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넋이 담긴 지폐
제목: 붉은 한(恨)의 강 - 넋이 담긴 지폐
이 이야기는 필자가 직접 겪은 일을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입니다. 1980년대 중반, 당시 경기도 연천군의 한탄강 인근의 마을로 이사를 갔었고 그곳에서 약 2년여간 거주했습니다. 어느 날 오후, 당시 같은 반의 어떤 친구가 우리들 몇 명을 데리고 구경거리가 있다며 한탄강에서 하는 굿을 보러 간 적이 있습니다. 굿을 하는 장소의 하류 쪽에 무당이 강에 뿌린 돈이 흘러왔고, 우리는 그 돈을 주워 빵과 과자를 사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 이후로 좋지 않은 일이 생겨났습니다. 친구 한 명은 자전거 체인에 종아리가 끼어서 상처를 봉합해야 했고 어떤 친구는 이유도 없이 넘어져 팔이 골절되기도 했습니다. 필자도 꿈속에 자꾸 무서운 형체가 나와 며칠 동안 잠을 설치기도 했습니다. 당시의 이야기를 각색하여 꾸민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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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태훈이다. 그 여름방학은 내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다. 1990년 즈음이니까 벌써 30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서울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던 나는 우리 집 사정이 갑작스럽게 나빠지는 바람에 경기도 북쪽, 연천군에 있는 외할머니 댁에 억지로 맡겨졌다. 내가 머물게 된 마을은 말 그대로 ‘깊은 산속’이었다. 좁은 흙길을 한참 달려서야 닿을 수 있는 외딴 곳이었다. 특히, 외할머니 댁은 한탄강이 굽이쳐 흐르는 마을의 가장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겉보기엔 평범한 시골 가옥이었지만, 밤이면 집 주변을 에워싼 나무들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강물 소리가 벽 너머로 속삭이는 것처럼 들려와 어쩐지 기이한 기분이 들곤 했다.
그래도 처음 마을에 도착했을 때, 나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시원한 강가에서 물놀이도 하고, 자연 속에서 여유롭게 놀 수 있겠지.’ 그러나 그런 기대는 마을 어른들의 말 한마디에 금세 꺾이고 말았다.
“한탄강은 가까이 가면 안 된다. 그 물살이 장난이 아니야.”
어른들은 하나같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마치 강 자체가 어떤 금기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말투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한탄강은 이름만 들으면, 애절하고 순한 물길을 떠올리기 쉽다. ‘한을 탄다’는 이름 때문일까. 그러나 막상 그 앞에 서면, 사람들은 곧 깨닫게 된다. 이 강은 결코 한을 달래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 한을 껴안은 채, 말없이 삼켜버리는 곳이다.
어르신들은 예부터 말했다. “한탄강엔 사연 없는 물이 없다.”
전해지는 이야기 중 하나는, 조선 후기 어느 여인이 정절을 지키기 위해 강물에 몸을 던졌고, 그 혼이 강에 머물러 지금도 물안개를 타고 나타난다는 전설이다. 때때로 해가 뜨기 전, 강 위로 피어오르는 흰 안개는 그 여인의 넋이 떠도는 흔적이라 했다.
또 다른 이야기에선, 한탄강이 지옥으로 이어진 문이라며, 익사한 이들의 혼이 빠져나가지 못하고 강을 서성이며 다음 대상을 기다린다는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전설보다 더 두려운 건, 실제 그 강의 모습이었다.
물빛은 평범한 강과 달랐다. 탁한 듯하면서도 깊이를 가늠할 수 없게 만드는 어두운 회색. 마치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듯한 색이었다. 강바닥은 대부분 현무암으로 이뤄져 있었고, 그 울퉁불퉁한 암석 위엔 이끼가 두껍게 껴 있었다. 맨발로 밟기엔 위험했고, 신발을 신어도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특히 한탄강은 '용암이 흐르던 길'이라 불릴 만큼 독특한 지형을 지녔다. 예측 불가능한 지형의 틈새들은 물속에서 거대한 웅덩이나 협곡처럼 형성돼 있었고, 갑작스레 물살이 빨라지는 구간도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단 1초 만에 균형을 잃고 휩쓸려 들어가기 충분했다.
어쨌든, 하루하루가 지루함과 무료함 속에 흘러갔다. 친구도 없고, 텔레비전도 나오지 않았다. 나를 위로해 주는 건 오직 강 근처 숲길을 따라 조용히 산책하거나, 언덕 위에서 멀리 강을 내려다보는 일뿐이었다. 처음엔 이런 고요함이 새로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정적은 나를 조용히 잠식해갔다.
‘이대로 한 달을 보내야 한다니…’
그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괜히 발끝으로 흙을 차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언덕길을 따라 걷던 내 앞에, 누군가 불쑥 나타났다. 그 아이의 이름은 도윤이었다. 도윤이는 내가 도착한 지 이틀쯤 되었을 무렵, 마을 어귀에 있는 느티나무 아래에서 처음 말을 걸어왔다. 그날따라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고, 공기엔 습한 풀 냄새가 배어 있었다. 나는 괜히 흙을 차며 그늘 아래를 서성이고 있었는데, 그때 등 뒤에서 조용히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서울에서 왔지?”
고개를 돌리자, 검은 반팔 티셔츠에 무릎이 해진 반바지를 입은 또래 아이가 서 있었다. 검게 그은 피부에 짧게 자른 머리, 말없이 웃고 있는 얼굴은 분명 익숙한 또래의 모습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처음 보는 아이임에도 낯설지 않았다. 그보다도 더 이상했던 건 그의 눈빛이었다. 맑고 깊은 갈색 눈동자 속에는 또래 아이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서려 있었다. 마치 모든 걸 오래전부터 다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그날 이후 우리는 자주 함께 다녔다. 도윤은 말수가 많지 않았지만, 말할 때면 또렷하고 조리 있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말을 하려고 하는지를 미리 짐작하는 듯한 느낌을 자주 주었다. 내가 "심심하다"는 말을 꺼내기 전에 이미 다른 놀이를 제안했고, 내가 뭔가 궁금해하기만 해도 마치 읽기라도 한 것처럼 그에 대해 설명을 해줬다. 그런 면들이 이상하리만치 편안하게 느껴졌고, 나는 자연스럽게 도윤에게 끌렸다.
우리는 한탄강 근처 풀숲에 숨겨진 작은 모래사장에서 돌을 튕기거나, 오래전에 버려진 폐가에 몰래 들어가 낡은 장롱과 창문을 열어보며 시간을 보냈다. 폐가는 이미 들쥐와 거미줄의 왕국이 되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도윤은 그 안에서 전혀 겁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집 구조를 훤히 꿰고 있는 듯 행동했고, 내가 문득 “이 집, 너 전에도 와본 거야?” 하고 물었을 때, 도윤은 대답 대신 조용히 웃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도윤에게도 이상한 점이 있었다.
밤이 되면, 그의 눈빛이 바뀌었다. 낮에는 장난기 섞인 웃음을 지었던 그 아이가, 어두운 하늘 아래에서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강 쪽을 바라보았다.
어느 날 풀벌레 소리도 잦아든 밤, 마을 외곽의 돌담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도윤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허공을 응시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무언가를 듣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강 쪽 어딘가에 귀를 기울였다. 그 모습이 어찌나 기묘하던지, 나는 차마 말을 걸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상했던 건, 도윤이 그 한탄강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마치 그 강과 오랜 시간 얽혀 있던 사람처럼 말이다.
어느 날 오후였다. 장맛비가 하루 종일 내린 뒤, 축축이 젖은 공기 속에서 강가의 길을 걷던 우리. 도윤은 물기를 머금은 공기 속에서 유난히 말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아무렇지 않게 나에게 물었다.
“태훈아, 혹시… 넋 건지기 알아?”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생소하고 묘하게 낯선 단어.
“그게 뭐야?”
내가 묻자, 도윤은 잠시 입을 다물고 강 쪽을 바라봤다. 초록빛 나뭇잎 사이로 짙은 안개가 깔리던 강물. 그 물빛 아래로 무엇인가 웅크리고 있는 듯한, 설명할 수 없는 불길함이 깃들어 있었다.
도윤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우리 마을에서 매년 하는 굿이야. 물에 빠져 죽은 사람들… 그 사람들 넋을 달래는 거.”
그 말에 나는 도윤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평소에 보이던 익살스러운 표정은 자취를 감추고, 그의 눈동자는 싸늘할 정도로 고요했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단호했고, 그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한탄강, 너도 알잖아. 표면은 잔잔해도, 바닥은 깊고 울퉁불퉁하고, 바위랑 소용돌이가 많아. 그래서 매년 여름마다 꼭 익사 사고가 나. 어른들은 그게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떠돌이 넋이 사람을 끌어당긴다고 믿어.”
나는 그 말을 듣고 한탄강의 어두운 물빛을 떠올렸다. 무심한 흐름 아래 숨어 있는 깊고 침묵하는 어둠. 그 안에서, 무언가가 소리 없이 나를 내려다보던 기억이 떠올라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그래서 여름마다 사고가 나고 나면, 마을 어귀 쪽 강가에서 넋 건지기 굿을 해. 죽은 사람의 혼이 이승을 미련 없이 떠나도록. 그래야 더 이상 누가 끌려 들어가지 않거든.”
도윤의 말은 계속되었다. ‘넋 건지기’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었다. 무당은 나무로 만든 혼령의 인형을 강물에 띄운다. 북과 장구, 꽹과리가 울려 퍼지고, 무당은 그 소리 속에서 춤을 추며 혼을 부른다. 제상 위에는 희생자의 이름이 적힌 종이와 밥, 술, 꽃이 놓이고, 마을 사람들은 강가를 에워싼 채 조용히 두 손을 모은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 자리에 갈 수 없다. 어른들은 늘 단호하게 말했다.
“넋 건지기는 아이들이 봐선 안 되는 거야. 혼이 맑지 않으면, 넋에 끌려갈 수 있으니까.”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마치 등 뒤에서 누군가가 지켜보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도윤이의 말은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마치 그 말이 오래전부터 내 머릿속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었던 기억처럼, 낯설지만 기시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꿈에서 한탄강을 보았다.
그 물 아래에서, 누군가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며칠 후, 도윤이는 갑작스럽게 내게 말했다.
“태훈아, 이번에… 넋 건지기를 볼 수 있는 기회야. 나랑 같이 가볼래?”
그 말은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제안처럼 툭 던져졌지만, 순간 주위 공기가 한순간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주춤했다. 마을 어른들이 그토록 보지 말라고 당부했던 금기의 의식. 그게 바로 ‘넋 건지기’ 아닌가. 어릴 적부터 들었던 ‘혼이 맑지 않으면 끌려간다’는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하지만 도윤의 눈빛은 이전과 달랐다. 평소의 장난기 섞인 웃음은 사라지고, 어딘가 절박하고 단호한 빛이 어른거렸다.
나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끌렸다. 아마 ‘금기’라는 말이 가진 기묘한 힘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른들이 숨기려 하는 것일수록, 아이들은 더욱 알고 싶어지니까.
밤 10시, 우리는 조심스럽게 외할머니 댁의 낡은 미닫이문을 열고, 슬리퍼 소리 하나 내지 않으려 애쓰며 집을 빠져나왔다. 마을은 숨죽인 듯 조용했고, 산 아래로 흐르는 밤공기는 한층 차가웠다. 자전거를 끌고 강가 쪽 둔치로 향하던 길, 달빛은 유난히 밝고 맑았다. 땅 위의 그림자들이 너무 또렷해서, 마치 우리가 누군가의 시선을 받으며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도착한 강가에는 이미 의식이 시작된 듯했다. 멀리 촛불 수십 개가 줄지어 켜져 있었고, 붉은빛과 노란빛이 어둠을 일렁이며 강물 위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 불빛들은 바람이 없어 더 또렷했고, 마치 그 자체로 무언가 살아 있는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우리는 강가 근처의 수풀 뒤에 몸을 숨겼다. 잎 사이로 내다본 의식의 광경은 상상 이상이었다. 무당은 흰색 한복에 붉은 띠를 두르고, 검은 머리는 높이 쪽진 머리로 틀어 올려져 있었다. 그녀는 커다란 북 앞에 서서, 강을 향해 몸을 숙이며 무언가를 읊조리고 있었다. 북소리는 낮고 깊은 울림으로 강가를 진동시켰고, 공기 속에 은은한 향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 순간, 강물 위로 무언가 흘러갔다. 종이로 만든 배들. 그 위에는 과일과 술병, 그리고 가지런히 접힌 지폐가 실려 있었다. 그것들은 마치 누군가의 손길을 받은 것처럼 흔들림 없이 흘러갔다. 그 광경은 묘하게 아름다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기이했다. 살아 있는 것들의 의식을, 죽은 자가 지켜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당은 마지막에 지폐 몇 장을 높이 들어 올리더니, 외쳤다.
“이 돈은 너의 노자다! 미련 두지 말고 떠나라!”
그 말과 동시에 지폐를 강물에 던졌고, 파문이 일면서 지폐는 물 위를 돌다 여지없이 사라졌다. 이윽고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촛불만 남긴 채 자리를 떠났다.
우리는 그 자리를 끝까지 지켜봤다. 그리고 모두가 사라진 뒤, 수풀을 헤치고 조심스럽게 강가로 나왔다. 남겨진 촛농 자국 사이, 돌무더기 틈에 젖은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달빛에 젖은 종이는 이상하리만치 빛을 머금고 있었다.
“그냥 돈인데 뭐 어때?” 도윤이는 피식 웃으며 지폐를 주워 들고, 대수롭지 않게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그날 이후, 도윤은 달라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처음엔 단지 피곤해 보일 뿐이었다. 눈 밑은 퀭했고, 수업 시간엔 자주 졸았다. 하지만 밤이 되면 상황은 달라졌다. 자정이 넘을 즈음, 그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깼고, 이마는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강물 속에서… 누가… 날 보고 있어.”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돈을 돌려줘…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해… 계속…”
나는 겁이 났다. 그 지폐가 단순한 돈이 아니라는 걸, 이제야 실감할 수 있었다.
“도윤아, 그 돈… 버리자.”
“아냐. 그냥 꿈이야. 진짜 별거 아냐.”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은 두려움에 가득 차 있었다.
며칠이 지나자, 도윤의 방 안은 마치 수증기가 가득 찬 욕실처럼 눅눅해졌고, 벽지 끝자락엔 희미한 물 자국이 번졌다. 창문엔, 마치 물에 젖은 손바닥 자국이 찍혀 있었다. 매일 아침 새로 생긴 그것은, 절대 마르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 도윤은 수업 중에 갑자기 코피를 쏟고, 고꾸라지듯 쓰러졌다. 그는 아무것도 보지 않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고,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뇌까렸다.
“돌려줘야 해… 돌려줘야 해…”
결국 외할머니가 모든 걸 알게 되었고, 무당에게 가야 한다는 말을 꺼냈다.
“그건 이승의 것이 아니여. 넋의 노자를 건드리면… 넋이 길을 잃어. 그리고 누군가를 데려가지 않으면 떠날 수 없어.”
외딴 신당으로 향한 우리 셋. 향내가 짙게 배인 초가 안, 무당은 도윤을 말없이 바라보다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 아이… 이미 끌려가고 있어. 늦기 전에 돌려줘야 해. 이번엔 진심을 담아야 한다. 넋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마음을 본다.”
며칠 후, 보름달이 떠오른 밤. 우리는 강가에 다시 섰다. 강물은 마치 모든 생명을 삼킨 듯 고요했고, 그 위로 떨어지는 달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바람조차 멈춘 듯, 시간은 멎어 있었다.
도윤의 손에는 흰 천으로 곱게 감싼 지폐가 들려 있었다. 그의 손끝은 하얗게 질린 채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무릎을 꿇은 그는 마치 심판대에 선 사람처럼 깊이 고개를 숙였다. 숨소리는 거칠고 짧았다. 그에게 이 순간은 단순히 물건을 되돌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죄의 고백이었고, 목숨을 건 회개였다.
무당이 북을 두드리기 시작하자, 공기 중에 진동이 일었다. 둥… 둥… 북소리마다 도윤의 어깨가 움찔했고, 입술은 바싹 말라 있었다. 그는 한 번, 두 번 입술을 축였지만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눈가엔 눈물이 맺혔고, 이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때였다. 강물 위로 물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차가운 한숨들이 하나 둘 모여드는 듯, 안개는 빠르게 퍼지더니 사람의 형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희미하고 흐릿했지만, 도윤의 눈엔 그것이 분명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뼛속까지 시려오는 감각. 그는 자신이 용서받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도윤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몰랐어요… 돌려드릴게요… 미안해요…”
그의 말엔 두려움만이 아니라, 진심이 담겨 있었다. 억울하게 떠난 이의 분노, 그 고요한 절규를 이제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가슴 한복판에서 끓어오르는 뉘우침이, 말보다 먼저 눈물로 흘러나왔다.
그 순간, 강물 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온 한 손이 흰 천을 감싼 지폐를 낚아채듯 가져갔다. 손가락 끝이 도윤의 손등에 닿는 순간, 그는 본능적으로 숨을 삼켰다. 그 차가운 온기가, 짧지만 분명하게 전해졌다. 마치 “알겠다”는 무언의 대답처럼.
그리고 안개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강물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고, 공기엔 은은한 향이 맴돌았다. 무당은 천천히 북을 멈췄고, 도윤은 주저앉듯 몸을 숙였다.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말없이 흐느꼈다.
강물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평소처럼.
하지만 우리에겐 분명히 무언가가 지나갔다. 그건 바람도, 파도도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세계의 무게였고, 그 무게는 도윤의 어깨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날 이후, 도윤은 조금씩 평온을 되찾았다. 퀭하던 눈 밑도, 한밤중의 비명도 사라졌다. 더 이상 이마에 맺히는 식은땀이 없었고, 방 안의 눅눅한 기운도 어느샌가 사라졌다. 마치 어떤 방문자가, 드디어 떠난 듯.
하지만 우리는 강가에 다시 가지 않았다. 그곳은 더 이상 여름날의 피서지가 아니었다. 거긴, 경계의 끝이었다.
그 여름, 우리는 경계를 넘어버렸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선,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진실 너머로. 그리고 그 너머에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무언가를… 우리는 보고 말았던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