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드 쪽지로 문자가 왔다. 혹시 봉암리 살던 태원이 아니세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전학을 떠났던 학교 동창 밴드(band)에 가입하자마자 누군가로부터 쪽지 연락이 온 것이다. 낯이 익은 이름이다. 춘삼이였다.
사실 며칠 전 밴드에 가입한 후 회원 명단에서 이미 그의 이름을 보았다. 반가웠다. 살포시 웃음이 나왔다. 그렇지만 직접 연락을 취해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난 봉암리에서 채 4달도 생활하지 않고 서울로 전학을 왔기 때문이다. 난 기억을 하지만 그들이 날 기억을 해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저 나 혼자 소탈한 옛 추억에 잠기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고 그 아이들이 서로 주고받는 메시지를 보는 정도로만 생각했으니 말이다.
쪽지에 대하여 대답을 해주었다. “그래! 내가 맞아”, 바로 춘삼이와 전화 통화가 이루어졌다. 30년이 훌쩍 넘은 시간이지만 예전 목소리 그대로였다. 그 순간만은 우리 둘 다 국민학교 6학년의 어린 학생들이었다. 시간은 30년 전에서 멈췄다. 30년 동안 우린 각자의 시간 속에 살았고 다시 그 시간이 하나로 만났다. 그렇기에 우리 기억에는 서로가 30년 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의 어린 소년의 모습으로만 남아있었다. 어제 학교에서 함께 공부하고 놀다가 집에 가면서 “내일 봐” 하며 헤어졌다가 다음날 만난 느낌이었다. 각자의 삶은 30여 년간 치열하게 영위했지만, 우리가 만나는 순간에 우리 둘은 그저 어제 오후에 헤어졌었던 어린 국민 학생들일 뿐이었다.
전화기 너머 그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 날 많이 그리워하고 여러 번 찾았노라 말했다. 자신이 카드회사 직원이었을 때 내 이름을 검색해서 찾아보았다고 했다. 춘삼이는 어른이 될수록 내가 많이 생각났고 꼭 한번은 보고 싶었다고도 말했다. 그러던 와중에 밴드에 내가 스스로 가입해서 너무 반가웠다는 말도 해주었다.
1982년 봉암국민학교 6학년 1반, 소풍가서 찍은 사진(춘삼이와 내가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4달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동안 무엇이 그와 나를 평생 잊지 못할 친구로 기억 남도록 했을까? 난 그와 봉암리 친구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처음엔 어딘지도 몰랐었고 낯설기만 했던 그곳에서 어떻게 그 친구들과 생활했는지도 되짚으며 생각해 보았다. 언뜻언뜻 스치는 생각과 장면은 여럿 있었지만, 차분히 메모해 가며 생각해 보기는 처음이다. 그 기억을 이렇게 페이지로 엮어보려 한다.
1982년 초등학교(지금의 초등학교) 6학년 시절, 나는 연천군 전곡읍에서 양주군(지금의 양주시) 은현면 봉암리로 전학을 왔다. 당시 연천군에는 전방대대와 연대본부가 있었고 아버지는 대대장이셨다. 아버지는 양주군 은현면 봉암리의 사단본부로 배속을 받으셨고 우리는 전곡에서의 추억을 마치고 봉암리의 군 장교 관사로 이사를 왔다. 당연히 나와 동생도 봉암리의 국민학교로 전학을 오게 되었다. 전곡에서의 추억이 너무 좋았기에, 그곳을 떠나기 싫어 눈물까지 흘렸다. 그렇지만 어린아이였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봉암리와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2025년 봄의 봉암초등학교. 맑은 하늘과 운동장의 흙이 정겹다.
봉암리는 양주군(양주시) 은현면에 속해있다. 동두천시 상패동과 접하고 있어 동두천 시내와는 멀지 않다. 필자도 당시에는 봉암리가 동두천시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인근에 ‘하봉암동’이라는 지명이 있었기 때문에 더 착각하기 쉬웠다. 동두천(東豆川)이라는 지명은 주한미군 동두천기지인 캠프 케이시(Camp Casey)와 캠프 호비(Camp Hovey) 경내의 일대를 흐르는 하천의 이름인 동두천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동두천에는 미군 2사단이 있었다. ‘사단 앞’이라는 이름의 버스정류장은 바로 2사단 앞의 정류장 이름이다. ‘사단 앞’ 부근의 상점 간판은 대부분 영어로 되어 있었고 거리에서 미군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필자는 그 당시 동두천에서 외국인을 처음 보았다. 우리나라에 외국인을 볼 기회가 거의 없을 때였다. 커다란 덩치의 외국인이 참 신기했다. 토요일이면 봉암리의 친구들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동두천 시내 구경을 가기도 했다. 2사단 앞에서 봉암리까지는 자전거로 30.40분이면 갈 수 있었다. 검문소를 지나 ‘마고개’라 불리우는 고개를 힘겹게 넘으면 커다란 공동묘지가 보였고 그곳을 지나면 동두천 시내의 철길 건널목에 다다른다. 그 철로가 지금의 연천까지 이르는 경원선으로 이어진다. 서울에서 의정부를 거쳐 동두천을 지나 한탄강, 전곡, 연천, 대광리, 신탄리역에 이른다.
2사단에서 북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소요산이다. 초등학교때는 주로 소요산으로 소풍을 갔다. 지금은 1호선 소요산역이 있다. 당시에 역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는 역까지는 가지 않았고 그냥 소요산 아래쪽으로 소풍을 갔었기 때문이다. 소요산은 약 600미터의 높지 않은 산이다. 서울에서 가까워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소요산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러브스토리로 유명한 장소이다. 소요산 입구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자재암(自在庵)’이라는 작은 절이 있다. 주변 경관이 너무 아름답다. 이 절은 신라 선덕여왕 14년(645)에 원효대사가 세웠다고 하는데, 전설에 따르면 원효가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은 후 소요산에 들어와 수행하던 중 관세음보살이 변신한 여자와 만나 깨달음을 얻고 암자를 세워 '자재암'이라 하였다고 한다. 필자도 날씨 좋은 주말이면 가끔 소요산을 오르곤 했다.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고 도봉산역에서 1호선을 타면 ‘소요산역’에 도착한다. 등산할 때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때문에 항상 소요산역에서 하차한 후 소요산으로 향했다. 역 앞에는 500원짜리 동전을 넣고 하는 야구 놀이터가 있다. 소요산역 앞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면 전곡까지도 이 십여 분이면 갈 수 있다. 너덧 시간이면 정상까지 다녀올 수 있으니 하루 등반 코스로는 딱 적당하다. 산세나 등산로가 그리 험하지도 않다. 서울 인근에도 등반할 산들이 꽤 있었는데 이상하게 소요산을 자주 찾곤 했다. 그저 마음이 끌렸을 것이다. 서울로 오고 나서도 필자는 꽤 오랜 시간 이곳을 마음속에서 그리워했다는 증거이다. 동두천, 연천과 관련된 이야기가 책이나 텔레비젼에 나오면 귀를 기울였다. 방학 때나 휴일에 시간이 나면 이곳으로 여행을 오곤 했다. 그냥 이곳의 산과 강이 친숙하고 좋았다. 고향에 온 느낌이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혼자 지하철이나 승용차로 잠시 들렀다 돌아갔다. 그냥 마음이 편해졌다. 특히 힘든 일이 있거나 마음이 지쳤을 때면 꼭 이곳 부근까지 오곤했다. 여유가 있으면 연천까지 갔었고 그렇지 않을 때는 동두천까지만 왔다가 서울로 돌아갔다. 특별히 뭘 하지도 않았다. 식당에 들러 간단히 음식을 먹거나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서울로 돌아갔다, 아무리 서울의 인근이라 해도 두세 시간은 족히 걸리는데도 말이다.
다시 국민학교 시절로 돌아가 본다.
교육청에서 주관하는 육상대회 등 큰 대회들은 동두천에 있는 학교에서 열리기 때문에 봉암초등학교 학생들은 동두천에 자주 가야만 했다. 담임선생님께서 인솔하시고 반 전체 학생이 버스를 타고 동두천까지 갔던 기억이 난다. 친구들과 버스에서 떠들면서 한껏 부푼 마음을 안고 동두천까지 갔었다. 당시 큰 행사가 열릴 때면, 동두천여상 고적대가 와서 축하 공연을 했다. 밴드부원들이 힘차게 행진하며 관악기와 타악기를 커다란 소리로 절도있게 연주하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특히 예쁜 색의 단복을 입고 큰 모자를 쓴 채, 맨 앞에서 큰 지휘봉을 연신 휘저으며 지휘했던 리더 학생은 정말 멋져 보였다. 아마 우리 나이 또래의 사람들은 동두천여상 고적대의 명성이 기억날 것이다. 동두천여상 고적대는 1982년 프로야구 개막식과 86 아시안 게임, 88 서울올림픽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규모 행사에서도 공연했던 유명한 팀이다. 1980년대 동두천을 대표하는 최고의 명물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고적대도 없어지고 학교도 한국문화영상고등학교로 개명되었다고 한다.
동두천여상 고적대 모습(인터넷 출처 불명)
그전에 살았던 전곡읍에서 봉암리까지는 그리 멀지는 않았다. 버스로 30여 분이면 이를 수 있는 거리다. 난 봉암리에 와서도 전곡과 전곡국민학교의 친구들을 그리워했다. 그때의 그리움과 추억은 지금도 내 글의 단골 소재가 되고 있다. 심지어 요즘에도 시간이 나면 낚시도 할 겸해서 전곡과 한탄강 인근을 하릴없이 찾는다.
어쨌건 봉암리의 첫 기억은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특별히 이곳이 싫은 건 아니었다. 그냥 전곡의 추억이 원체 좋아서 봉암리에 마음을 붙이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봉암국민학교에 처음 전학 갔던 날. 아이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나를 많이 반겨주었다. 시골 학생 특유의 정감에 군(軍) 장교의 가족이라는 메리트까지 더해져 대부분의 아이들과 선생님들께서는 날 살갑게 잘 대해줬다. 전곡국민학교는 한 학년에 6학급도 넘을 만큼 연천군에서는 가장 큰 학교였다. 서울의 큰 학교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시골 학교라고 부르지는 못할 정도였다. 전교생이 2,000명이 넘는 큰 규모였으니 말이다. 그에 비해 봉암국민학교는 한 학년에 한 학급만 있었다. 6학년에서 우리 반이 그냥 끝이었다. 우리반에서 1등을 하면 자동으로 전교 1등이었다. 전곡국민학교에서 1등은 커녕 반에서도 5등 간신히 할 정도였다. 그런데 봉암리에 오니 그냥 1등이었다. 1등을 하니 온 마을에 다 소문이 났다. 지나가는 마을 어른까지 나한테 전교 1등이라고 칭찬해 줄 정도였다.
담임선생님은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셨고 아기를 키우시던 남자 선생님이었다. 친절하셨다. 학교 뒤편 조그만 관사에서 살고 계셨는데 아이들이 수시로 찾아가도 친절하게 맞이해주셨다. 5학년에는 젊은 여자 선생님도 계셨다. 어린 우리들이 보기엔 너무 예쁘고 착하신 선생님이셨다. 학교가 작다 보니 학년에 상관없이 모든 선생님과 학생들이 가족처럼 지냈다. 진정한 학교 - 마을 공동체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우리 반에 ‘영희’라는 여학생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남자아이들은 영희를 심하게 놀려댔다. 덩치가 큰 영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여자아이들처럼 화를 내거나 부모님을 모시고 와서 놀린 아이들을 혼내지도 않았다. 그냥 자포자기한 모습이었다. 여자아이를 그렇게 심하게 놀리는 건 나로서는 처음 봤던 좋지 않은 모습이었다. 가엾다는 마음을 들었으나 도와줄 엄두를 내지는 못했다. 적극적인 성격도 아니었고 전학을 와서인지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때, 내가 영희를 위해서 조금이라도 무언가 했으면 영희의 상황이 달라졌을까? 아직도 가끔 생각에 젖어본다.
춘삼이를 통해 나중에 전해 들었다. 영희가 젊은 나이야 죽었다는 것이다. 춘삼이와 남자 동창들은 자신들이 왜 그리 영희를 괴롭혔는지 모르겠다며 안타까워한다고 말해줬다. 영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고 여자아이라서 내가 말을 걸거나 편을 들어줄 엄두도 내지 못했었다. 그저 나라도 다른 아이들의 괴롭힘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라도 위안을 삼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은 영희의 이름은 ‘설영희’였다. 아이들은‘설렁탕~ 곰탕~’이라고 하면서 영희를 놀려댔다. 덩치는 큰 편이었고 암전했다. 나조차 영희를 도와주지 못한 죄책감을 느낄 정도이니 다른 친구들은 마음이 너무 안 좋았을 것이다. 그렇게 영희에 대한 안타까움은 기억의 흔적으로 아직도 남아있다.
춘삼이는 두뇌가 명석하고 똑똑했으며 말이 없는 편으로 성격은 매우 차분했다. 시골 아이 특유의 거친 모습이 없었고 덩치는 보통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동네 친구들과 서너명과 함께 춘삼이 집에 놀러 갔던 적이 있다. 시골이라 주산, 태권도학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학교가 파하면 아이들은 그저 어울려 다니며 자전거를 타거나 친구 집에 놀러 다녔다. 서울에서 주로 생활했던 나는 시골 아이들의 놀이 문화가 당연히 낯설었다. 그냥 아이들을 졸졸따라다니며 그들이 하는 대로만 따라서 하며 놀았다.
그날 춘삼이 집에서 배운 것은 낚시였다. 낚시라고는 아예 본 적도 없었다. 춘삼이는 떡밥을 물에 적당히 개는 방법을 나에게 알려주었다. 당시 떡밥은 지금처럼 제품으로 팔지 않았다. 동네의 텃밭에 가서 깻묵을 주워다 물과 적당히 섞은 뒤, 손으로 조물조물 반죽해서 둥글둥글하게 뭉쳐 콩알 크기로 만들었다. 낚싯대는 긴 대나무를 꺽고 끝 쪽에 고리를 만든 다음 낚싯줄을 걸고 바늘을 직접 묶어서 만들었다. 그런 모습들이 생소하면서도 재미있고 신기했다. 사전 작업을 마치면 춘삼이를 따라서 인근의 봉암저수지에 갔다. 저수지는 마을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걸렸다. 차가 지날 때마다 뿌연 흙먼지가 눈을 뜨지 못할 만큼 휘날렸다. 흙길을 한참 따라 저수지 이르러 춘삼이와 친구들이 하라는 대로 낚싯대를 드리웠다.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낚시다. 물고기는 정말 쉽게 잘 낚였다. 그냥 낚싯대를 드리우면 바로바로 입질이 오고 손바닥보다 더 큰 물고기들이 걸려있었다. 너무 신기했다. 그때 배운 기술로 아직도 낚시를 취미로 즐긴다. 봉암저수지는 지금은 정식 낚시터로 영업한다.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붉은빛의 노을과 그 노을에 반사된 저수지의 풍광이 너무 아름답다.
낚시 말고도 다른 놀잇거리가 있었다. 저수지 아래쪽으로 걷다 보면 1미터 정도 폭의 배수로가 있다. 저수지에서 논으로 물을 보내는 좁다란 수로이다. 친구들이 족대와 큰 양동이를 들고 그 수로에 들어갔다. 한 방향으로 물이 흐르기 때문에 반대쪽에서 첨벙거리며 물고기를 몰아내면 반대편에서는 준비한 족대로 물고기들을 잡는다. 이른바 족대질이다. 주로 미꾸라지들이 많이 잡혔다. 새카맣게 떼 지은 미꾸라지들을 족대로 퍼 올리다 보면 양동이 몇 개가 금방 가득 찬다. 친구들이 여럿이서 낑낑대며 양동이를 들고 마을 식당에 미꾸라지를 갖다주었다. 나도 그들을 거들어주었다. 친구들은 나를 그냥 거드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이른바 깍두기? 자신들과는 조금 다르고 시골 생활을 잘 모르고 금방 서울로 떠날 예정인, 시골 생활을 잘 모르는 약한 아이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즉, 서울 아이인데 여기 잠시 머무는 친구 정도. 그래서인지 친절하게 잘 가르쳐주었고 서툴다고 핀잔을 주지도 않았다.
식당에 미꾸라지를 갖다주면 주인 아줌마는 우리들에게 돈을 조금 쥐어주었다. 우리는 그걸로 아이스크림이나 과자를 사 먹었다.
그리고 저수지 흙바닥에 여기저기 묻혀있는 유리병들도 자주 주우러 다녔다. 비료 푸대를 질질 끌며 그 속에 빈 병 이른바 ‘공병’을 모아서 슈퍼마켓에 갖다줬다. 당시만 해도 알루미늄 캔이 존재하지 않았다. 소풍을 가거나 기차를 탈 때면 마시던 유리병 사이다를 영화의 한 장면에서 보았을 것이다. 그 병을 주워 갖다주면 십 원 정도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 돈으로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꿀맛이었다. 돈도 돈이지만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사실 장교의 가족이었던 필자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부모님께 용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냥 친구들을 따라다니며 그러고 노는 게 재미있었다. 춘삼이를 비롯한 봉암리 친구들과 매일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그때의 시간 덕분에 필자는 교사가 되어서 서울 학생들에게 시골에서 놀았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줄 수 있었다. 서울의 학생들은 흥미진진하게 내 이야기를 듣곤 했다. 나로서는 참 색다른 시골 생활의 경험이었다.
봉암리 마을은 인근의 사단본부 군인들의 소비로 상권이 형성되고 마을이 운영된다. 리(理) 단위의 자그마한 마을이지만 식당. 주점, 다방 등이 꽤 있었다. 농사짓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지만 상점들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봉암리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20여 분을 가면 동두천 시내로 갈 수 있고, 동두천터미널에서 서울이나 의정부로 나갈 수 있다. 동두천 시내에 큰 상점들이 많았지만, 봉암리가 가까우니 군인 가족이나 군인들은 대부분 시간을 봉암리에서 보냈다. 그러다 보니 마을 주민들과 군부대는 뗄 수 없는 협력관계에 놓이게 된다. 특히 농민들에게 군인들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른바 ‘대민지원’이라 하여 농번기(農繁期)때 모심기, 추수(秋收)를 군인들이 많이 도와주었다. 군 복무 경험자라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군인뿐 아니라 우리 학생들도 5월, 10월의 농번기 때는 공부를 하지 않고 마을의 농사일을 거들었다. 서울에서만 살았던 필자는 이것도 모두 난생 처음 겪는 일이었다. 모내기할 때 논에 가서 새참을 나르거나 모를 일렬로 심을 수 있도록 논 바닥을 가로질러 놓아둔 새끼줄을 잡는 일을 도왔다. 논흙에 발을 담갔다가 장딴지에 붙은 거머리에 피를 빨려 울었던 때도 있었다. 친구들이 내 종아리에 붙은 거머리를 떼어주었다. 그때 본 거머리와 우렁이가 처음이자 마지막 경험이었다. 이후로 논에는 갈 일 자체가 없었다.
네이버 밴드를 뒤지고 뒤져 1982년 가을의 사진을 찾아냈다. 유일하게 봉암리 친구들과 찍은 사진이다. 춘삼이가 전해준 이 사진이었다. 난 이 사진을 찍을 때의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는다. 사진을 보면,‘서원 동산’이라는, 봉암리 인근의 장소에서 춘삼이와 나는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도 우리는 꽤 친했었나 보다. 사실 다른 친구들의 모습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좋은 추억들은 계속 기억해 내야 한다. 그래야지 쉽게 잊지 않는다. 3, 40대에는 국민학교 시절이 선명하게 기억났다. 아이들의 이름과 얼굴. 놀았던 장소와 함께 있었던 친구들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기억났다. 하지만 50대가 지난 지금은 가물가물하다. 차츰 기억이 흐려진다. 그래서 필자는 가끔 그곳에 들른다. 기억을 잊지 않으려 일부러 가는 것은 아니다. 그저 생각이 나고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껏 잊지 않고 그나마 추억의 편린(片鱗)들이 조각으로 남아있다. 그렇게 우리는 좋았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그리워하며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사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우리들의 부모님들도 영원히 내 곁에 계실 줄로만 알았던, 너무나 순수했던 그 시절이었다. 내가 어른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질 못했던 때였다.
저녁때가 되어 어두워지면 나를 비롯한 친구들은 봉암리의 한 도서관에 모였다. 당시 대학생 형, 누나들이 우리들의 공부를 돌봐주었다. 친구 한 명은 영어책을 보며 영어로 문장을 베끼고 있었다. 알파벳도 모르던 나는 그 친구가 너무 신기하고 부러웠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당시 대학생 자원봉사 학생들이 시골 아이들의 공부를 무료로 봐준 것이다.
봉암리를 떠나 서울로 온 후,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봉암리 아이들’이라는 특집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1983년이었다. 너무나 반가웠다. 당시 봉암리 발전을 위해 물심양면 노력하는 실제 인물의 일대기를 그린 특집 드라마였다. 그 드라마에서 그렸던 한 장면이 바로 대학생들이 우리 봉암리 아이들을 가르쳤던 그 장면이었다.
봉암리의 거의 모든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어린이용 자전거는 집안 형편이 괜찮은 아이들이 가지고 있었고 나머지는 어른용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발도 닿지 않은 큰 자전거 의자에 앉아 양다리를 포개서 끼우고 페달을 젖는 아이도 있었다. 하루 종일 자전거만 타다 보니 필자도 자전거 달인(達人)이 되어있었다. 양손을 놓고 타거나 발로 핸들을 조정하는 객기까지 부리면서 놀곤 했다. 사람 한 명 간신히 지나갈 정도 폭의 논두렁길을 자전거를 탄 채 아슬아슬하게 건너는 묘기를 보이기도 했다. 그때 이후로 자전거 타기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자신감이 생겼다. 자전거 뒷자리에 수건을 깔고 세 살 터울의 동생을 태워주기도 했다. 하나뿐인 어린 남동생을 자주 데리고 다녔다. 지금은 세계 굴지 대기업의 수석 부장이라는 직책을 갖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콧물을 흘리며 형인 필자를 졸졸 따라다니던 10살짜리 조그만 아이였다.
봉암리에 이사 갔던 1982년은 우리나라에 프로야구가 처음 시작된 해였다. 다른 글에서도 언급했었지만, 3월 27일 토요일에 처음 프로야구를 텔레비전으로 본 기억이 아직 선하다. 봉암리로 3월 중순에 전학을 왔으니 아마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이다. 햇살 가득한 토요일 오후 프로야구 중계를 볼 수 있었다. 당시 인기 있었던 고교야구는 선수들 유니폼이 거의 흰색이었는데 프로야구 선수들의 유니폼은 너무나 화려했다. 붉은색, 푸른색 유니폼에 새겨진 마크의 글씨체나 그림도 예뻤다. 정치적, 사회적 배경을 젖혀두고 보면 그 당시 프로야구는 어린 남자아이들에게는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옷이나 모자를 하나씩은 다 착용하고 다녔다. 도시가 아닌 봉암리에서도 서울까지 가서 어린이 팬클럽에 가입하는 아이도 있었다. 당시에 봉암리에서 서울까지 가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렸음에도 주말에 회원가입을 하고 월요일이면 의기양양하게 팀 셔츠나 점퍼를 입고 학교에 오는 학생이 몇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그 학생 주변에 모여들어 옷을 구경했고, 그 아이는 밝은 표정으로 자신의 옷을 차랑하곤 했다. 그렇게 프로야구는 시작되어 40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이어지며 많은 관중이 여가생활을 즐기고 있다. 필자 또한 가끔 잠실야구장을 방문하여 경기를 관람하곤 한다. 예전 어렸을 적의 모습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여러 가지가 변하였지만 그저 쏠쏠한 재미가 있다.
1982년의 선선한 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필자를 포함한 봉암리의 아이들은 아침부터 들떠있었다. ‘만화 보물섬’이라는 어린이 월간 만화잡지가 창간되는 날이었다. ‘어깨동무’나 ‘새소년’등 어린이용 월간지는 몇 가지 있었으나 글로만 된 기사가 주를 이루었다. 만화의 분량은 많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주로 만화 부분만 골라서 보곤 했다. 별책부록으로 만화책을 함께 주곤 했는데, 그 별책이 너무나 재미있고 좋았다. 별책부록을 받으려고 월간지를 살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만화 보물섬은 책 전체가 모두 만화로만 이루어졌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당시 창간호의 가격은 1, 500원이었다.
책이 나오는 날 봉암리의 문구점에는 아이들이 계속해서 들러 책이 나왔냐고 주인아저씨에게 물었다. 동두천 시내의 서점에 책이 들어오면 봉암리의 문구점에 책이 배달되거나 주인아저씨가 직접 받아오시는 것 같았다. 오후 늦게야 만화 보물섬이 왔고 모아둔 용돈을 털어 책을 샀고 집에서 동생과 함께 읽었다. 동생은 자기가 먼저 보겠다고 떼를 쓰지도 않았다. 항상 내가 먼저 하는 것을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참 대견한 동생이다. 동생에게 먼저 보라고 양보해야 하는데 난 그러지도 못했다.
보물섬 창간호는 지금 200만 원을 넘게 거래된다. 그 가격에서마저도 구할 수 없는 희귀 한 물건이다. 아직도 책 표지의 모습이 기억난다. 그전 별책부록의 만화는 책도 조그맣고 분량이 얼마 되지도 않아서 감질날 정도였는데 이 책은 크기도 크고 엄청 두꺼웠다. 글자 그대로 원 없이 만화를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월간지이다. 매월 책을 볼 수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정말 꿈같은 일이었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야구, 축구 만화에 역사, 명랑 만화 등 다양한 장르의 만화들이 라인업을 구성하고 있었다. 지금 사진으로 봐도 아이들이 좋아할 만하다. 우리나라 최고 유명 만화인 ‘아기공룡 둘리’,‘달려라 하니’ 등의 작품도 이 책에 수록되어 있었다.
만화 보물섬이 나오기 전, 필자는 월간지 중에서 ‘어깨동무’를 좋아했다. 매달 주는 특별부록이 좋았다. 이번 달 특별부록이 뭔지 보고 책을 사고는 했다. 당시 특별부록으로는 주로 조그만 장난감 종류로 기억난다. 예를 들어, 움직이는 조잡한 모습의 장난감 정도였겠지만 당시 그 장난감을 보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고 너무나 갖고 싶은 어머니께서는 책을 자주 사주시지는 못하셨다. 시험을 잘 보거나 학급 반장이 되어야 간신히 한 권씩 사주시는 정도였다. 매달 자기 아버지가 알아서 어깨동무를 사준다는 친구의 자랑이 너무 부러웠다. 하지만 나와 동생은 어쩌다 얻게 된 이 책을 닳을 정도로 읽고 또 읽었다. 책의 소중함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작년에 1986년 판 ‘어깨동무’를 온라인 중고 서점에서 20만 원에 구매했다. 색 바랜 표지와 조금만 세게 넘기면 책장이 부수어질 것만 같은 종이들이다. 비닐장갑을 양손에 끼고 조심스레 넘겨본 ‘어깨동무’에는 어릴 적 내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었다. 책장을 넘기는 순간, 난 국민학생이 되는 마법에 빠져 들었다.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 내 모습과 주변의 모습들이 1980년대의 그것으로 변해버리는 느낌이다.
만화 보물섬 사진(인터넷 출처 불명)
앞서 말했지만, 봉암리는 군사도시이다. 군사도시는 인근 군부대와 밀접하게 관계를 맺으며 생활한다. 마을의 경제활동은 군인들의 수요를 가장 큰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소비자의 절대다수가 군부대와 관련된 인원들이다. 사단본부에는 많은 군인들과 군무원들이 근무 또는 복무한다. 유동 인구도 많다. 군인 가족에서부터 군 관련 업체의 직원들까지 포함하면 최소 몇백 명이 그 작은 마을 인근에서 생활한다. 당연히 봉암리의 주민들은 군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농사일부터 각종 공사, 청소 등 생활 깊숙이 군인들의 일손이 드리워진다. 학교도 마찬가지이다. 가끔 부대에서 군의관과 의무병들이 학교에 방문했다. 특히, 봄이면 채변 검사를 하고 구충제를 줬다.
어느 날이었다. 군의관이 교실에 와서 우리 반 아이들의 충치를 진료해 주었다. 섞은 치아를 빼준 것이었다. 시골 마을이라 치과가 있을 리 없었고 그렇다고 요즘처럼 시내에 나가서 정기적으로 진료를 받을 리도 만무했다. 필자도 당연히 충치가 있었을 것이다. 마취도 하지 않은 채, 펜치처럼 생긴 도구로 내 섞은 치아를 우두둑 소리와 함께 발치했다. 워낙 많이 썩어서 별로 아프지도 않았다. 시원했다. 어떤 친구는 치아 6개를 뺐다고 자랑 아닌 자랑을 해댔다.
학교에서 운동회가 열릴 때는 군인들이 와서 천막도 치고 운동장에 라인도 그려주었다. 당연히 끝나면 각종 뒷정리까지 모두 해주었다. 그들도 군부대에만 있는 것보다는 그렇게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즐거웠을 것이다. 어느 토요일 오후, 사단본부에 위문 공연이 열렸다. 당시 사단에 근무하셨던 아버지를 통해서 위문 공연 소식을 들었고 학교의 친구들에게도 그대로 알려주었다. 우렁찬 밴드 소리와 함께 이루어지는 가수들의 공연은 신나는 구경거리였다. 지금의 전국노래자랑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형형색색 빛나는 멋진 옷을 입은 무용수와. 누군지도 모르지만 멋지게 노래하는 가수를 신기하게 구경했다. 이때 보았던 가수 중에는 국민가수 ‘조용필’도 있었다. 그는 그때만 해도 그리 유명한 가수는 아니었다. 그는 우리에게 사인도 친절하게 해주고 악수도 해주었다. 참 수수하고 인정 어린 인상이 잊히지 않는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그는 우리나라 최고의 가수로 발돋움했다.
이렇게 봉암리 사람들은 군인, 군부대와 함께 어울려 생활했었다. 지금도 사단본부는 그대로 그 자리에 있다. 하지만 봉암리의 상권은 사라진 지 오래다. 군인 가족이 살던 관사도 없어졌다. 대다수 군인조차 외출이나 휴가를 동두천 시내로 나가서 보낸다고 한다. 봉암리 인구도 대폭 줄었다. 길거리에 사람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많이도 보였던 여러 가게는 간판만 있고 텅 빈 곳이 대다수다. 봉암초등학교 학생 수도 채 30명이 안 된다고 들었다. 여느 시골 마을처럼 이곳의 인구도 계속 줄어든다. 머지않아 봉암초등학교도 통폐합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1982년 여름방학 직전, 난 이곳을 떠나 서울로 또 전학을 갔다. 4개월 정도의 짧은 기의 봉암리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간 것이다. 하지만 우리 가족이 완전히 봉암리를 떠난 건 아니었다. 서울의 중학교 진학을 위해 나 혼자 서울의 친척 집에 맡겨진 것이다. 나를 제외한 가족들은 여전히 봉암리의 군 관사에서 살았고, 난 토요일 오후에 혼자 이곳에 왔다가 월요일 새벽 아버지께서 태워주신 군용 지프로 동두천 시외버스터미널에 와서 서울로 가는 시외버스를 홀로 탔다.
일요일 밤이 너무 싫었다. 당시 일요일 밤에 하던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싫었다. 저 프로그램을 보면 내일 아침 일찍 나 홀로 서울로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엄마, 아빠, 동생과 같이 생활하지 못하고 혼자 멀리까지 가는 일이 너무나 싫고 슬프기까지 했다. 주중에, 어머니께서는 우체국까지 가셔서 내가 머물던 친척 집에 시외 전화를 걸으셨고 내 안부를 물으셨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 어린아이를 혼자 먼 곳에 맡기셨으니 어머니께서 얼마나 걱정이 많으셨을지 상상이 된다. 짧은 통화지만 엄마의 목소리를 잠시라도 들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하지만 밤이 되면 난 가족이 보고 싶어 혼자 베갯속을 적시며 눈물을 흘렸다.
방학이 되어서야 이곳에서 부모님과 함께 지낼 수 있었다. 바로 이때 춘삼이와 친해졌다. 춘삼이의 소개로 함께 버스를 타고 동두천에 있는 주산학원을 함께 다녔다. 춘삼이는 주산도 잘했다. 머리가 영리했다. 주산, 암산도 금방 늘었다. 내가 봐도 그는 꽤 명석한 친구였다. 그렇게 춘삼이와는 유독 더 친해질 수 있는 계기가 있었다.
그렇게 6학년 겨울방학까지를 봉암리에서 이리저리 보내고 우리 가족은 서울로 완전히 떠나오게 된 것이다. 1983년의 봄이었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춘삼이와 다시 연락이 닿은 것이다.
그 이후로 춘삼이를 지금까지도 자주 연락하며 지낸다. 춘삼이는 아직도 초등학교 때 살던 그 집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다. 다시 가 본 춘삼이의 집은 예전 그대로였다. 버스터미널 옆쪽. 어깨가 닿을 정도로 좁은 골목을 비집고 안쪽으로 걸어서 들어가면 그의 집이 나온다. 바로 그 집의 마당 수돗가에서 친구들과 떡밥을 만들었다.
동창 중에서 유일하게 춘삼이만이 봉암리를 아직 지키며 살고 있다. 지금은 춘삼이의 아이들이 모두 졸업했지만 얼마 전까지 봉암초등학교 전교생 30명 중 3명, 그러니까 무려 10퍼센트가 춘삼이의 아들이었다. 춘삼이 덕분에 봉암리도 다시 가게 되고 예전의 추억도 다시 그리워할 수 있다. 그에게 너무나 고맙기만 할 따름이었다.
2024년 어느 겨울날, 춘삼이를 오랜만에 만났다. 작년 봄 이후 처음이다. 각자의 삶이 있기에 자주는 아니지만, 그를 만나면 언제나 반갑고 푸근하다. 춘삼이의 덩치는 다부지고 얼굴도 터프하다. 국민학교때의 야리야리하고 홀쭉한 체격이 아니다. 그는 특전사 공수부대 하사관 출신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거칠고 투박해 보인다. 하지만 그는 가벼운 욕설은 커녕 조금이라도 거친 말은 입에도 담지 못한다. 신기할 정도이다. 친한 친구끼리는 친분의 증거로 조금씩은 편한 말을 쓸 법도 한데, 조금도 그런 모습을 찾을 수조차 없다. 참 좋은 친구이다. 아마추어 사진작가답게 멋진 사진들을 수시로 나에게 보내준다. 아들 셋을 키우면서도 부모님까지 한 집에서 오랫동안 모셨다. 힘들거나 짜증이 난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성격이 그리도 무던하고 좋다. 오로지 자신의 역할을 말없이 하며 살아간다. 그 힘든 덤프트럭을 새벽부터 몰아가며 가족들을 위해 살았었다.
어느 날, 춘삼이가 서울에 왔다고 연락이 왔다. 늦은 시간인데도 한걸음에 그를 찾아갔었다. 먹을거리라도 사주고 싶었다. 덤프트럭을 대기시키는 동안 시간 여유가 생겨서 나에게 연락했나 보다. 힘든 내색이 전혀 하지 않은 그가 너무나 대단해 보였다.
왜 다른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순간들은 영원히 사라진 반면,
우연히 마주친 덧없는 순간들은 기억속에 끈질기게 남아 있는지....
(폴 오스터)
그를 알게 된 지 올해로 44년째이다. 오늘도 그렇게 우리는 세월을 함께 들이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