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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섭 Aug 31. 2022

지리산에서의 35년, '서산대사'  

청허휴정(서산대사),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오다 

▲내은적암 안내판. 하동 화개면 화개초등학교 왕성분교장 앞에 있다.

  

▲화개초등학교 왕성분교장. 옛 신흥사가 있었던 곳이다.


▲내은적암터 가는 길 입구에 있는 푸조나무. 신라하대 고운 최치원이 꽂아둔 지팡이에 움이 터서 자랐다는 전설이 서려있다.


▲내은적암터 가는 길. 차밭 옆으로 목재데크로 길이 나있고, 차밭 위에는 정자가 있다. 절터는 이 정자 뒤로 올라서야 나온다.


임진왜란 때의 의승장으로 잘 알려져 있는 서산대사(1520~1604)는 억불의 시기에 쇠락해가던 조선불교를 중흥시킨 고승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대사의 저서인 『선가귀감』은 지금도 승려교육 교재로 사용되고 있을 정도로 그가 끼친 영향이 실로 컸음을 알 수 있다. 법호가 청허이고 법명은 휴정이지만 서산대사라는 별호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대사가 50세 이후부터 85세에 입적할 때까지 묘향산에 주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산대사의 청장년기의 생애는 지리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본 지면을 통해서 소개한 바 있는 하동 원통암에서의 출가(15세, 1534년), 쌍계사 중창 기문(30세, 1549년) 및 신흥사 능파각 기문(45세, 1564년) 저술, 그리고 산청 단속사에서의 ‘삼가귀감’ 목판훼손사건(49세, 1568년) 등이 그러하다. 서산대사는 1568년 단속사 사건 이후 지리산을 떠나 묘향산으로 주석처를 옮긴 것으로 확인되는데, 1570년 ‘묘향산 원효암기’를 시작으로 이후 대부분의 저술이 묘향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서산대사는 때로는 전국의 절집을 찾아 운수행각을 했던 때도 있었지만, 50대에 이르기 직전인 청장년 시절을 대부분 지리산 자락에 머물며 수행에 매진하였고, 승려들의 교육에 필요한 『선가귀감』 등을 저술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시기별 혹은 장소별로 지리산에 서려있는 대사의 흔적을 살펴보는 일은 매우 흥미롭다. 15세에 지리산 원통암에서 경전공부를 시작한 이래, 50세 즈음 지리산을 떠날 때까지 서산대사의 지리산 행적은 두 시기로 구분된다. 즉 10대 후반에서 30대에 이르는 청년기(15년여 년)와, 30대 초에 승과에 합격하여 봉은사 주지와 선교양종판사 등을 지내며 7년 남짓 봉은사 등에 머문 후,  1558년(39세)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와 수행과 저술에 몰두하던 장년기(10여 년)이다.

       

이러한 내용은 서산대사의 자서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완산노부윤에게 올린 글’이나 ‘자락가’에서 잘 드러난다. 청년기의 청허휴정은 1545년(26세)에 ‘지리산 황령암기’, 1549년(30세)에는 ‘지리산 쌍계사 중창 기문’ 등을 저술하며 그의 탁월한 필력을 발휘하였다. 특히 ‘산은 혼돈의 뼈요, 바다는 혼돈의 피다. 동해 속에 하나의 산이 있으니 이름을 지리산이라고 한다. 그 산의 북쪽 기슭에 하나의 봉우리가 있으니 이름을 반야봉이라고 한다. 그 봉우리의 좌우에 두 개의 영(嶺)이 있으니 이름을 황령과 정령이라고 한다.’라고 시작되는 ‘지리산 황령암기’는 웅혼한 필치와 더불어 무술법난(1538년)으로 폐사되었던 황령암이 중창되는 과정을 전하고 있다. 지금은 폐사되고 없지만 조선후기 오랫동안 수행도량으로 이름 높았던 이 절집의 역사를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서산대사는 1557년 겨울 선교양종판사직을 사임하고 금강산을 둘러보고 난 후, 이듬해인 1558년 가을에 지리산을 향해 출발했다고 한다. 이때 지리산으로 와서 머문 곳이 내은적암이라는 곳이다. ‘두류산 내은적암을 새로 짓기 위해 모연한 글’ 중, ‘빈도가 이번 경신년(1560) 여름에 장구(지팡이와 신발)로 와서 우거하였는데’라는 내용에서 당시의 행적이 이어진다. 이때 서산대사는 내은적암에서 3년, 황령암, 능인암, 칠불암 등 지리산의 암자에서 또 3년을 수행한 후, 태백산과 금강산 등 북쪽의 여러 산사를 유력하였다고 한다. 대사의 대표적 저서인 『선가귀감』은 내은적암에서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선가귀감』의 서문에는 1564년 여름에 썼다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내은적암은 서산대사의 생애나 불교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역사공간이다. 대사가 남긴 내은적암 시 내용 중에는 ‘두류산에 암자 하나 있으니 암자의 이름은 내은적이라, 산 깊고 물 또한 깊어서 노니는 객의 자취 찾기 어려워라, 동서에 각각 누대 있으니 공간은 좁아도 마음은 좁지 않네.’라고 하며 이 암자가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을 전하고 있다.  


▲내은적암터 축대


▲내은적암터. 예전에 있었다고 하는 주춧돌을 찾을 수 없었다.


무더위가 한풀 꺾이고 바람에 가을 내음이 실리기 시작하던 8월 끝자락의 날에 내은적암터로 알려져 있는 곳을 찾았다. 하동 화개면 왕성분교장 앞 푸조나무 왼쪽에서 산자락의 차밭으로 오르는 길이 있고, 차밭 위에는 정자가 들어서 있다. 정자 바로 뒤 산자락으로 더듬듯 길을 내어 겨우 오르면, 축대 위에 좁게 자리 잡고 있는 공터를 만난다. 좁은 터에는 잡목과 잡풀이 엉켜있어 예전에 있었다고 하는 주춧돌도 찾을 수가 없다. 아직 절터에 대한 명확한 고증이 이루어지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이처럼 외면당하듯 방치되어 있는 모습은 길 입구에 있는 ‘서산대사 수행처 내은적암터’라는 안내 팻말을 무색하게 한다. 지리산에서의 35여 년, 서산대사라는 위대한 인물을 길러낸 지리산의 이야기들이 이제 시공간적으로 정리되어 차곡차곡 쌓아져야 되지 않을까.      


‘남해의 물결이 아무리 요동쳐도 두류산 푸른빛은 여전히 끄떡없네’라며 지리산을 닮은 자신의 성품을 자부하던 대사가 아니던가.[2022.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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