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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매혹박 Apr 11. 2021

10장. 내가 만난 사람들

세상은 넓고 나와 다른 사람은 많다.

 뉴질랜드에 온 지 어느덧 3년이 다 되어 간다. 사교성이 좋은 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다. 뉴질랜드에 도착해서 집을 구하기 전에도 우리에겐 어린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집을 보러 다니는 시간 외에는 놀이터 탐방을 다녔었다. 뉴질랜드 놀이터는 한국에서 벤치마킹한 사례가 있을 정도로 훌륭하다고 들었기에 근방의 모든 놀이터를 검색하여 돌아다녀 보는 중이었다. 뉴질랜드 도착 3주 차에 한 놀이터에서 한국인 가정을 만나게 되었다. 우리가 만난 첫 한국인들이었다. 머리가 검다고 해도 뉴질랜드에 거주하는 중국인이 워낙 많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중국인이겠거니 하고 있었을 터다. 아이들이 좁은 호텔 방과 답답한 차 안에서 나와 즐겁게 뛰어노는 것을 나와 내 남편이 흐뭇하게 지켜보며 대화하고 있는 걸 지나가던 한 남자아이가 들었나 보다. 그 아이는 우리에게 자신의 이름을 한국말로 소개하고는 뛰어갔다. 그리고는 자기 부모에게 우리 얘기를 했던 모양이다. 그 부모는 우리에게 웃으며 다가왔다.

“한국 분이세요?”


 그 부부는 우리 또래였고, 서로 반가운 마음에 그 자리에서 한 시간을 떠들고도 모자라 놀이터 옆 카페로 들어가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게 우연히 맺어진 인연이 다리가 되어 몇 가정과 함께 작은 모임이 꾸려졌다. 아이들의 나이가 모두 고만고만하여 주로 플레이 데이트 형식의 가족모임이 되었다. 그 모임은 일가친척 하나 없는 우리 가족의 외로움을 달래주었다. 이 지인들은 내가 잠깐 취업에 성공했을 때도 크게 기뻐해 줬고, 곧이어 취업에 실패했을 때도 큰 위안을 주었다.


 나와 아이들의 길고 길었던 첫 번째 여름방학 동안 남편은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셋은 매일매일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낼까 궁리했다. 그 당시에는 운전을 못했기 때문에 집에서 걸어 다닐 수 있는 곳으로만 다녔는데 다행히도 우리 집은 시내 근처라 박물관도, 도서관도, 놀이터도 걸어 다닐 만했다. 그 날은 도서관이 낙점되어 갔는데 운이 좋게도 여름 방학 행사 중이었다. '모아나' 주변으로 아이들이 가득했고, 그 모아나는 그림책도 읽어주고, 노래도 불러주었다. 행사가 끝나고 모두가 우르르 빠져나간 후 아이들과 나는 책을 몇 권 보다가 나가자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그 안에 동양인 가족이 있었다. 당연히 중국인일 거라 생각하던 찰나 그 엄마가 자신의 딸아이에게 말했다.

“우리 점심 뭐 먹을까?”   

한국인 가족이었던 것이다. 그 집의 딸아이가 대답하기도 전에 내 둘째 아이가 나에게 말했다.

“엄마, 나 배고파.”

그 집 엄마는 활짝 웃으며 둘째 아이를 보고 말했다.

“너도 한국 아이구나?”


 그 집의 딸아이는 내 첫째 아이와 동갑이었고, 그 길로 그 가족과 함께 점심도 먹고, 박물관 나들이까지 함께 했다. 그렇게 또 아이들 덕분에 안면을 텄다. 나는 그 집 엄마와 많은 부분이 통했다. 앞서 놀이터에서 만나 확장된 모임의 가정들은 모두 오랜 전 이민한 가정들이었던 것에 비해 이 가정은 우리가 오기 1년 전에 우리와 같은 코스로 온 것이었다. 그 점을 제외하고도 육아와 환경을 대하는 태도, 삶을 대하는 태도 전반에서 결을 같이 하고 있음을 대화를 하면 할수록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가 그 집의 남편이 다른 지방으로 취업이 되어 이사를 가게 되었다. 우리와 같은 신분에 그것은 크게 축하할 일이었지만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이 컸는데 그녀는 이사 가기 전 나에게 새로운 인연을 맺어주었다. 다름 아닌 내 학교에서 영어 선생님으로 있다던 그 한국인이었다. 나는 내가 우상으로 삼고 있던 그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을 진정 영광으로 여겼다. 


 그 한국인 영어 선생님은 음식 솜씨가 좋아서 자주 그 맛있는 저녁 식사에 초대받았다. 그분은 대학생의 신분으로 뉴질랜드로 건너와 어학연수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자마자 다시 뉴질랜드로 오기로 결심하고 당시 남자 친구였던 지금의 남편 분과 결혼을 하여 신혼부부인 상태로 뉴질랜드로 왔다. 그분이 내가 다니던 학교의 어학 과정의 영어 선생님이 된 사연과 도움받을 곳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아이 둘을 낳아 키우면서 20년 가까이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었던 동기에 대해 듣는 것은 흥미로웠다. 그분의 남편 역시 현지 공기업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면서 박사 과정까지 마친 나에게는 '넘사벽' 같은 분이었다. 게다가 우리 아이들이 좋아하는 이층 집에서 산다.    


 이 외에도 남편이 한국인 페인트 팀과 일하게 되면서 직장 동료 가족들과 어울리기도 했는데 이렇게 가족 모임을 많이 가지다 보니 보고 배울 점이 많았다. 그 모든 사람들의 다양한 인생 이야기를 듣는 것은 그 어떤 드라마보다 더 재미있었다. 나는 한국에서 살았던 이야기와 이민을 오게 된 계기, 이민 온 후의 정착 과정을 수집이라도 하듯이 열심히 묻고 들었다. 그 남의 이야기들은 동기부여가 많이 되었는데 무엇보다 그 천태만상 부부 모습에서 배우는 바가 많았다. 한국에서의 나는 같은 여고를 다녔던 친구이거나, 같은 전공을 하였거나, 같은 직업을 가진 친구들이라 전부라 배경과 사고방식이 비슷한 사람들과 인연을 맺어왔던 반면 여기에서 만난 인연들은 출신 지역도, 직업도, 나이도, 이민 목적도, 모두 나와는 너무 달라 신선했다. 세상은 넓고 나와 다른 사람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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