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프롤로그
드디어 내일이다. 며칠 전 받은 감사 스케줄을 보고 있다. 내일부터 3월 31일까지 평일은 이틀 빼고 외부 근무로 가득 차 있다. 이제 드디어 시작이라는 생각에 설레기도 하고, 그 스케줄이 어느 정도의 강도인지 감도 오지 않아 겁이 나기도 한다. 무얼 챙겨야 하나. 6시 퇴근 시간이 가까워 오는 걸 확인하고 노트북 가방을 꺼내 놓고 노트북, 숫자 키패드, 계산기, 리갈 패드, 지우개와 형광펜이 들어있는지 확인한 필통을 넣었다. 또 뭐 없을까 하고 책상을 둘러보는데 마우스패드가 눈에 들어왔다. 마우스패드도 넣고, 갑자기 떠오른 칫솔과 치약도 노트북 가방 앞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다 됐나?
“기동차 선생님, 은행조회서[1]랑 추가로 회신된 채권채무조회서[2]가 있는지 확인해보고 관련 철 챙기십시오.”
노대차 선생님이 옆 자리에서 얼굴을 불쑥 내밀고 외쳤다.
“참, 전에 보내 준 전기 조서[3] 파일들 다 훑어봤죠?”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덧붙였다. 맞다. 작년 12월에 처음으로 맡은 업무가 감사 거래처에 연락하여 은행조회서와 채권채무조회서 보낼 준비를 하는 것이었다. 그 이후 회신된 각 감사 거래처별 은행조회서와 채권채무조회서들이 이미 산더미였으며, 오늘만도 몇 개가 도착했는지 모른다. 은행조회서 철과 채권채무조회서 철까지 넣으니 가방이 터질 듯하다. 가방 하나를 더 챙겨야 할까? 이 참에 전기 조서 철들도 가져가 볼까? 노대차 선생님이 보내준 전기 조서들 파일을 열어서 이미 훑어본 후라 그것들은 가져가지 않기로 했다.
“김장수 쌤, 재고 실사 조서 철 좀 줄래?”
나독립 선생님이 믹스커피가 든 종이컵을 들고 내 앞자리에 앉아 있는 김장수 선생님에게 다가와 말했다.
재고실사. 수험생 시절 회계감사 과목을 수강할 때 강사님들로부터 재고 실사 모험담을 들으며 영화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작년 12월 24일 오전 한 의류업체 재고 실사가 있어 감사 거래처 회의실에 모두 모여 각 재고 실사 현장을 회계사와 회사 담당자를 한 쌍으로 배정하였다. 나는 한 과장님과 한 팀이 되어 우리 집 근처의 백화점에 재고 실사 입회를 하게 되었다. 백화점 매장 직원을 만나 내가 들고 갔던 재고 리스트에서 아이템을 골라 보이니 그 자리에서 해당 아이템을 꺼내 개수를 세어 보여줬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매장과 창고를 오가며 재고 실사 입회를 마쳤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처음으로 선배 회계사들 없이 단독으로 거래처 사람들을 상대했던 것이 긴장되었는지 한 겨울이었음에도 옷에 땀이 배었다. 같이 갔던 거래처 과장님과 백화점을 나오니 눈이 오고 있었다. 그렇게 크리스마스이브에 첫 재고실사를 무사히 마치고 거래처 과장님과 함께 눈이 오는 길을 걸었던 기억이 난다. 신나게도 지방 출장 기회도 있었다. 진짜 직장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동 시간 왕복으로 약 6시간, 재고실사 약 50분, 점심식사 약 2시간(자재 창고 근방에 마땅한 음식점이 없었는지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 곳까지 다녀왔다. 그 지방의 명물 음식점인 것 같았다.)을 보내고 왔더니 하루가 다 갔다. 어른들 틈에서 비로소 진짜 어른이 된 듯했다. 그러나 달콤한 추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월 2일 나는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에 재고 실사를 하러 갔다. 공장 내 재고를 맡은 나는 공장으로 들어선 순간 나지막하게 들려온 소리에 얼어붙었다. 어디선가 들려온 말 때문이었다.
“에이, 신년 벽두부터 여자가 재수 없게.”
못 들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재고 실사 내내 잔뜩 겁을 먹고 위축되어 옳게 센 것인지 어쩐 것인지도 모르고 ‘OK’, ‘OK’ 표시해 내려갔던 아픈 기억이 있다.
김장수 선생님이 나독립 선생님에게 재고실사 철을 건넸다. 거기엔 내가 박스 채로 쌓여 있던 학원 교재의 재고 수량을 확인했던 서류도 포함되어 있다. 내가 제대로 재고 실사를 한 게 맞는지, 혹시 내가 실수한 게 있다면 그것은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인지 몰라 자신 없는 얼굴로 나독립 선생님을 슬쩍 바라봤다.
“내일 9시 50분에 인서율에듀 앞에서 봅시다.”
나독립 선생님이 나와 김장수 선생님을 보고 말했다.
“기동차 쌤, 기똥차게 감사해봅시다.”
이어 썰렁한 유머를 던져 왔다. 심의구 이사님이 나를 기똥차라고 부른 이후 나의 별명은 기똥차가 되고 말았다.
“그거 알아요? 저 2년 차 때 기동차 쌤처럼 갓 졸업해서 입사한 스텝 회계사가 첫 감사 나가서 마지막 날 감사 끝났다고 좋아하며 조서를 다 찢어버렸습니다. 으하하하하하. 기똥~~~차 샘은 그러면 안됩니다.”
나독립 선생님은 6년 차 회계사로서 우리 본부에서는 심의구 매니저 선생님 다음으로 연차가 많아 감사 스케줄을 보면 대부분의 거래처에 인차지[4]로 표기되어 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한 거지만 볼수록 내가 상상해 온 회계사의 모습과 영 거리가 멀고, 너무도 재미없는 농담을 너무도 많이 한다. 표정 관리 안되게. 좀 더 친해지면 재미없다고 말씀드려야겠다.
내 앞자리에 있는 김장수 선생님은 나랑 같이 1년 차 동기이다. 작년 10월에 같이 입사한 나보다 나이가 좀 많은 우리 본부 유일한 동기이다. 참, 내가 다니고 있는 회계법인의 이름은 빅포회계법인이다. 하지만 Big Four[5]에는 들어가지 않는 중소 회계법인이다. 그래서 본부가 총 다섯 개인데 한 본부의 구성 회계사 수가 10명이 넘지 않는다. 각 본부에는 파트너가 한 명 있기도 하고 많은 곳은 네 명 있기도 한데 사실 다른 본부 하고는 같은 법인에 있다고 느끼지 못할 정도로 지금까지는 교류가 없다. 작년 11월에 2박 3일로 법인 연수를 가서 들어보니 각 본부가 각자의 거래처를 가지고 있고 같은 일을 하고 있으므로 동종의 경쟁업체들이 모여 있는 형태라고 할까. 그런 게 유한회사란다. 김장수 선생님이 업계에 대해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로 잘난 척하며 알려줬다. 그래, 상법 시간에 회계법인이나 법무법인은 유한회사라고 했던 것 같다. 상법 공부할 때 너무 어렵고 안 외워져서 고생 좀 했던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래서 다른 본부와 협력을 한다거나 조율을 하는 일이 내 선에서는 웬만해선 발생하지 않는다. 김장수 선생님은 일명 장수생이었다. 올해로 서른한 살이 되었고, 그러니까 작년 서른 살에 회계사 시험에 합격하고 우리 빅포 회계법인에 입사했다. 그래서 그런지 나보다 상법은 더 많이 아는 것 같다. 다른 회계법인에서 근무한 지 꽤 된 친구들이 여럿 있는지 회계법인 돌아가는 사정을 다 알고 있는 듯했다.
“내일 가는 회사는 마지막 날에 회식합니까? 감사 기간 내내 회식합니까?”
김장수 선생님이 진지하게 물어서 나는 그만 웃고 말았다. 핫, 뭐라고? 무슨 엉뚱한 질문이야?
“내일 가게 될 회사는 늘 그랬듯이 마지막 날에만 회식할 거다.”
이에 나독립 선생님은 나와는 달리 질문에 놀라지도 않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자 입사 당시 대표님 면접에서 대표님이 술 잘 마시냐고 물었던 것이 기억이 났다. 노래방 좋아하느냐고도 물으셨었다.
[1] 은행조회서란 은행조회서와 금융거래 조회서, 그리고 은행이 아닌 기관에 발송하는 금융기관 조회서를 통틀어 칭한다. 이 조회서를 은행 및 금융기관에 발송하면 수신한 해당 기관은 재무제표 기준일의 예금 및 차입금의 잔고, 보증 및 담보 등의 회계기간 동안의 중요 금융 거래를 기재하여 회신해 줄 의무가 있다. 감사인은 기말 입증 감사 전에 이 조회서를 발송하고 회신하여야 한다.
[2] 채권채무조회서란 감사할 회사와 거래 중인 회사로 재무제표 기준일 현재로 채권과 채무의 잔액을 조회하기 위해 발신하는 서류이다. 역시 감사인은 기말 입증 감사 시작 전에 이 조회서를 발송하여 회신하는 업무까지 마쳐야 한다.
[3] 전기 조서란 전기 감사 조서의 준말이다. 해당 연도를 당기라고 하고 그 이전 연도를 전기라고 하며, 전기에 감사인이 감사하면서 작성한 조서를 말한다. 감사인은 현재 주식회사 등의 외부 감사에 관한 법률에 의거 8년간 보관할 의무가 있다. 또한 해당 회사의 감사 업무에 대한 히스토리를 복기하거나 숙지하는 것은 당기 감사인의 중요한 업무이에 포함된다.
[4] 감사 현장 책임자이다. 실제 감사 책임자는 따로 있다. 주로 매니저라고 부른다.
[5] 회계 시장에서 Big Four라는 용어는 현재 한국의 대형 회계 법인 네 군데를 일컫는다. 과거에는 다섯 개인 적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