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사랑하는 식물이라도
식물이 화분에 심기는 순간부터는 식물들은 이제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 크나큰 자연에서 떨어져 작은 화분에 담긴 식물들에겐 주기적으로 비를 맞을 수도, 햇빛을 스스로를 맞을 수도 없다. 심지어 사계절 여름이었던 곳에서 우리나라로 수입된 식물들의 경우에는 더 그렇다. 내내 습하고 따뜻한 환경에서 살다가, 우리나라의 건조하고 추운 가을과 겨울은 그들에게는 너무나 혹독한 환경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식물 전문가들도, 오랫동안 식물을 키워온 일반인들도 키우기 쉬운 식물이건 까다로운 식물이건 순간 때를 놓치는 순간에 잘 키우던 식물을 죽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 식물을 전문적으로 키우는 농장에도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시들어가는 식물들과 그 자리를 대신한 화분들이 농장 한편에 쌓여있기도 하다.
어쩌다 혹은 고심 끝에 새로운 식물이 나의 곁에 들어오면, 그 순간 이 식물은 나와함 게 몇십 년이고 같이 살아줄 것 만 같다. 그래서 요즘에는 '반려식물'이라고 했던가. 내가 힘들 때고 슬플 때고 함께해주길 바란다. 하지만 가끔 바쁘고 정신없게 살아가다 보면, 전문적으로 식물을 키우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물 주기를 놓칠 때도, 비를 맞히는 게 식물에게 좋다 하여 밖에 두었다 잊어버려 며칠을 두고 잊어버릴 때도 있다.
한순간 갑자기 너무 많은 물을 먹은 식물도, 실내에만 살다가 며칠 동안 거친 실외를 겪은 식물들 중 몇몇은 그 갑작스러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어버린다. 이렇게 식물을 보낸 사람들 중, 식물이 죽은 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이를 과도하게 자신의 탓으로 돌려 죄책감까지 갖는 경우를 봤다.
나와 같이 지내던 식물이 한순간 시들 어죽 저버리는 걸 보는 것은 당연히 슬프고 안타깝다. 죽어가는 식물을 다시 살릴 수 있는 방법들은 있지만, 이미 죽은 식물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식물을 잘 죽인다고, 또 죽일까 봐 겁이난 다하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식물을 들일 것을 권한다.
하지만 나는 식물을 잘 죽인다고, 그게 슬프고 미안해서 겁이 난다 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시 식물을 키우는걸 성급하게 권하지 않는다.
결국 식물을 키우는 것도 사람을 위한 행위이기 때문에, 식물을 키우는 것이 나에게 고통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식물에게도 나에게도 너무 불쌍한 일이기 때문이다. 찰나의 나의 판단 오류나 실수로 잘 지내던 식물이 한순간 잘못될 수 있다. 당연히 식물에게는 미안한 행동이다. 하지만 이 감정이 오래 지속된다면 결국 한때 나의 반려 식물은 한순간 스트레스 요인으로 바뀌게 된다.
식물이 나보다 우선이 되는 순간 식물은 기쁨을 주는 반려식물에서 스트레스를 주는 반려식물로 바뀌게 된다.
이처럼 어떠한 일에서도 내가 행복하려 선택한 일을 유지하는데 행복보다 괴로움이 더 커진다면, 그건 행복해지려고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없다. 식물을 키우는 데에 있어서도, 혹은 내가 선택한 어떤 다른 무언가에서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식물을 키우기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식물보다, 혹은 그 무엇보다도 내가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