경기를 보았다. 우리나라에 갓 보급된 컬러텔레비전이었을 것이다. 조그만 브라운관에 희미하고 둔탁하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모양의 자막이 기억난다.
프로야구가 생기기 전까지는 고교야구가 인기 있었다. 유명 고교야구 선수들은 지금의 아이돌과 다름없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같은 반 친구 중에 학교에서 하루 종일 야구 이야기만 하는 아이가 있었다. 그 친구 덕에 아직도 그 선수들의 이름이 기억난다. 필자의 경우 야구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주변 친구들이 아침이면 모여서 야구와 야구선수 이야기를 해대니 자연스레 눈길이 갔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예상컨대, 당시 야구의 인기가 높았던 이유는 야구팀이 학교와 지역을 연고로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980년대 영남-호남 지역의 대립 구도는 극에 달했다. 게다가 우리나라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학연이 함께 더해져 결국 학연-지연을 배경으로 고교, 프로야구팀들이 서로 경기하다 보니 자신이 응원하는 팀에 대한 열정은 하늘을 찌를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특히 경쟁 학교팀이나 라이벌 지역을 연고로 하는 팀끼리의 경기에서는 마치 전쟁터와 같은 일이 벌어지곤 했다. 폭력 사건은 다반사이고 선수단 버스를 불태우거나 야구장 시설을 부수는 일도 종종 일어나곤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의 대학생 시절인 1990년대, 야구장에 가면 술에 만취하여 끊임없이 욕설하는 관중도 쉽게 볼 수 있었다. 바로 옆자리에서 큰 목소리로 질러대는 욕설이 듣기 싫어서 멀리 자리를 옮겨 앉은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다시 프로야구 태동기로 돌아가 기억을 더듬어본다. 초등학교 시절, 즉 1980년대 초반 당시 동두천 인근 조그만 리(里) 단위 마을에 살던 아이들조차 온통 야구에 빠져있었다. 야구유니폼을 입고 와서 으스대는 아이가 너무 부러웠다. 우리 반 아이들은 쉬는 시간이면 그 학생 주변에 둥그렇게 모여 앉아 유니폼을 구경하였다. 그 시골에서조차 많은 아이들이 프로야구팀 어린이 회원에 가입했다. 어느 주말이 지나면 서울에 가서 어린이 회원을 든 아이가 야구모자와 점퍼를 입고 의기양양하게 나타났고 아이들이 그 주변에 모여들면 신나게 자랑했다. 서울에서 2시간은 걸리는 거리의 마을에서조차 이러니 서울에 살고 있던 남자아이들은 아마 대부분이 어린이 회원에 가입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넉넉하지 못했던 우리 집 살림이었다. 어느 주말, 어머니께서 나와 동생을 데리고 서울 소공동의 신세계백화점 옥상까지 가셔서 어린이 회원에 가입해 주셨다. 그런데 동생은 따라가기만 하고 돈이 없어 가입도 못 해줬다. 어머니께서는 동생에게 “다음에 해줄게”라며 이야기해 주셨는데 착한 동생은 떼를 쓰거나 조르지도 않고 그저 어머니 말씀에 따랐다. 그때 동생의 나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이다. 그 철모르는 시절의 나이에도 동생은 아무런 말 없이 어머니의 말씀에 따랐다.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애틋하게 느껴진다.
초등학교 6학년 여름 무렵, 서울의 학교로 전학을 오게 되었다. 시골 학교에도 프로야구가 붐이었지만 학생 수가 절대적으로 많은 서울에서는 그 인기는 더욱 하늘을 찔렀다. 우리 반 남학생들 거의 모두가 자기가 응원하는 프로야구팀의 티셔츠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당시 OB 베어스팀과 박철순 선수의 인기는 정말 뜨거웠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전체 어린이의 50% 이상이 OB 베어스 팬이고 나머지가 여러 구단을 나누어서 응원했던 것 같다. 이때가 바로‘삼미 슈퍼스타즈’와 같은 추억의 팀들을 접할 수 있었던‘찐’ 프로야구 초창기였다.
성인이 되어서야 영상이나 다큐멘터리로 당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지 실상 그 당시에 필자는 어린 초등학생(당시 국민학생)이라 야구에 관한 이야기는 잘 알지도 못했다. 그저 귀동냥으로 알게 된 내용으로 친구들과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였으니 말이다. 쉽게 말해, 멋도 모르고 다른 아이들을 따라 프로야구 팬이 된 것이었다.
텔레비전으로만 보고 말로만 듣던 프로야구 경기를 실제로 보게 된 것은 필자가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가능했다. 당시 지하철 2호선이 갓 개통되었고 성북구에 살던 필자는 시내버스를 타고 신설동역까지 나와서 지하철 2호선으로 갈아타고 잠실로 갈 수 있었다. 처음 타본 지하철이 너무나 신기했다. 잠실의 ‘종합운동장’ 역에 도착해서 처음 들어갔던 잠실야구장은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대낮처럼 환한 조명에 구름처럼 가득 찬 관중의 함성, 그리고‘딱’하는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어두운 밤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하얀 공의 포물선은 지금도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명장면이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도 가끔은 야구장을 찾곤 했다. 걸어서만 다녔던 중·고등학교와는 달리 대학교는 우리 집에서 지하철로 다녀야만 했다. 지하철 타는 시간이 1시간 남짓인데 조금은 지루한 시간이었다. 당시 지하철에는 판매원이 신문을 팔에 걸치고 다니면서 돈을 받고 신문을 팔았었다. 버스 안내양과 함께 지금은 사라진 옛 모습이다. 또는 지하철 탑승을 기다리던 곳에 있는 가판대에는 여러 종류의 신문을 판매했다. 유력 일간 신문도 있었지만, 사람들이 많이 구입하는 신문은 바로 스포츠신문이었다. 스포츠신문은 스포츠뿐 아니라 연예계 소식, 만화 등 가볍게 읽기 좋은 내용들이 큰 컬러사진과 함께 지면에 실려있었다. 무료하고 복잡한 지하철에서 읽기 좋다. 앞자리 승객이 불편하지 않도록 요령껏 피해 가며 신문을 접어서 읽고 있노라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하곤 했다. 지금은 승객들이 주로 휴대폰을 들고 무언가를 하지만, 당시에는 책이나 신문을 보거나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스포츠신문을 보면, 프로야구 관련 기사가 주를 이루었다. 1면에는 어제 특정 선수가 홈런을 쳤다거나, 아니면 어떤 투수가 승리했다는 등의 기사가 실렸다. 이렇게 스포츠신문과 프로야구 경기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스포츠신문을 통해 프로야구 경기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이에 더해 스포츠신문에 얽힌 추억도 여럿이 있다. 시장의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면 주인은 스포츠신문에 둘둘 말아서 건네주었다. 야구장에 갔을 때도 스포츠신문으로 햇빛을 가리거나 부채로도 사용했다. 용도가 다양했다. 이젠 사진으로밖에 볼 수 없는 희귀 템이 되어버린 종이 스포츠신문에는 서민들의 생활상이 잘 나타나 있다.
프로야구 경기가 생겨난 배경에 대한 일화가 여러 프로그램에서 많이 다루어지곤 한다. 당시 군부 정치 세력이 우매한 국민을 만들기 위해 만들어 낸 작품이라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창설의 목적이 뭐가 되었건 상관없이 4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프로야구는 많은 국민들이 좋아하는 매력적이고 저렴한 가격의 콘텐츠임이 틀림없다. 주말뿐 아니라 평일 저녁 시간에도 많은 관중이 프로야구 경기장을 찾거나, 치맥을 먹으면서 중계를 시청한다. 덕분에 낮 동안 직장이나 학교에서 받은 스트레스도 어느 정도는 날려 보낼 수 있다.
프로야구 경기장의 모습 중, 예전과 특히 달라진 모습은 바로 경기장을 찾는 관중의 연령대이다. 예전에는 남자들이 관중의 대부분을 차지했다면, 지금은 여성과 어린이 관람객을 많이 볼 수 있고 이젠 낯선 광경도 아닐 정도로 이미 저변이 뿌리내려있다. 사실 예전에는 관람하면서도 그 자리에서 흡연도 가능했다. 경기 후반에 이르는 늦은 시간이면 경기장 위쪽 하늘이 뿌옇게 변했다. 관중들이 뿜어내는 연기가 하늘로 날아가지 못하고 모여서 마치 스모그를 연상하게 만든 것이다.
프로야구 경기에 마음이 처연해질 때도 있었다. 아버지께서 투병하실 때의 일이다. 퇴근 후에 간신히 찾아가서 뵐 때면, 아버지께서는 통증을 참으며 야구 경기를 보고 계셨다. 통증을 잊으려 애쓰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고통 중에서도 나에게는 아프시다는 말씀을 한마디도 하지 않으시고 야구 경기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렇게 프로야구 중계는 아버지에 대한 애절한 추억도 함께 만들어주었다.
최근, 프로야구 관중이 연간 1,000만 명이 넘는 시대가 되었다. 그만큼 프로야구는 우리 생활에 깊이 스며들었다. 관중들의 의식 수준도 많이 높아져 일부 몰지각한 관중이 저질렀던 폭력 등의 사태도 많이 줄어들었다. 가족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건전한 놀이 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필자는 서울 연고의 팀을 응원한다. 그들의 줄무늬 유니폼이 멋져 보인다. 경기가 끝나면 팬들이 함께 부르는(이른바‘떼창’) 장엄한 응원가도 마음에 쏙 든다. 서울에 오래 살아서인지 고향을 연고로 한 팀이 아닌 서울 연고의 팀을 응원하고 있다. 잠자리에 들 무렵이면 오늘 있었던 경기의 하이라이트를 꼭 챙겨보고 팀과 관련된 기사도 인터넷에서 꼼꼼히 읽어 본다. 그저 하나의 습관처럼 하는 행동이다. 응원하는 팀이 이기면, 이겨서 기분이 좋고, 지면 다음에 이기면 되니까 또 기분이 좋다. 그것이 진정한 팬덤(Fandom)이다. 개인적으로는 일면식도 없는 선수들이 마치 그 전부터 알고 지내던 지인처럼 가깝게 느껴지고 그들의 연봉, 부상 소식 등의 기사가 뜨면 여지없이 클릭해서 몇 번이고 읽게 된다. 자신이 응원하는 팀과 선수가 잘 되길 바라는 일! 경기의 승부와 상관없이 프로야구를 응원하는 진정한 이유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