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봄 여름 가을 겨울'(꼼은영)
가을이 왔습니다. 그리고 곧 떠나가려 합니다. 일 년 중 정말이지 잠깐 있다 가는 계절, 가을. 가을의 감성과 운치는 매우 깊지만 그 모든 것들을 누리기엔 시간이 생각보다 짧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붙잡고 싶어 최대한 사진 속에 가을을 담고 또 담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진을 서툰 실력으로 보정을 하면서 좀 더 제가 느끼고 싶은 대로 가을의 운치를 살려 보았습니다.
멀리서 보면 수많은 색으로 채색된 풍경들이 한 폭의 그림 같지만, 자세히 보면 낡고 바스러진, 올해의 일생을 다해가는 나뭇잎들의 향연으로 이루어낸 결과물들입니다. 그러나 그저 파릇파릇했던 초록잎보다 그 결과물의 깊이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한 해 동안 바지런히 살았노라고, 마지막까지 남은 힘을 다해 메시지를 던져주는 듯, 고요함 속에 많은 이야기가 들리는 듯합니다.
짧고 굵게 누리는 가을 속에서 살다 보니, 한 그림책이 또 저에게 동실 떠올랐습니다. 이미 아이랑 여러 번 읽고, 저 혼자서도 재밌어서 가만가만 들여다보았던 책입니다. 사계절을 다루고 있지만, 지금의 정서를 이 책 속에서는 어떻게 소리 내고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꼼은영의 '봄 여름 가을 겨울'입니다. 표지부터가 그냥 넘어가지 못하게 눈길을 꽉 잡습니다. 글자 한 땀 한 땀이 그저 그어진 획이 아닌, '그림'입니다. 각각의 계절답게, 그림으로 이루어진 글자가 춤을 춥니다. 춤추는 각 계절 글자들을 톡톡 따서, 해당하는 계절에, 제가 제일 자주 시선이 가는 어떤 곳에 크게 붙여 놓고 싶습니다. 그 계절 내내 무슨 일이 있어도, 왠지 신나는 위로와 가벼운 격려를 받으며 잘 살아낼 것 같거든요.
그렇게 표지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어렵게 표지를 넘겼는데, 본격적인 그림책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또 누군가 속삭이고 있습니다.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안녕.' 조용하게 수다스러운 새싹들이, 글씨인지 그림인지 헷갈리는 형태로 너울대고 있어요. 쪼끄만 새싹이 처음부터 너울대는 모습을 보니, 누구한테라도 괜히 툭 짓궂은 장난을 걸고 싶어 집니다. 만약 초조하고 긴장된 마음으로 이 책을 펼쳤다면, 단숨에 그 마음을 끊어버려 줄 만한 가벼움이 참으로 마음에 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봄과 여름의 장면들에서는 '시작'에 대한 설렘과 긴장감, 바다 같은 수박의 소리가 끊임없이 들립니다. 너무 수다스러운 친구가 옆에 있어 이제 좀 조용히 해줬으면 싶으면서도, 그 친구의 이야기가 재밌기도 하고 끝없이 말을 하고 있는 친구의 입모양이 웃기기도 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귀 기울이게 되는 마음입니다. '그림책'이라는 무생물에게, 갑자기 내적 친밀감이 확 생기면서 이 책이 '생물'이었으면 싶어 집니다. 이런 '생물'이 내 곁에 존재한다면, 외롭고 지루할 틈이 없겠다 싶었거든요.
그리고 드디어 '가을'이 왔습니다. 이제는 조용하겠지, 싶었던 가을 역시 끊임없이 말을 해댑니다. 구름 하나 그냥 지나칠 줄 모르고 '뭉게뭉게'거리며 지나갑니다. 실제로 가을 속에 존재하면서, 그림책 속 가을에 존재해 보니 익숙하고도 신비롭습니다. 시끄럽고 재미있는 말소리 잔치를 보니, 가을의 소리를 더 찾아보고 싶어 집니다. 열심히 각자의 대열을 유지하며 부지런히 날아가는 철새 소리, 그냥 조용히 걷는 꼴을 못 보는 바스락 낙엽소리, 휑한 나무들 사이로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은 동네 강아지 소리, 심심할 틈을 주지 않을 만큼 종종 툭하고 떨어지는 밤송이 소리... 생각보다 가을은 흥겨운 계절이었어요.
'쌀'과 '밥'으로 뒤덮인 고개 숙은 벼. 유난히 알알이 익은 열매가 무거워 보여, 수확이 임박해 보입니다. 농부들을 재촉하는 듯한 소리 없는 아우성이 독자에게도 들리는 듯해, 괜히 조바심도 납니다. 부지런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벼를 보며, 조금이라도 늦게 수확했다간 화를 낼 것 같기도 해요.
조금 있으면 곧 겨울이 오겠죠. 겨울이 온다는 것의 기준이 꼭 눈이 내려야만 한다거나 12월이 돼야 하는 건 아니기에, 사실상 체감 날씨는 이미 겨울이 온 것 같습니다. 위 장면을 펼쳐놓고, '이제 나 겨울 좀 즐길게!'라고 해도 아무도 뭐라 할 것 같지 않습니다. 시각적 그림과 청각적 소리가 합쳐 눈이 오는 겨울밤을 만들어 냅니다. 유난히 밤이 긴 겨울에, 흰 눈인 척 반짝이는 조명도 소리를 내는 것을 보니, 무엇하나 허튼 것이 없습니다.
하루하루 세월을 거듭할수록 일 년의 속도가 빠르게 느껴집니다. 돌아보면 아쉽고, 내다보면 궁금합니다. 현재'라도' 집중을 잘하며 살면 될 텐데, 자꾸 과거도 갔다가 미래도 갔다 오느라 정신이 없어 세월이 빠르게 느껴지나 봅니다. 본질을 꿰뚫고 본연을 살아내는 것. 가을을 만나고, 보내면서 느낍니다. 다른 사람이나 다른 일이, 짧고 굵든, 길고 가늘든, 나 자신을 알고 내가 하는 일이나 잘하자, 싶습니다.
조용한 줄만 알았던 가을 속에서 나는 소리를 찾으며, 하루하루 그저 열심히 산다는 것의 '기본'이 뭔지 생각해 봤어요. 그림책 속에서 나던 소리를 눈으로 찾으며 낄낄대던 그 순간이 전부인 것 같습니다. 글을 쓰고, 비워내고, 또 살아냄으로써 채워지고, 이를 반복하면서 '낄낄대던 순간'으로 가득 채워보고 싶습니다. 가을을 난다는 것, 참 재미있는 일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