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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 화가 아저씨의 발걸음

그림책 '세상에서 가장 바쁜 화가 아저씨'(야누슈 스탄리)

by 초연이

해 질 녘, 문득 올려다본 하늘에 가느다란 선이 움직이는 게 보였습니다. 그 선은 처음엔 짧았지만, 어떤 방향으로 길게 그려지며 움직이고 있었어요. 신기해서 한참을 보고 있으니, 너무 작아 잘 보이진 않았지만 경비행기가 움직이며 뿜어내는 흔적 같아 보였습니다. 그렇게 남겨진 선 자국을 카메라에 담고, 보정을 조금 했는데, 보정 효과였는지 선 외에도 다양한 흔적들이 나타났습니다.


처음엔 한눈에 보이지 않았던 하늘에 난 무수한 흔적들은 서로 묘하게 어우러져 무언가를 말하는 듯했습니다. 어찌 보면 멋들어진 한 폭의 수채화 같고, 어찌 보면 저희 아이가 슥슥 그려놓은 낙서 같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하늘이란 끝을 알 수 없는 크기의 도화지가 주는 무궁무진한 공간을 보며 그림책 한 권이 떠올랐습니다.






야누슈 스탄니의 '세상에서 가장 바쁜 화가 아저씨'입니다. 표지에는 심플하고도 덩그러니 화가 아저씨로 추정되는 남자의 웃는 얼굴이 그러져 있어, '바쁘다'는 느낌이 잘 안 듭니다. 겉보기론 이렇지만, 실상은 바쁜가 보다, 하는 저 또한 심플한 추측을 하며 책장을 펼쳤습니다.



표지에서 예상한 것과 다르게 첫 장에 나온 첫 문장부터 횡설수설, 뭔가 '바쁘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생각지 못한 아저씨의 바쁜 일상이 그려집니다. 아니, 아저씨가 바쁘게 자신의 일상을 그려냅니다. 누군가를 위해 멋진 예술행위를 선사하기 위해 그리는 그림이라기보다는 자기 본연의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직접 그린 집에서 살고, 직접 그린 음식을 먹고, 직접 그린 옷을 입고 사는, 정말이지 제대로 자급자족을 하는 화가 아저씨였어요.




의식주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한 순간, 비가 내리고 그 비는 마시던 포도주로 떨어집니다. 자꾸만 새는 비 때문에 결국 아저씨는 우산을 그려 비를 막아내요. 모든 것이 직접 슥슥 그리는 '그림' 하나로 해결되는 모습들에 왠지 모를 통쾌함도 들고, 복잡할 것 없이 살아가는 삶이 부럽기도 했어요. 마냥 쉬워 보이지만 또 나름의 고충은 가득할 아저씨의 마음도 헤아려보게 되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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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저씨는 밖으로 나가 아이들을 위한 꿈나라를 그립니다. 아이들을 생각하며 꿈이라는 무궁무진한 세계를 그렸을 그 마음이 참으로 소중하고 곱게 느껴집니다. 더 놀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접고 부모님의 재촉에 억지로 눈을 감았을 아이들, 놀다 지쳐 저도 모르게 스르르 잠들었을 아이들의 꿈속이 외롭지 않았겠다 싶어요.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엄마가 관여하지 못하는 꿈나라를 직접 꾸며준 아저씨의 정성이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바쁘게 하루를 보낸 아저씨는 어디론가 또 홀가분하게 걸어 나갑니다. 책 바깥으로 나올 것만 같아 손을 뻗어봅니다. 우리 아이들의 꿈을 꾸며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라도 꾸벅하고 싶었어요. 이제 아저씨만 아는 세상 속으로 건너가 하루를 또 바쁘게 살아내고 있겠죠.






하늘과 세상을 도화지 삼아 그려내는 그 자유로움에 가슴이 뻥 뚫렸습니다. 세상 복잡할 것 있나, 그냥 손 가는 대로 하는 거지, 싶은 거침없는 토닥임에 위로도 되는 것 같았어요. 어느 날 마주한 그림책 속 화가 아저씨의 세상이나, 여러 가지 모양의 구름 흔적들로 가득한 하늘이나, 그냥 덧없어 보였습니다. 무상(無常).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조금은 허무하다가도, 또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상처도 후회도 미련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글을 시작하고 며칠 동안 생각하고 다듬었는데, 제 마음속에서 느낀 감정의 본질은 이거였나 봅니다. 평범한 일상을 보내면서 제 머릿속에는 화가 아저씨와 하늘이 계속 맴돌았습니다. 자꾸만 전전긍긍, 속 좁게 목메는 저의 쪼잔함을 다시금 탓하며 조금은 허무하게, 덧없게 흘려보내야겠다는 다짐을 해 봅니다. 이 책에서의 하루를 끝내고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듯하던 화가 아저씨의 발걸음이 제 마음속으로 향했으면 좋겠습니다. 슥슥, 단순하고 심플하게 다녀가줬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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