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는 마음에서 오는 게 아니야

by 초율

짧은 비행을 마치고 나리타 공항에 발을 내디뎠을 때, 비로소 실감했다.

이제부터는 진짜 '실전'이라는 것을.


도쿄 도심으로 향하는 열차를 타기 위해 지하역으로 내려갔다.

예약도 없이, 그저 '스카이액세스'를 타고 아사쿠사역으로 가겠다는 막연한 계획뿐이었다.

하지만 막상 표 파는 곳을 찾으려니 블로그에서 읽었던 정보들이 머릿속에서 뒤섞여 길을 잃었다.

한참을 헤매다 관광 안내소의 설명을 듣고서야 간신히 티켓을 손에 쥐었다.

상황이 복잡해지니 남편과 나는 예민해져서 말이 없어졌다.

서로 웃지도 못하고 눈치만 보며, 혹시나 싸움이 터질까 봐 말을 아꼈다.


무사히 전철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조금은 평화가 찾아왔지만, 곧 후회가 밀려왔다.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잠깐의 여유를 갖고 간식이라도 사서 탔어야 했는데.

듬직하던 남편의 등에 긴장감이 서려 있는 걸 보니 배가 고파서 더 그랬던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남편은 눈을 감고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나는 그런 남편의 옆모습을 보며, 이번 여행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조용히 기다려주는 것'뿐임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간신히 아사쿠사역에 도착했다.

그때의 남편과 나는 '숙소 체크인'이라는 목적에 완전히 매몰되어 있었던 것 같다.

여유 없는 발걸음으로, 웃음기 하나 없이 구글 지도를 보며 걸었다.

무거운 짐을 들고 식당을 찾아 헤매기보다는 일단 체크인을 해서 몸을 가볍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캐리어를 끌고 걷기 시작했다. 구글 지도로 이미 수십 번도 더 가본 길이었다.


"금방 찾을 거야."


호기 있게 앞장섰지만, 현실의 도쿄 골목은 화면 속 모습과 달랐다.

생각보다 바람은 차가웠고 건물들은 다 비슷비슷해 보였다.

한참을 헤매다 보니 아이들의 얼굴에도 피로가 짙게 묻어났다.

부모의 기색을 살피느라 아이들도 덩달아 긴장했을 텐데.

문득, 여유를 찾으러 온 여행에서 정작 가장 여유 없는 시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씁쓸하게 다가왔다.

바닥난 에너지로 억지로 발을 떼던 그때, 남편이 멈춰 서서 말했다.


"안 되겠다. 일단 편의점 가자. 각자 먹고 싶은 거 골라서 여기서 먹고 움직여."


가까운 패밀리마트로 들어갔다.

따뜻한 식당에 앉혀서 제대로 된 첫 끼를 먹게 해주고 싶었는데, 근처에 마땅한 장소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바람 부는 길거리 한복판에서 봉투를 열었다.

나루와 바다는 당고와 오니기리, 돈가스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엄마의 미안한 마음과는 달리, 아이들의 눈은 반짝였다.

유튜브와 SNS에서만 보던 일본 편의점 음식을 직접 맛본다는 사실만으로도 아이들에겐 이 길바닥이 최고의 레스토랑인 듯했다.


"엄마, 이거 진짜 맛있다! 식감이 대박이야."


불평 한마디 없이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음식을 베어 무는 아이들.

나는 내가 먹고 싶던 당고를 한 입 물었다.

허겁지겁 간식으로 허기를 채우는 우리의 모습이 조금 처량해 보일 법도 했지만, 우리는 서로를 보며 웃었다.

배가 차오르니 비로소 차가운 도쿄의 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졌다.

남편도 이제야 살 것 같다며, 기운이 없어 너무 힘들었다고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나루와 바다는 벌써 휴대폰 메모장에 브랜드별 편의점 추천 리스트를 적어왔다.

세븐일레븐은 이게 맛있고, 로손은 저게 유명하다며 재잘거리는 아이들이 귀여웠다.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즐거움을 발견하고, 이 여행을 온전히 즐기려 노력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대견했다.

결국 편의점은 4일 내내 우리 가족의 든든한 '단골 식당'이 되었다.

비싼 맛집보다, 길 위에서 나눠 먹은 차가운 당고 한 알이 이번 여행의 가장 선명한 첫 기억으로 남았다.


이제 다시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다시 캐리어 손잡이를 꽉 쥐고, 미로 같은 아사쿠사의 골목 안으로 기분 좋게 스며들었다.

역시 여유는 마음에서 오는 게 아니었다.

배가 차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의 여행이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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