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그 자리에 있어서 몰랐어
초여름 어느 날 작업을 시작하려 옥상에 들어섰는데, 옥상 구석에 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봄부터 하루에 적게는 한번 많게는 서너 번을 매일 들락날락했는데 몇 달 만에 처음 그 존재를 알게 되었다.
항상 그 자리에서, 같은 모습으로 조용히 자리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나무. 심지어 유일하게 한 낮 잠시 그늘까지 만들어주던 나무였다.
지금 그 존재를 알아차린 게 너무 미안해서 가까이 가서 보니 꽃나무였는지 한창 꽃을 피우려고 준비 중이었다.
그렇게 옥상을 수십 번 왔다 갔다 하며 다른 식물들에게 물을 주고 영양제 챙겨줄 때, 그 나무에게는 물 한번 준 적도, 쳐다봐 준 적도 없었는데도 혼자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아 수많은 꽃망울 달아 놓고는 이제 그 꽃망울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무도 봐주지 않더라도.
또 마침 초여름 하늘과 햇살, 공기는 어찌나 맑고 청량한 지 한참이나 그 나무 아래서 서있었다.
그렇게 꽃망울을 단지 몇 주가 지나자 나무는 하나둘씩 어여쁜 분홍색 꽃을 피우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초록잎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분홍꽃을 가득 채운 말 그대로 꽃이 만개한 꽃나무가 되어있었다.
처음에는 존재도 몰랐던 앙상한 나무 한그루가 이제는 옥상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보이는 가장 아름다운 나무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나무의 이름은 배롱나무였다.
배롱나무가 꽃피우기 전까지, 아니 내가 우연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면 나는 배롱나무의 존재를 계속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배롱나무는 여의치 않고 자연의 이치에 따라 비를 기다리고, 꽃망울을 맺고, 때가 되면 아름다운 분홍의 꽃을 만개한다. 혹여 봄에 심한 가뭄이 들면 그 해 여름은 꽃망울이 기대보다 조금 달렸을 수도 있다. 혹여 그 해 여름 예상치도 못한 이례적인 태풍이 불면 열심히 피워온 꽃들을 보여주지도 못한 채 거친 비와 바람에 다 날려 자신의 아름다운 꽃잎들이 처참하게 바닥에 떨어져 비에 젖은 모습을 지켜봐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배롱나무는 다시 내년을 위한 꽃봉오리를 준비할 것이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꽃들을 보여주어 행복한 하루를 만들어 주겠지.
가끔 내가 너무 초라하고 보잘것없고 이 세상에서 아무 존재도 아닌 것 같을 때, 나는 배롱나무를 생각한다.
지금 나는 겨울을 버티고 있는 중이야, 봄이 오면 꽃망울을 가득 달 거고 때가 되면 누구보다 가장 이쁜 꽃을 피울 거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