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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PD Oct 09. 2018

06. 어떤 일이든 의미 없는 일은 없어.

방송국에서 하루하루 버틴 끝에 나는 1년을 딱 채우고
퇴사를 할 수 있었다.
난 나름 열심히 했고
이 길이 내 길이 아님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에 후회는 없었다.
그렇게 내 첫 직장생활은 끝이 났다.


나의 사회 초년생은 정말 LTE 속도처럼 빨리 지나갔다.
그만큼 일에 1년을 바칠 정도로 사생활이 거의 없었다는 증거겠지.
그해엔 정말 연휴가 많았지만 방송하는 사람으로서 연휴란 그저
남의 나라 이야기 일 뿐이었다.
직업 특성상 남들 노는 주말이 그리고 연휴 날이 더 바빴다.


2014년 9월 추석 연휴 어느 날.

아시안게임으로 팀에 있는 일부 사람들이 인천으로 출장을 나갔다.

그래서 나머지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방송하는 EPL1)과 재방송 등등을 오롯이 도맡아 해야했다. 

나와 또 다른 직원 1명이 EPL을 전담하였는데 EPL은 방송특성상 저녁 6~7시에 출근하고 

밤을 꼬박 새워 일을 해야 했다. 


여PD, 햄버거 10개씩 XX킹에다가 주문시켜~


너무 정신없어서 햄버거로 식사를 때우면서 말이다. 

햄버거를 한 손에 쥐고, 생방을 기다리며 제공 화면2)을 LSM3)으로 편집했다.

EPL은 커뮤니티의 반응이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옆에 노트북으로 커뮤니티 사이트도 켠 채 방송을 하는데 

커뮤니티 자유게시판에는 글이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우와, 대박! 첼시랑 맨유. 치킨 시켜놓고 대기타고 있습니다.
아~오늘 리버풀 이겨야 되는데. 리버풀은 맨날 약팀한테 져.

글들을 모니터링하랴. 

제공 화면 만드랴.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생방은 10분 전을 향했다. 

선배PD "여PD, 제공화면 준비 됐지?"

여PD "네. 준비 됐습니다."


타이틀 M24)입니다. 

M2 스타트!

타이틀이 돌고난 후 제공화면이 나온다.

LSM1 in~! 

내가 만든 제공화면이 뜨면서 본격적인 EPL경기의 서막을 알린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EPL은 경기를 하는 동안 하이라이트 영상을 여러가지를 만들어야 한다. 

전반전 하이라이트, 경기 하이라이트, 7분 하이타이트 등등..

경기를 가만히 보고 즐길시간은 단 1분도 없다. 

LSM을 계속 돌려보며 골장면과 주요장면 등등을 계속 편집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전반전이 지나있다. 

"여PD, 전반 하이라이트 준비해!" 

난 허겁지겁 전반전 하이라이트 편집본을 끝내고 송출시킬 준비를 한다. 


후반전, 

잠시동안의 휴식을 뒤로하고 

다시 경기 하이라이트를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다. 

게다가 커뮤니티 사이트의 반응도 실시간으로 체크하고 경기 하이라이트 bgm5)도 선정해야 한다.

경기 하이라이트를 준비하는 동안 난 LSM을 만지며 신입 AD에게 말한다.

"세현씨, bgm넣은 usb 음향감독님한테 전달해줘요!" 

삑~삑~삐익!

경기 끝을 알리는 휘슬이 울리고

경기 하이라이트를 송출한다. 그러곤 커뮤니티의 실시간 반응을 본다.

'ㅋㅋㅋㅋㅋㅋㅋ 역시 ㅇㅇㅇ 브금' 
'ㅇㅇㅇ는 브금까지 봐야 축구를 다 본 것 같다니깐 ㅋㅋㅋㅋㅋ'

경기 하이라이트 편집이 끝나고 기진맥진해 있었는데 

이런 커뮤니티의 반응을 보니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이다. 





생방송이 끝나고 재방송 편집까지 끝내고 나서 

시간을 보니 어느덧 새벽 4시 30분을 가리킨다.

퇴근하고 나와 새벽 밤하늘을 바라본다.

'아, 오늘도 수고했어.'

출처 : google no copyright image



나의 직장생활 1년을 돌이켜보니

너무너무 바쁘게 바쁘게 시간이 흘러갔다는 게 보였다.

남들이 치킨을 시키며 중계방송을 기다릴 때 

난 햄버거를 끼니 삼아 먹으며 일했다. 


그래도 단 한 가지 좋았던 건
스포츠 생방송을 하며
인터넷 커뮤니티에 즉각적으로 올라오는 반응들을 보는 게 신기했고
내가 만든 영상에 좋은 반응을 보여줬을 때 정말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그동안 했던 모든 고생이 싹 가실 정도로..

힘들었지만. 정말 힘들었지만.
힘든 만큼 보상받았다. 그게 어떤 가치로든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
첫 사회생활에서 배운 가장 큰 한 가지다.

어떤 일이든 의미 없는 일은 없다. 

1) English Premiere League의 약자. 잉글랜드에서 열리는 프로축구 1부리그 이다.

2) 방송을 알리는 타이틀이 지나가고 난 다음 나오는 화면. 보통 중계를 시작하기 전 광고나 스폰서를 해주는 기업이나 단체명을 알려주는데 그 자막을 띄울 때 쓰는 영상을 말한다.

3) Live Slow Motion의 약자 스포츠 방송에서 꼭 필요한 기계 중 하나. 보통 스포츠 방송에 있어서 슬로 모션 편집에 많이 쓰이나 예전에 편집한 영상을 틀거나 하이라이트 편집을 하는 것 등등 여러 가지 용도로 쓰인다. 

02.번 글 참고 

4) 영상 모니터 번호. 방송국마다 차이가 있다. 

5) background music의 약자. 영상을 송출할 때 쓰는 배경음악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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