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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섭 Aug 25. 2021

천왕봉에서 임진왜란을 추억하다

남원부사 유몽인의 지리산 유람⑤ - 천왕봉~의신마을~쌍계사

   

[쑥밭재 인근의 청이당터. 유몽인은 현재의 '허공달골'을 거쳐 쑥밭재-하동-중봉-천왕봉으로 이어지는 유람길을 걸었다.]

 

두류암에서 하룻밤을 묵은 유몽인 일행은 4월 4일 아침 일찍 출발하여 옹암(甕巖)으로 오른 뒤, 청이당-영랑대-소년대를 거쳐 천왕봉으로 향했다. 오늘 날의 지명으로 독바위-쑥밭재-하봉-중봉-천왕봉으로 이어지는 ‘동부능선코스’로 이동한 것이다. 거대한 바위 형상이 멀리서 보면 단지(독)처럼 보인다고 해서 독바위라고 불리는 옹암은 독녀암(獨女巖)에서 이름이 유래한 함양독바위와는 이렇듯 그 의미가 다르다. 유몽인은 예전 본고에서 소개했던 ‘점필재길’의 ‘구롱-청이당’ 코스를 따르지 않고, 이렇듯 능선으로 올라 청이당에 도착했음을 알 수 있다.      


천왕봉에 도착한 유몽인은 동행했던 승려가 가리키며 알려주는 대로 사방을 조망하며 일일이 봉우리와 지역 이름을 열거하는데, 남쪽을 바라보면서는 ‘사천 와룡산을 바라보니 동장군이 패한 것이 생각나고, 남해 노량을 바라보니 이순신이 순국한 것에 슬퍼졌다.’라며 역사인물을 회고한다.      

여기서 동장군이 패한 것은 정유재란 때에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장수 동일원이 1598년 10월 사천왜성전투에서 참패한 사실을 말한다. 그리고 임진왜란 강화협상기이던 1594년 초 유몽인이 삼도순안어사로 파견되어 이순신 장군과 만났을 때는 인사(人事)문제, 병력충원문제 등으로 서로 큰 갈등을 빚기도 하는데, 장군은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유몽인에 대하여 ‘나라를 그르치는 교활하고 간사한 말이 진회가 무목을 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며 분개하는 글을 『난중일기』에 남기고 있다. 아무튼 문안사‧진위사로 대명외교의 일선에서, 또 삼도순안어사‧순무어사 등을 지내며 임진왜란 7년 전쟁을 온몸으로 겪었던 유몽인이 두 장수에게서 느꼈을 감회는 남달랐을 것이다.      


대부분의 유람객들이 천왕봉 아래 성모사에서 밤을 지내고 다음날 일출을 보고 하산했던 것과는 달리, 유몽인 일행은 해가 질 무렵에 장터목 인근에 있었던 향적암으로 내려와 하룻밤을 머물고는 다음날 주능선을 걸어 영신암으로 향하였다. 영신암은 영신봉 아래 서쪽 산자락에 있었던 암자이고 지금도 절터와 기도터가 남아있다. 유몽인 일행은 영신암에서 하산하여 하동군 화개면 의신마을에 있었던 의신사로 내려서는데, 길의 묘사를 보아 큰세개골을 경유하여 대성골로 내려서서 이동하였던 듯하다.      


“영신암에서 40리쯤 내려갔다. 산세가 검각보다 더 험하였는데, 108번 굽이친 형세가 아니라 수직으로 떨어지는 비탈길이었다. 이 길을 따라 내려가는 것은 마치 푸른 하늘에서 황천으로 떨어지는 것 같다.”      


힘든 산행 끝에 의신사로 들어선 유몽인 일행은 주지 옥정과 태승암 승려 각성을 만났다. 법호가 벽암인 각성은 유몽인이 유람 사흘째에 영원암에서 만났던 부휴선수의 제자로 조선후기 불교를 중흥하는데 큰 역할을 한 고승이다. 각성은 이때 세수 37세로 수국암 등에서 수행에 매진하고 있을 때로 짐작되는데, 태승암에서도 머물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확실한 장소는 알 수 없으나 이 암자들은 모두 대성골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각성과 수창하며 지은 시를 문집에 남기고 있는 유몽인은, ‘그의 시가 율격이 있어 읊조릴만 하였고, 필법은 왕희지체를 본받아 매우 맑고 가늘며 법도가 많았다’라며 시문과 필법에 뛰어난 벽암각성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쌍계(雙磎) 석문(石門. 쌍계사 입구에 있는 쌍계석문 각자. 고운 최치원이 썼다고 전해진다. ]


의신암에서 신흥사를 거쳐 쌍계사로 들어서서 하룻밤을 머문 유몽인 일행은 다음날 불일암에 들러 불일폭포를 감상하고 와서 귀로에 오른다. 이곳의 이야기들은 본고를 통해 이미 몇 차례 소개한바 있다. 그런데 유몽인은 쌍계사 동구(洞口)로 들어서며 만난 ‘쌍계(雙磎) 석문(石門)’ 바위글씨를 보며 122년 전에 이곳에 들렀던 탁영 김일손을 소환한다. ‘가늘면서도 굳세어 세상의 굵고 부드러운 서체와는 다르니, 참으로 기이한 필체다’라는 평을 남기면서 ‘어린아이가 글자를 익히는 수준’이라고 한 김일손에 대해 ‘글은 잘 짓지만 글씨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은 듯하다’라며 일격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유람 당시 김일손은 26세의 열혈청년, 유몽인은 도승지까지 지낸 53세의 원숙한 관료이자 문장가였다. 옛사람의 유람록을 읽을 때, 제대로 살펴보아야할 포인트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지리산 유람 막바지, 쌍계사를 출발하여 화개동천을 거쳐 임지인 남원으로 향하던 유몽인은 화개에 은거하며 학문에 정진하였던 정여창과 동문인 김일손이 지리산을 유람할 때 남긴 일화를 소개하며 뜻밖의 글을 남기고 있다. 산을 오르며 힘이 빠진 정여창을 새끼에 묶어 승려가 끌고 갈 때, ‘스님은 어디서 죄인을 묶어 오는 것이오?’라고 물었다는 것과, 좋은 나무들이 재목으로 쓰이지 못하고 산에서 말라죽는 일이 ‘조물주 입장에서는 애석할만한 일이나, 이 나무들은 천수를 다 누렸구나.’라고 하였다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유몽인은 ‘어찌 말의 예언에 징험이 있는 것이 아니랴’라며 옥에 갇혀 죽고 요절한 두 사람을 회고함과 동시에, 김종직이 지리산을 유람할 때 비‧바람‧구름‧안개를 만나 낭패를 당한 것도 무오사화의 불길한 징조가 먼저 글에 드러난 것이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글을 남긴 유몽인은 좋은 날씨에 한껏 고양된 마음으로 지리산을 다녀갔지만, 그로부터 12년 후인 1623년, 이들보다 더한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외아들과 함께 생을 마감하게 된다. 광해군 대인 1618년 이이첨 등이 주도한 폐모론이 불거졌을 때, 당색이 북인이면서도 이에 반대할 정도로 나름대로 정도를 걸었지만, 결국 그는 인조반정 후 서인정권에 의해 역모의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한 것이다.         


유몽인 일행은 화개동을 거쳐 섬진강을 따라 와룡정이라는 곳에서 휴식을 취한 후, 남창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그리고 다음날 숙성령을 넘어 남원부 관아로 돌아오며 9박10일간의 지리산 유람 여정을 마친다. 와룡정은 시(詩)에 백사장, 어부 등의 묘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현재 지리산둘레길이 지나가는 섬진강변 구례군 용두마을의 용호정으로 짐작되며, 남창은 고지도로 보아 남원부 관내에 있었던 소의방(현재 구례군 광의면) 어딘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별이 잠드는 고개’라는 낭만적인 이름을 지닌 숙성령은 임진왜란을 비롯한 처절한 우리 역사와 수많은 사람들의 걸음을 목도하였을 역사의 현장이다. 구례군 산동면 원달리에 이 고개로 오르는 옛길 들머리가 있다.[2021.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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