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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 산다는 것!

그 첫 번째 조건은 ‘이별’

by 자화상

아침부터 눈발이 흩날리던 지난 2월, 진료받을 일이 있어 병원에 들렀다. 외래진료를 마치고 비용 수납을 위해 1층 로비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환자와 보호자, 병원 관계자들이 뒤섞여 각자의 목적에 따라 북적대며 걸어 다니는 풍경이 낯설지 않았다. 이미 여러 차례 보아왔던 모습이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아버지께서 편찮으실 때 몇 달간 병원에서 보호자로 생활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싫건, 좋건 병원의 모습들은 이미 익숙해진 장면들이다.


의자 옆의 좁은 공간에서 이동식 병원 침대에 기운 없이 누워있는 할머니와 그 침대를 옮겨두고 진료비 수납을 하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 2층의 진료실 앞에서도 잠시 마주쳤던 노부부(老夫婦)였다. 할머니는 ‘뼈만 남았다’는 비유가 어울릴 정도로 야윈 모습에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로 병원의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계셨다. 그야말로 임종을 직전에 둔 힘든 모습이었다. 할아버지의 표정도 영 좋지 않다. 그런데 할아버지도 건강이 좋지 않아 보였다. 두 내외가 너무 가여웠다.

일반적으로 퇴원을 기다리는 환자와 보호자들의 표정은 조금이지만 그나마 밝기 마련인데 그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어쩌면 병원에서 더 이상 손을 쓰지 못하니 집으로 가라는 의사의 ‘포기’ 의견이 내려졌을지도 모른다. 우연이겠지만 오늘만 그들의 모습을 벌써 3번째 마주했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나 혼자만의 상상에 잠시 사로잡혔다. 어림잡아 80세가 훌쩍 넘어 보이는 그들은 아마 60년 정도를 함께 지냈을 것이다. 20세 안팎의 젊은 나이에 결혼해서 몇 명의 자녀를 두었을 터이다. 그리고 힘든 농사일을 하며 서로를 격려하면서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워냈을 것이다. 아마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서 그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저렇게 그들끼리만 몰래 병원에 다니고 있을 것이다. 저토록 불편한데도 자식이 옆에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어쩌면 자식들끼리 서로 봉양을 미루면서 난잡한 집안싸움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늙어 죽어간다는 것! 사람으로 태어난 자(者)라면 누구든 예외 없이 겪어야 할 인생사(人生事)이다. 인간이라면 절대 거역할 수 없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슬픔까지 덮이는 것은 아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을 다른 세상으로 보내야 하는 일은 너무나 가슴 아프다. 몇십 년을 함께 했던, 사랑하는 사람이 순식간에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을 자신의 눈으로 보는 일은 어떤 언어로도 형용할 수 없이 괴롭다.

지난해 4월, 어느 평범한 일요일 오후였다.


오후에 집 주변을 가볍게 걸어서 산책할 때였다. 갑자기 가슴의 통증이 느껴졌다. 그전에도 비슷한 증상을 가끔은 느꼈었지만 한 10여 분만 지나면 괜찮아졌었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벤치에 잠시 앉아 쉬었다. 하지만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고 급기야 식은땀이 나고 한 발 걷는 것조차 너무나 힘들었다. 일단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기어가다시피 걸어 집에 간신히 도착했고 침대에 쓰러지듯이 누웠다. 하지만 내 몸이 이전과 다르게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스스로 대학병원의 응급실을 찾게 되었다. ‘죽음’이라는 큰 사건의 ‘복선’처럼 찾아온 고통은 오랜 시간 동안 날 괴롭혔다. 두 차례의 수술과 함께 겪게 된 병원 생활은 너무나 힘들었다. 새벽 5시면 병실의 모든 불이 켜지고 나를 포함한 환자들은 줄을 지어 지하의 영상의학과에 가서 엑스레이를 촬영해야 했고 수시로 팔의 혈관을 날카로운 바늘로 찔러 채혈을 해갔으며 혈압, 맥박, 체온을 하루에도 여러 차례 재어갔다. 소변과 대변의 횟수와 양도 계속해서 기록해야 했고 먹을 수 있는 음식 또한 철저히 통제되었다.


수술실로 들어가는 침대에서 희미하게 보이던 하얀색 천장과 음울한 조명은 지금도 가끔 꿈에 나타나 나를 괴롭힌다. 스스로 호흡하는 연습을 하루에 30분씩 해야만 했고 내가 원하는 곳으로 걷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힘들었다. 기억조차 나지 않는 아주 어렸을 적, 걸음마 연습을 한 이후로는 처음으로 하게 된 일들이었다. 회복을 위해서 하루에 2시간씩 보행기에 의지한 채 걷는 연습을 했어야만 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숨 쉬는 일, 자는 일, 의자에 앉는 일, 대소변을 보는 일, 누군가와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는 일 등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편히 했었고, 할 수 있었던 일들을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할 수 없었다. 그저 계속 연습하고 연습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고, 아울러 그러한 일들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하였는지를 함께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내 몸이 언제 갑자기 위급한 상황이 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은 24시간 나를 괴롭혔다.


그렇게 50여 일간의 병원 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날, 난 처음으로 우리 집의 베란다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분홍색 안락의자에 기대어 앉아 창밖의 목련 나뭇가지를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우리 집 창밖의 풍경이 저런 색깔이었고 저런 모양이었구나…’ 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루하루 바쁜 일상과 마감 시간에 쫓겨 스스로 옥죄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서야 몸은 차츰 회복해 갔고 그만큼의 시간 동안 적지 않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진심으로 날 걱정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했다. 평소에 그다지 가깝다고 생각하지 않던 사람이었는데 의외로 날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그와는 반대로, 평소 절친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나에게 그렇게 대하지 못한 사람도 볼 수 있었다. 아팠던 덕분에 이렇게 주변 사람들과의 인간관계가 어느 정도 리셋(reset)되었다. 그동안 텔레비전이나 책에서 보았던 환자들 이야기는 감동적이긴 했지만 그다지 공감하지는 못했었다. 이 일을 계기로 난 그들과 비슷하게나마 그 아픔에 대하여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을 한 직후였기 때문이었을까 병원 로비에서 본 노부부의 모습은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그들’과 ‘나’를 포함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우리 모두’는 이별을 겪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이별은 세상의 어떤 일보다 가슴 아프다. 거스를 수 없는 일인지는 잘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적응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사람으로 산다는 것의 첫 번째 조건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겪어야 하는 일’이 아닐까? 두어 달이나 지났는데도 그날 보았던 노부부의 처연한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리고 그날 난 분명히 보았다.

걱정하는 눈빛으로 할머니를 바라보시던 할아버지와는 정반대로 할머니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보고 계셨다. 혹시 할머니의 그 눈빛 속에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소박한 대답이 들어있지 않을까?’라는 자문자답(自問自答)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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