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2010년 2월 4일~5일, 엘브이 인터내셔날 주식회사
어제까지 삼일 동안 디엔에이에 있으면서 재무제표 숫자가 아닌 다른 것들에 대해 많은 경험을 했다. 그 삼일 동안 매니저 심의구 이사님은 괴로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 이른 저녁의 회식은 거절하지 못했다. 앞의 다른 회사들에서의 회식도 물론 나로서는 불편한 자리이긴 했지만 어제의 술자리에서 도는 긴장감은 나를 더 불편하게 했다. 다행히도 비교적 일찍 끝난 회식 덕에(라고 해야 하나? 때문에 라고 해야 하나?) 나를 포함한 몇몇이 대리기사가 운전하는 심의구 이사님의 차를 얻어 타고 사무실로 가고 있었다. 이미 심의구 이사님은 계속 기업 불확실에 의한 ‘의견거절[1]’이라고 결심한 상태였다.
나는 그저 사무실에서 내일 가게 될 회사에 가져갈 서류들만 챙겨 집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독립 선생님이 인서울에듀와 경진정공에 대한 진도를 확인하는 질문들을 우리에게 했고, 향후 일정에 대한 계획을 얘기하면서 우리 각자에게 이런저런 자료를 요청했다. 급한 순서대로 요구받은 자료들을 만들고 있는데 어느덧 밤 10시가 되었다. 다 끝내지는 못했지만 내일 또 새로운 필드에 나가야 하므로 오늘은 퇴근하고 내일 저녁이나 모레 저녁 감사 현장에서 철수하고 사무실에 들어와서 마저 하거나 그것도 안되면 주말에 나와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퇴근했다.
오늘의 회사는 외감 법인이 아닌 작은 회사라 노대차 선생님과 나 둘만 나왔다. 젊고 활달한 여성 직원들의 비중이 상당히 높은 회사다. 이곳은 홍콩 소재 패션 기업의 한국 자회사로서 홍콩 본사에서 피혁제품 (주로 신발)을 수입하여 판매하고 있었다. 이 감사는 홍콩 본사에 제출할 감사보고서로서 홍콩 본사는 해외 현지법인에 대한 지분을 재무제표에 투자주식으로 표시하고 1년에 한 번 또는 두 번 또는 네 번, 제출받은 재무제표를 이용하여 평가하고 있을 것이다. 업종도, 규모도, 감사 목적도, 분위기도 이전 두 회사와는 다르다고 생각하니 신이 났다. 심지어 탕비실에는 원두커피 머신도 있다.
회사가 제시한 자료에는 영문 자료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을 본 노대차 선생님은 회사 담당자에게 물었다.
“필요하신 게 영문 재무제표에 대한 영문 감사보고서[2]인가요?”
“네, 맞습니다. 저희 같은 회사 감사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쾌활하고 젊은 여자 회계 팀장님이 대답과 동시에 질문했다.
“아니요. 당기 이전 감사보고서들 좀 주시겠습니까? 3개년도 분이요.”
노대차 선생님의 대답에 굴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회계 팀장님이 나가고, 나는 조금 걱정이 되어 물었다.
“안 해보셨다구요? 어떡해요? 저야 뭐 말할 것도 없이 아예 모르는데 그래서 선생님만 의지하고 있는데…”
노대차 선생님은 여전히 당황하지 않고 말했다.
“기동차 선생님 이제 입사한 지 몇 달 안됐지만, 감사는 뭐 한 달도 안됐을 거구. 어때요? 몇 개 안 되는 회사였지만 다 다르지 않나요? 저도 3년을 일했지만 같은 회사가 하나도 없었어요. 회계사의 장점은 새롭고 낯선 일을 하도 많이 해서 새롭고 낯선 일이 겁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 감사 시즌 끝나고 특강 좀 해야겠는데요.”
“네? 특강이라뇨? 저보고 강의를? 어디서요? 뭘요?”
내가 눈이 동그래져 물으니 노대차 선생님이 말했다.
“땡땡 중학교에 매년 직업 탐구의 날이 있거든요. 여러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초빙돼서 학생들에게 직업의 세계를 미리 좀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재작년까지는 원대조 선생님이 하다가 작년에 제가 했는데 이번엔 기동차 선생님이 하십쇼. 50분 정도면 되고 파워포인트로 하든 말로 풀든 그건 선생님 마음이다. 참고로 강의료도 있습니다. 20만 원.”
회계 팀장님이 가져다준 영문 감사보고서 책자들을 숙독 중이다. 감사보고서 본문은 물론이고 계정과목 모두 영문이고, 재무제표 상단 및 주석에 포함된 표들의 상단에는 ‘KRW’라고 기재되어 있다. 음… 우선 회사가 준 파일들은 모두 한글 및 원화로 표시된 자료들이다. 그럼 이것들을 영문으로 번역하고 통화는 그대로 원화로 사용해도 된다는 거네. 외화 환산의 이슈는 없는 거고.
“선생님? 외화 환산 재무제표가 필요한 건 아닌가요?”
내가 묻자 노대차 선생님이 답했다.
“홍콩 모기업에서 홍콩 달러 표시 재무제표를 요구했다면 그랬을 겁니다. 그런데 보다시피 여기 감사보고서에 첨부된 재무제표는 영문이기는 하지만 원화 표시잖아요? 중급회계 시간에 기능통화와 표시통화에 대해 들어본 적 있죠? 지금 한국에 소재하고 있으면서 본사에서 상품 매입을 제외한 나머지는 원화로 거래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주된 거래 통화는 원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존을 이용해 원화로 표시하고 이를 근거로 세법의 적용을 받아 세금도 납부하고 하죠.”
노대차 선생님의 더 길게 이어지려는 말을 내가 끊었다.
“더존이요? 그게 뭔데요?”
“우리가 앞서 갔던 회사들 중 큰 회사들은 내부에서 개발한 회계프로그램을 사용하고 더 큰 회사 그러니까 대기업 정도 되면 오라클[3]이나 쌉[4]을 기반으로 하는 이알피 시스템[5]을 이용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대부분의 중소기업은 상용 회계프로그램을 쓰는데 가장 대표적이고 시장점유율이 거의 독점적인 회사가 더존입니다. 아무튼 그건 중요하지 않고, 이 회사의 기능통화는 원화라는 거예요. 홍콩 본사는 이 원화로 표시된 재무제표를 자신들의 표시 통화로 환산하여 지분법[6]을 적용하든, 연결[7]을 하든 할 겁니다. 지금 우리가 할 거는 아니고. 하지만 나중을 위해 기능 통화와 표시 통화가 다른 경우의 환산 이슈는 시간 날 때 기업회계기준 외화 환산 조항[8]이랑 관련 해석[9], 기준서[10] 찾아 보시구요. 보고 나서 나도 좀 업데이트시켜주고.”
노대차 선생님의 모습에서 전문가로서 흔히 가질 법한 권위주의 적인 모습보다는 뭐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모르는 것을 배우는 것에 아주 관대한 태도가 느껴졌다.
이튿날 이른 시각에 현장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짐을 싸면서 노대차 선생님은 근처에서 간단하게 밥이나 같이 먹고 오늘은 집에 일찍 가자 했다. 오 땡땡이. 다른 회사들은 다 회식으로 마무리했는데 여기는 회식을 안 하는가 보네. 노대차 선생님은 여의도에 왔으니 진주집에 가야지 하며 나를 이끌었다. 여의도 맛 집인가 보지?
“회계사의 또 다른 좋은 점은 숨겨진 맛 집을 많이 안다는 겁니다. 뭐 여기처럼 이미 맛 집 지도에 있는 데 말고도 현지 직장인들의 소박한 단골 식당이라든가, 그 지역 기업가들이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가는 고급 음식점까지 ‘거기 하면 어디’하고 자신만의 맛 집 지도를 가지고 있어요.”
노대차 선생님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이 회사는 회식이 없네요? 이렇게 일찍 끝나기도 하구요.”
“그러네. 역시 회사마다, 담당자마다 다 다르니까요. 회식 문화도 다 다르지요. 그나저나 나독립 쌤 없으니까 좋지 않습니까?”
나독립 선생님을 이제 알아가는 중이니 결론 내리기엔 아직 이르나 독특한 캐릭터다 라고 느끼고는 있었지만 정확히 어떤 의미에서 묻는 말인지 몰라 그저 얼떨떨한 표정으로 답할 수밖에.
“'회계하셨으니 감사합시다.' 같은 썰렁한 농담 안 들으니 좋긴 하네요.”
“일을 너무 안 하잖아요. 자기는 계정 몇 개 맡지도 않고. 물론 인차지니까 입증[11] 말고 다른 거 챙길 거 많은 건 아는데 결국 그 다른 것도 나나 다른 선생님들이 하게 되더라구요. 그리고 심의구 이사님보다 1년 후배이지만 나이로는 동갑인 거 알아요? 장수를 하셔서 늦은 나이에 회계사가 돼서 그런지 빨리 독립하고 싶어 하셔요. 나 입사 때부터 들은 소리가 ‘나 곧 독립한다.’였습니다.”
“독립이요? 무슨 일제 강점기도 아닌데 대한 독립이요?”
“자기 거래처 확보해서 파트너로 독립해서 자기 팀 꾸리는 거 말입니다. 그래서 나독립 선생님 영업하느라 바쁘시잖아요. 술도 많이 드시고.”
그렇게 땡땡이를 치고 있는데 노대차 선생님의 핸드폰에서 벨이 울렸다. 무슨 계약서 이야기를 하는 것 같더니 끊었다.
“기동차 쌤, 엘브이 인터내셔날 회계 팀장님이 계약서 하나가 없어졌다는데 기동차 쌤 한테 있는 거 아니에요?”
“저한테요? 잠시만요. 확인해볼게요.”
당황한 나는 콩국수를 먹다 말고 노트북 가방을 이리저리 뒤지기 시작했다. 계약서 하나가 나왔고, 빨간 인주가 묻어 있는 것이 사본이 아닌 원본임을 보여 주었다.
“샘, 어떡해요? 죄송해요”
“어떡하긴 뭘 어떡해요. 마저 먹고 갖다 줘야지.”
그렇게 그날의 땡땡이는 아쉽게 끝나고 말았다.
[1] 감사절차가 종료되고 나면, 외부 감사인은 감사보고서에 재무제표에 대한 감사의견을 표명한다. 감사의견의 종류로는 적정의견, 한정의견, 부적정의견, 의견거절이 있다. 그중 의견거절은 감사 증거가 불충분하였거나, 감사 범위에 제약이 있었거나, 계속 기업 가정이 불확실한 경우 감사의견 표명을 거절하는 것을 말한다. 기업의 재무제표는 계속 기업 가정을 전제하여 측정 및 인식되기 때문에 계속 기업 가정이 불확실하다면 재무제표를 적절하게 표시할 수 없게 된다.
[2] 재무제표에 대한 감사보고서가 궁금하신 분은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접속하여 공시되어 있는 회사들의 감사보고서들을 열람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감사보고서는 1~2페이지 정도의 짧은 정형화된 보고서 형태를 띠고 감사 대상 및 감사 절차가 간단히 기재된 후 감사의견이 명확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감사 의견 외에 특이 사항이 있는 경우 이를 덧붙인다. 특이사항이 많은 경우 감사보고서가 길어질 수 있다. 그 뒤에 첨부된 재무제표와 주석은 회사가 작성한 것이다. 그러나 분문과 같이 외감 대상이 아닌 회사의 감사보고서는 공시 의무가 없으므로 관계자가 아닌 경우 접근이 불가능하다.
[3] Oracle. 미국의 소프트웨어 회사
[4] SAP. 독일의 소프트웨어 회사
[5] ERP 시스템. 전사적 기원 자원 관리 시스템으로 그 안에 회계 프로그램이 포함되어 있다.
[6] 기업(이하 투자법인)이 다른 기업(이하 피투자법인)의 지분을 보유한 때에는 해당 피투자법인의 재무상태의 변화를 투자법인의 재무제표에 그 지분만큼 반영하는 것을 지분법이라고 한다.
[7] 기업(이하 지배기업)이 다른 기업(이하 종속기업)의 지분을 보유함으로써 또는 지배력을 가지고 있는 때에는 해당 종속기업을 해당 지배기업과 같은 실체로 간주하여 지배기업과 종속기업의 재무제표를 합하여 표시하도록 하고 있으며, 이것을 연결 회계라고 하고 이 작업을 연결한다고 한다.
[8] 한국의 모든 회계기준은 한국회계기준원에서 제정하고 있으며, 한국의 회계기준원은 2007년 국제회계기준을 채택하기로 하면서 2011년부터 모든 상장 회사가 적용하도록 함에 따라 비상장 회사를 위한 회계기준을 위하여 일반기업회계기준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2011년 이전에는 상장, 비상장 모두 기업회계기준서를 적용하고 있었다. 2001년 기업회계기준서가 제정되기 전에는 기업회계기준을 적용하고 있었다. 2009 회계연도 당시에는 기업회계기준서를 적용하고 있을 때이지만 기업회계기준서와 상충하지 않는 범위에서 기업회계기준 조항의 일부를 적용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외화 환산의 경우가 그러했다.
[9] 시행 중인 회계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실무상 혼선이 있는 경우 한국회계기준원에서는 해석을 발표하고 있다.
[10] 기업회계기준서를 줄여서 부르는 말이며, 관련 해설은 7번 주석을 참조 바란다.
[11] 감사절차 중 계정과목 별로 기중 거래가 적정하게 인식되었는지, 기말 잔액이 적정하게 표시되었는지를 증거를 통해 확인하는 절차를 말한다.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