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부사 유몽인의 지리산 유람④ - 마적동을 거쳐 두류암에 들어서다
[용유담과 각석(刻石). 사진 오른쪽의 바위에는 ‘인묘은사혜평강공현지지(仁廟恩賜惠平姜公顯之地)’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인종이 혜평 강현에게 하사한 땅’이라는 뜻으로 후손들이 그 내용을 새긴 것이다. ‘점필재, 일두, 탁영, 남명 장구소(杖屨所)’ 바위 글씨도 인근에 있다. 정면에 보이는 다리는 용유담을 가로지르는 ‘용유교’이다.]
1611년 4월 2일(음력) 유몽인 일행은 저물녘에 군자사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고 하룻밤을 보낸다. ‘들판에 있는 사찰이라 마루에 흙먼지가 가득하였다’라며 절집의 첫인상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유몽인은 ‘절 앞에 영정(靈井)이 있어 영정사로 불렀다. 지금은 이름을 바꿔 군자사로 부르는데, 무슨 뜻을 취한 것인지 모르겠다’라며 절집 내력 설명도 왠지 마뜩치 않은 모습이다. 그러더니 신선처럼 선계(仙界)에 올랐다가 다시 속세로 떨어져 정신이 답답해졌고, 급기야 밤에는 가위눌림 당하는 악몽까지 꾸었다며 산에서 내려온 후 불편해하는 속내를 전하고 있다.
[경남 함양군 마천면 군자마을. 군자사 옛절터에 마을이 들어섰다고 전해진다. 절집은 사라졌고, 마을이름으로 그 흔적이 남아있다]
그런데 1643년 8월 22일(음력) 안의현감 박장원이 지리산 유람에 나서 이곳에 들렀을 때는 ‘이 절의 본래 이름은 영정사였는데, 신라 진평왕이 이곳에서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한다’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군자사 관련 기사를 조금 더 상세하게 인용하고 있다. 그리고 ‘절의 법당과 건물들이 모두 웅장하고 화려하였고, 절의 서쪽 구석에는 화려하게 단청을 칠한 새로 지은 건물인 삼영당이 있는데, 청허‧사명‧청매 세 대사의 초상화가 있었다’라며 흔치 않은 이 절집의 내력을 보여주고 있다. 1610년 도솔암을 짓고 주석하던 청매인오의 영정이 군자사에 있었다는 사실로 보아 청매인오의 법맥이 함양 마천권역의 사암(寺庵)을 중심으로 이어졌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의 함양군 마천면 군자마을 일원에 있었던 군자사는 조선시대 지리산 유람의 전진기지라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찾았던 곳인데, 1800년대 초반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날 아침 군자사를 출발한 유몽인 일행은 칠선계곡 입구 의탄촌을 지나 원정동을 거쳐 용유담에 이르렀다. 현재 지리산 북쪽 산자락을 잇고 있는 ‘천왕봉로’의 동선을 따르는 길로 지명도 그대로 남아있다.
[용유담 천변에 있는 포트홀(돌개구멍). 항아리, 술잔 모양 등으로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유람록에 자주 묘사되는 풍경이다]
용유담에 도착한 유몽인은 ‘이루 다 형용할 수 없다’라는 표현으로 이곳의 아름다운 풍경에 매료된 모습을 보이는데, 장난삼아 시를 적어 못(용유담)에 던졌다가 천둥번개가 치고 새알 같은 우박까지 내리는 신이한 체험을 하게 된다. 한바탕 소동을 겪은 후 용유담을 출발한 유몽인 일행은 지금의 송전마을 뒤로 추정되는 어딘가로 오른 듯하다. 이곳에서는 길을 잃어 경사가 심한 산자락을 헤치고 올라 동쪽에 있는 마적암 옛 절터를 확인하고, 산꼭대기까지 기어오른 후 힘든 걸음 끝에 두류암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함양군 마적도사 전설 길 독가촌 인근에 있는 '도사우물']
마적암 절터는 함양군이 조성해 놓은 ‘마적도사 전설길’ 상에 있는 대종교 건물 있는 곳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그 위에 있는 독가촌 인근에 절터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새롭게 제기되고 있다. 그곳에는 오래된 샘이 있고, 최근 와편과 건물의 주춧돌로 사용되었을 바위들이 다수 발견되었다고 한다. 두류암은 어름터골(허공다리골)에 있었던 암자로 1580년 변사정, 1867년 김영조의 지리산 유람록에서도 발견된다. 변사정의 동선은 확실치 않으나, 김영조의 경우 세동마을에서 송대마을에 이른 뒤, 큰 고개를 넘어 두류암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바로 마을 뒤에 있는 벽송사능선 상의 고개를 넘었을 것이다. 세동-송대마을을 잇는 옛길은 현재 차량통행도 가능한 임도로 확장되어있고 ‘마적도사 전설길’로 조성되어 있다. 능선의 길은 솔봉-함양독바위로 이어지는데, 솔봉 가기 전 안부에서 오른쪽으로 내려서면 송대마을로 갈 수 있다. 유몽인 일행이 두류암으로 가기 위해 이동한 길을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송대마을에서 벽송사능선을 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룻밤을 머문 두류암에서는 ‘암자 북쪽에 대(臺)가 있어 그곳에 올라 정남쪽을 바라보니, 바위사이로 폭포수가 쏟아지고 있는데 마치 옥으로 만든 발을 수십 길 매달아놓은 것 같았다.’라며 그곳의 풍경을 설명하고 있다.
[송대마을 뒤에 있는 마당바위. 평평하고 거대한 바위에은 광암대 각자와 장기판이 새겨져 있다.]
[허공다리골 등산로 상에 있는 이름없는 승탑]
변사정 역시 ‘층층의 벼랑이 깎아지른 듯 솟아있고, 만 길의 절벽이 우뚝 서있었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두류암은 북쪽에 절벽을 이루는 거대한 바위가 있고, 남쪽으로 폭포를 이루는 계곡 인근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날 유몽인은 이곳에서 주석하고 있던 혜일(慧日)이라는 승려를 만나 시를 지어주었다고 하는데, 법명이 혜일이고 법호가 호감(灝鑑)인 이 선승은 청매인오의 법을 이은 제자로 ‘불조원류’에서 확인된다.
[2021.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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