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견디기 힘든 일이 있다.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누군가로부터 불쑥 반말을 듣는 일이다. 반말은‘손아랫사람에게 하듯 낮추어 하는 말’이다. 한자로 반(半)을 쓰는 것을 보면, 완전한 말은 아니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전 세계의 언어 중에서 우리나라 말처럼 높임말이 다양한 언어가 없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의 문화에는 상대방을 말로써 존중해야 한다는 사상이 깊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높임말과 상대방에 대한 호칭은 대화할 때 가장 신경 써야 할 뿐 아니라, 자칫하면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 있는 예민한 부분이다.
먼저 반(半)말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나보다 연배가 있는 사람에게 반말을 듣는 것도 불편하지만 심지어 나이를 서로 모르거나 어리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반말하는 것은 더욱 불쾌하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 나이를 차츰 먹어감에 따라 이런 생각이 생겨난 듯하다. 어찌 보면 당연할지 모른다. 나이가 어렸을 때는 직장에서건, 사회에서건 대부분이 나보다 연배(年輩)가 높았을 테이고 시간이 갈수록 연배가 높은 쪽 사람보다는 아래인 사람이 많아질 테니 말이다.
길거리에서 가끔 생겨나는 싸움의 대부분은 반말에서 시작된다. 일반적으로 운전하다가 생기는 시비도 대부분 주고받는 말로서 기인한다. 처음에는 서로 거친 운전에 대해서 다투기 시작하다가 어느 시점에서는 종국에는 말에 대한 감정의 다툼으로 번져간다. “젊은 놈이...”, 또는 “나잇값이나 제대로 ...”라는 말들로 싸우다가 결국“어디다 대고 반말이야?”이런 식으로 반말에 대한 반감을 표현하면서 갈등이 폭발한다. 처음에 어떤 이유로 다툼이 시작했는지도 잊은 채 오직 ‘반말’에 대한 감정 다툼으로 싸움이 번지고 승자와 패자도 없이 서로 지쳐서야 싸움이 종료된다. 필자의 생각이지만, 나도 모르게 무심코 반말이 나왔을 때는 무조건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것이 최선책이다. 상대방이 불쾌함을 표시하면 그 어떤 말로도 합리화하기 어렵다.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경우도 있다. 반말도 아니고 높임말도 아닌 어중간한 어미(語尾)의 말이다. 대충 말끝을 짧게 하거나 얼버무린다. 참 뭐라고 지적하기도 그렇게 애매하다. 또 다른 경우는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서 하는 경우이다. 시작은 높임말이었다가 끝은 반말이다. 이것도 참 난감하다. 화내기도 그렇고 그냥 넘어가기는 불편하다. 필자는 이럴 때 그 사람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여러 차례 되묻는다. 그때야 자신이 실수했다고 스스로 느끼는 경우가 많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다시 격식을 갖춰 높임말로 말한다. 상대방이 불편해 하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필자라고 해서 비슷한 실수를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실 가까운 사이라고 느낄 때 후배에게 반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하지만 그쪽에서는 날 편하게 느끼지 않을 수 있다. 참 애매하다. 그냥 “미안한데, 말 놓아도 되나요?”라며 허락을 구한 후 반말을 하면 되는데 그 절차를 잊기가 쉽다.
두 번째로 ‘호칭’에 대한 것이다. 옛 이야기 중에 ‘김 서방’이 썬 고기와 ‘백정 놈’이 썬 고기의 크기가 다르다는 내용이 있다. 결국 호칭의 중요성에 대한 일화이다. 높임말과 함께 또 중요한 것이 상대방에 대한 호칭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직책이나 직업을 호칭으로 부른다. 김 과장, 박 차장, 장 선생님 등이다. 상대방에 대한 호칭의 중요성에 대한 한 예로, 예전에는 학교에서 이런저런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을‘소사’라고 불렀다.‘소사(小使)’의 정확한 의미는 ‘관청이나 회사, 학교, 가게 따위에서 잔심부름을 시키기 위하여 고용한 사람(국어사전)’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소사’라는 어감은 하인이나 노비 정도로 하대하는 뉘앙스이다. 영화에서도 그렇게 표현된다. 영화 ‘선생 김봉두’에서 김봉두의 아버지가 ‘소사’였는데 담임교사는 아이들을 체벌하면서 너 커서 ‘소사’나 될래? 하며 야단치는 장면이 나온다. 어린 김봉두는 아버지가 ‘소사’라는 말을 절대 꺼내지 않는다. 지금은 ‘주무관’이라 하여 정식 호칭으로 대우한다. 당연히 그 전처럼 천대하는 일은 찾아볼 수 없다. 육체적 노동을 하는 직업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학교에서 일하시는 분을 낮추었던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많이 개선되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지난 주말의 일이다. 화창한 날씨라 모처럼 시간을 내어 서울 인근으로 견지낚시를 갔다. 낚시 가게에서 용품과 미끼를 구매하려고 여주인에게 말을 걸었는데 갑자기 반말이 돌아왔다. 겉모습으로는 나에게 반말이 나올 나이가 아닌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여주인에게서는 너무나 쉽게 반말이 나왔다. 듣는 순간 기분이 확 상했다. 유독 반말에 예민해서일까? 다른 질문을 넌지시 하며 의도적으로 말을 조금 더 시켜보았다. 두어 번 더 반말이 나왔다. 낚시를 즐기기 위해 찾아갔던 상점에서 인상을 구기고 싶지는 않았다. 으레 하던 대로 눈을 보면서 두어 차례 더 질문하고 돌아오는 말에 귀 기울였다. 여주인은 눈치를 챈 건지 갑자기 높임말로 이야기했다. ‘아차!’ 하는 표정과 눈빛이 읽어졌다. 다른 의도는 없어 보였고 그저 자기 딴에는 손님에게 친근하게 대하려 했던 모양이다. 당연히 나를 아랫사람으로 여길 마음도 없었을 것이다. 그 마음은 느낄 수 있었기에 나도 특별한 반응 없이 대화를 나눈 후 가게를 나왔다.
이렇듯 내가 의도한 것과 다르게 반말이 나올 때가 있다. 하지만 말을 편하게 나눌 수 있는 기준은 저마다 다르기에 항상 조심해야 한다. 특히 연배가 비슷하거나 위로 보이는 사람에게는 더욱더 유의해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반말이 친근함의 표시가 되기도 한다. 남자들 간의 경우를 보자. 사이가 가까워질수록 호칭이‘형님’으로 바뀐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린 사람이“형님으로 불러도 될까요?”라는 완곡한 질문을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절을 하지 않는다. 어느정도는 친밀하다고 느껴서 하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그‘형님’이 동생뻘 후배에게“그래! 괜찮아, 말 편하게 해”라고 수락하면서 자연스럽게 서로 반말을 하는 사이가 되어버린다. 호칭이 ‘과장님’에서 ‘형님’또는 ‘형’이 되는 순간 더없는 절친한 사이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반말과 호칭은 두 사람 사이의 친밀도를 나타내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연예인의 경우, 방송에서 약간의 반말이라도 나올라치면 온통 인성 논란으로 SNS가 도배된다. 마치 인성에 큰 하자가 있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온갖 악성댓글에 시달리게 된다. 어떻게 보면 아직은 우리나라가 인성을 꽤 중시하는 사회라는 것도 느껴지지만 ‘실수’를 포용하지 못하는 예민한 사회적 기준이 아쉽기도 하다. 조금은 관대한 사회가 되는 것도 좋을 듯하다.
우리나라에서는 높임말과 호칭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의 의미로 여겨진다. 상대방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것이 ‘예’의 표현인 것처럼 높임말 또한 매우 중요한 존중의 표식이다. 몸짓하나에 따라 상대방과 거친 싸움이 되느냐 아니면 서로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느냐를 결정한다. 그저 한 번만 고개 숙이면 그만인 일이 큰 다툼이 될 수도 있다.
스포츠를 좋아하는지라 가끔 프로야구 경기중에 벤치클리어링 장면을 볼 때가 있다. 벤치클리어링도 경기의 일부분으로서 지나치지만 않으면 재밋거리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과도한 폭력과 욕설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경기중에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불가피한 다툼도 있지만 대부분 목례만 해도 서로 웃으며 지나갈 수 있는 경우도 많다. 예와 존중이 담긴 동작이 있느냐는 문제이다. 유교 사상이 깊이 자리한 우리나라의 전통적 사고방식에서는 더욱더 예의 표현이 중요하다. 언어 예절의 핵심은 ‘높임말’이다. 요즘도 선생님들이 학생들 사이에서도 높임말을 쓰도록 규칙을 정하는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