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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동생과 흙 묻은 하얀 체육복

by 자화상

1980년대 중반, 드높은 가을하늘이 청명하게 펼쳐진 어느 날, 필자는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5학년의 어린 소년이었다.


가을운동회가 열렸다. 형형색색의 만국기가 하늘을 덮었다. 운동장 주변 큰 나뭇가지를 한군데로 모으듯이 팽팽하게 연결하고 있다. 어렸을 적, 만국기는 운동회의 상징처럼 생각되었다. 보기만 해도 괜히 마음이 설레였다. 모처럼의 축제일에 우리 학교의 아이들과 부모, 마을 주민들은 꽤 들떠 있었다. 그야말로 ‘즐거운’ 가을 운동회였다. 당시 우리 학교는 시골치고는 규모가 큰 학교였다. 아마 가족, 동네 주민들까지 합치면 2,000명은 족히 넘었을 것이다.

아침부터 이어지는 달리기, 줄다리기, 공굴리기 등 당시를 대표하는 종목들이 치러졌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도 없이 환한 표정으로 운동회를 만끽했다. 맑은 날씨는 선물과도 같았다. 눈동자에 들어가서 귀찮게 하던 운동장의 희뿌연 모래바람마저 반가울 정도였다. 어느덧, 학생과 주민들로 운동장은 빼곡하게 들어찼다. 다들 하얀색 체육복에 누가 누군지 가늠하기도 쉽지 않았다.

가족들, 친구들과 둥그렇게 둘러앉아 준비해 온 점심을 먹고 난 후, 조금은 지치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부채춤, 줄다리기 등 주요 종목들도 모두 마치고 운동회도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었다. 군(軍) 관사(館舍)에 사는 여러 가족이 모여서 함께 집으로 향할 준비를 할 무렵이다.

당시 내 동생은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채 10살이 되지도 않을 어린아이였다. 다른 아이들은 약속 시간에 맞춰 정해진 곳에 모두 모였는데 동생만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금방 오겠지’ 하고 별생각 없이 기다렸다. 하지만 차츰 시간이 지날수록 어머니와 나는 서로의 얼굴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면서 초조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결국 본부석에 동생을 찾는 방송을 요청했고 나를 비롯한 관사 사람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동생을 찾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거의 우시다시피 하며 이리저리 뛰어다니셨고 나도 동생의 이름을 애타게 불러대며 운동장과 학교 앞의 마을까지 여기저기 동생을 찾아다녔다. 다시는 동생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얼마나 겁이 났는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할 정도이다.

그렇게 정신없이 뛰어다닌 지 거의 1시간이 지났을까? 학교 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철길 건널목 앞의 자그만 문구점(이름이 ‘약속문구점’이었다.), 그 문구점 앞의 좁다란 사각형의 나무 평상에 앉아 있는 동생을 찾게 되었다. 동생은 아침에 어머니께서 주신 용돈 천 원에 홀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용돈을 소비하고 있었다. 용돈이라고는 거의 받아보지도 못했던 넉넉지 않은 집안 사정에 당시 거금인 1,000원을 받았으니 어린 녀석의 마음이 붕~ 하고 들떴을 것이다. 어쩐지 동생은 운동회에는 관심도 없었었던 것 같았다. 그 소중한 용돈으로 무엇을 살지 궁리하느라 자기 딴에는 바쁘게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900원은 군것질을 했고, 마지막 남은 100원으로 평소에 갖고 싶었던 자동차 프라모델을 사서 정신없이 만들고 있었던 것이었다.

동생은 조립에 열중하느라 내가 이름을 크게 부르고서야 고개를 들어서 나를 쳐다보았고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동생을 찾았다는 안도감에 화를 내지도 않았다. 잠시 후 재회한 어머니께서 야단을 치셨고 그제야 동생은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우리 가족 셋은 서로 손을 잡고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어머니께서는 얼마나 가슴을 졸이셨을까?

세 살 터울의 동생에 대한 내 마음은 애틋하다. 어린 시절, 동생은 옷이며 학용품을 모두 나한테 물려받았다. 그런데도 단 한마디 불평이나 투정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프로야구가 생겼을 때 서울까지 가서 어린이 팬클럽에 가입해 주신 적이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가정형편 때문에 형인 나만 가입을 시켜주셨다. 동생은 그때도 함께 따라갔었다. 하지만 ‘다음에 해 줄게’라는 어머니의 한마디에 ‘알겠어’라며 아무런 말 없이 어머니의 말씀을 따랐다. 그 어린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이 어디 쉬운 일인가? 동생은 그렇게 어른스러운 성품을 가진 아이였다.

초등학교 시절의 대부분을 시골 학교에서 보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만 사주신 자전거의 뒷 자리에 동생을 자주 태워서 다녔다. 동생이 아프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 난 수건을 두세 장이나 포개어 푹신한 쿠션을 만들어서 자리에 얹었고 그 위에 동생을 태웠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동생과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서울의 집을 간신히 마련한 터라 남는 방은 전세를 주셨고, 대신 나와 동생이 함께 같은 방을 쓴 것이다. 그 대신 어머니께서는 책상을 두 개 맞추어주셨다. 동생과 나는 처음으로 가지게 된 자신만의 책상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내가 공부하기 시작하니까 동생도 자연스럽게 공부를 따라 한 것이다. 나는 내가 보던 참고서와 여러 학용품을 동생에게 전해주었고 시험에 나왔던 문제나 중요한 요점을 정리해 둔 노트도 잘 보관했다가 동생에게 물려주었다. 같은 학교에 다녔던 덕분이었다.

동생은 영리했다. 큰아들인 나에게 신경 쓰느라 부모님의 관심을 받지도 못했지만, 내가 쓰던 참고서와 학용품을 물려받으며 혼자 조용히 공부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중학교 3학년 시절, 갑자기 동생은 몸이 안 좋아졌고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전교 상위권이던 성적이 장기간 결석을 하다 보니 자신보다 처지던 학생들에게도 성적이 밀리게 되었다. 자존심이 많이 상했던 모양이다. 동생은 결국 학교 대신 입시학원을 선택했고 아픈 몸을 스스로 돌보면서 묵묵히 혼자 공부를 해나갔다. 몇 년의 노력 끝에 그는 대학 진학에 성공했다. 그것도 무려 서울의 명문대 공과대학이었다. 채 마치지 못한 고교 시절에 대한 아쉬움이 한꺼번에 보상받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필자와 동생, 어머니의 어린시절 사진(남산공원 앞) 1979년 무렵


하필 동생이 대학에 진학할 무렵, 우리 집안 사정이 녹록지 않았다. 동생은 학자금대출을 받았고 그 와중에 과외 아르바이트로 학비도 충당했다. 교대를 일찍 졸업한 덕분에 어린 나이에 교직에 들어선 덕분에 나도 어느 정도 살림에 도움은 되었고 틈틈이 동생이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조용히, 그러나 뚜벅뚜벅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동생은 지금, 세계 굴지 글로벌 기업의 수석 임원이다.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고 때맞춰 휴대전화의 저변이 확대되어 전공 인력이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 덕에 취업도 원하는 곳에 거의 성공했다. 아무리 나이를 먹고 대기업 임원이지만 동생은 동생일 뿐이다. 흙 묻은 체육복에 소매로 코를 닦으면서 장난감에 빠져있던 어린 시절의 모습이 오버랩(overlap)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그때부터 무언가 만드는 것이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푹 빠져들곤 했다. 결국 그 기술로 취업도 하고 지금도 잘 살고 있다.

많은 시간이 쏜살처럼 흘러버렸고, 세월은 그를 성공한 어른으로 만들었지만, 내 기억 속의 동생은 늘 약속문구점 앞 평상에 앉아 프라모델 조립에 열중하는 작은 아이로만 남아 있다. 그가 입은 하얀색 체육복에는 하루 종일 바쁘게 용돈을 쓰러 다니느라 여기저기서 묻은 흙이 꾀죄죄하게 묻어있다. 그리고 코 밑에는 콧물이 흐르다 말라버린 허연 자국도 보였다.


지가 아무리 돈을 많이 벌건, 지위가 높건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지금도 내가 밥과 커피를 사준다. 자신이 사려고 하지도 않는다. 나도 사 달라고 하지 않는다.

내 눈에는 아직도 그저 귀엽고 애처로운 코흘리개 어린 동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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