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해마다 4월이면 들려오는 노래가 있다. 바로‘벚꽃엔딩’이다. 그 이전에도 봄날에 연인, 가족과 함께 벚꽃의 향연을 즐기는 일이 어느덧 일상화되어 있었지만, 이 노래 덕분에 4월의 벚꽃 구경은 그냥 지나치면 너무나 아쉽고 허전한, 마치 하나의 행사처럼 정례화가 된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어버렸다.
출근길에 켜 놓은 아침 뉴스의 일기예보에서도 한껏 화사하게 차려입은 기상 캐스터가 지역별 벚꽃의 개화 시기를 아기자기한 그래픽을 배경으로 소개하는 장면이 보인다. 대략 4월 초순~ 중순 무렵이 우리나라의 벚꽃 개화 시기이다. 서울의 벚꽃은 4월 첫 주가 가장 화려하다. 여의도 윤중로 벚꽃 축제 장소에는 정말 발 디딜 틈도 없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룬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탈출하여 봄을 만끽하는 즐겁기만 한 시간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은 서울의 창경궁에 왕벚나무를 심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 제국이 패망한 후 벚꽃 축제를 지속하는 것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벚꽃은 일본을 상징하는 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1983년에 창경궁에 심어졌던 벚나무는 베어졌고, 일부는 여의도의 윤중로에 옮겨심어졌다. 축제의 지속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벚나무를 가로수로 심어왔고, 벚꽃 축제가 각지에서 개최됐다(위키백과 참조). 아마 이때 윤중로로 옮겨 심었던 벚꽃으로 인해 윤중로에서 벚꽃 축제가 개최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벚꽃의 꽃말은 아름다운 정신(영혼), 정신적 사랑, 삶의 아름다움이다. 그 외에도 절세미인, 삶의 덧없음과 아름다움, 순결, 뛰어난 아름다움, 정신미, 교양, 부(富), 그리고 번영을 뜻하기도 한다. 벚꽃과 국화는 일본을 대표하는 꽃이다. 일본 경찰의 휘장과 계급장에 벚꽃이 들어간다. 엄밀히 말하면 벚꽃도 왜색이 짙다고 할 수 있다.
구태여 우리 전통의 꽃도 아닌, 일본을 대표하는 꽃을 이렇게 좋아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던 적이 있다.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는 것이 국가적 업적이 되었을 시기도 있었다. 일본과의 A매치(국가대항전)축구 경기가 열리는 시간이면 대부분의 국민들이 생중계를 텔레비전으로 시청하느라 시내에 차들이 거의 다니지 않을 정도로 한산했다. 여러 국제대회에서도 다른 국가에는 다 져도 상관없고 다만 일본만 이기면 된다는 식의 응원을 할 때도 있었다. 불과 10~20여 년 전이다. 벚꽃 축제를 일제의 흔적으로 생각해서 배척하는 것이 적당한가에 대해서는 사실 개인적인 판단이 확실히 서질 않는다. 교통, 통신의 발달로 전 세계가 서로 소통, 교류하는 21세기 글로벌 시대에 벚꽃 놀이 하는 것까지 이념적인 문제와 연관시키는 일이 다소 부담이다. 어찌 생각해 보면, 그저 봄에 피는 하나의 어여쁜 꽃을 가족, 연인과 함께 즐기는 일에 불과한 것인데 말이다.
조선시대까지 꽃구경에서도 최고의 꽃으로 쳐주는 건 복숭아꽃, 복숭아꽃 다음으로 살구꽃이었다. 복숭아꽃으로 유명한 곳이 북둔, 오늘날의 성북동 일대였고 복숭아꽃이 피는 시기가 되면 이곳으로 꽃구경을 온 것이었다. 그리고 살구꽃으로 유명한 곳은 종로구 행촌동 근처의 필운대(弼雲賞)였다. 필운대는 조선 중기의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이 살던 곳이다.‘필운’은 그의 호이다. 그러다가 꽃구경의 대상이 벚꽃으로 바뀐 건 일제강점기 이후였다(위키백과). 이리저리 살펴봐도 벚꽃 구경이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로 보인다.
여러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차치(且置)하고서라도 연분홍색 벛꽃 잎이 너무나 아름다운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선연한 색과 다섯 갈래의 손톱만한 크기의 꽃잎은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이 유쾌해진다. 게다가 산들산들 봄바람에 몇 개씩 떨어져 날아가 거리에 내려앉는 모습은 순백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과도 같이 우아하다.
벚꽃은 활짝 피었을 때도 좋지만 질 때의 순간이 더 아름답다. 일 년에 일주일 정도의 짧디짧은 개화기를 가져서일까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아마 벚꽃이 한 달 정도 활짝 핀다면 지금만큼은 멋져 보이지는 않을 것 같다. 게다가 벚꽃잎은 품종의 특성상 약한 바람에도 잘 떨어져 나간다. 살랑살랑 이는 바람에 회색 아스팔트 도로와 초록색 잔디 위에 분홍의 꽃비가 유성처럼 내린다. 배경색이 더해져서인지 그 분홍색이 더 짙게 느껴진다. 유료 필터 효과를 입힌 동영상처럼 멋지고 낭만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엊그제, 얕게 내린 봄비 때문에 보도블럭 위에 연분홍색 벚꽃잎이 새겨지듯 사뿐히 내려앉았다. 흡사 점자(點字)처럼 가지런하게 놓은 꽃잎을 마음속으로 이리저리 엮어서 글자로 만드는 상상을 해 보았다. 흩날리는 다섯 갈래의 벚꽃잎 하나를 손바닥 위에 살포시 놓고 내 마음에 품어본다. 가느다란 봄바람에도 산산이 흩어지는 분홍빛 눈물과도 같다. 길가에 수북이 쌓여가는 벚꽃잎만큼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은 커져만 간다. 이렇게 봄은 벚꽃과 함께 아무 소리 없이 내 곁에 다가왔다가 여러 가지 기억을 아로새겨주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봄바람 휘날리며/흩날리는 벚꽃잎이/울려 퍼질 이 거리를 둘이 걸고 싶다는 ‘벚꽃엔딩’의 가사처럼 말이다.
예전의 4월은‘잔인한 달’로 대표되곤 했다. 영국 시인 T.S.엘리엇(Eliot, 1888~1965)은 <황무지>에서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 불렀던 것에서 유래한다. 그 시의 첫 구절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로 시작된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4월은‘잔인한 달’이라는 슬프고 두려운 문구보다는 화사한 벚꽃을 기다리는 설레는 시간이 되었다. 그렇지만 4월은 그리 ‘낭만적인 달’만 아니다. 근현대사의 어두운 사건들인 제주 4·3 사건, 4·19혁명, 세월호 참사 등이 모두 4월에 일어났던 일들이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차츰 잊혀 가는 역사의 아픔을 벚꽃의 연분홍 파스텔로 덧칠하고 있는 느낌이다. 파스텔 톤은 연한 색이라 아무리 덧칠해도 아래의 그림이 완전히 감추지는 않는다. 벚꽃의 낭만을 향유하되, 4월에 생겼던 우리의 어두운 역사 또한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힘주어 말하고 싶다.
벚꽃이 질 무렵이면 중·고등학생들은 중간고사 준비에 돌입한다. 벚꽃은 잠시 피었다가 이내 하늘로 날아가 버린다. 어쩌면 그들에게 벚꽃놀이는 사치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앞으로 남은 평생의 시간 동안 벚꽃을 즐길 수 있는 수많은 나날이 남아있으니 그저 그 시간만 잘 견디고 이겨내라는 말을 전해 주고 싶다. 중간고사가 끝나면 이내 어린이날, 어버이날 등 황금연휴들이 줄지은 5월이 기다리고 있다. 활짝 핀 붉은색 장미꽃과 따사롭고 화창한 날씨는 덤이다. 그렇게 어이없고 암울한 항공기 참사로 시작했던 2025년도 뜨거운 여름을 향해 서서히 나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