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에 질린 칼이 향하는 곳을 묻다
얼마 전 외국인 친구들과 카페에서 이런저런 세상 이야기를 나누다, 기분 나쁜 소리를 들었습니다.
모두가 다 아는 뉴스죠. 이미 세계적인 토픽감이 된 주제입니다. 탄핵된 인물 부부의 재판 이야기와 최근 대한민국 법조계의 태도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듣게 된 비평 한마디에 속이 좀 상했습니다.
“한국인들은 조금 비겁한 것 같아.”
정말 자존심이 해머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탄핵된 전직 대통령 부부’ 때문에, 그리고 ‘일부’ 정치인과 법조계 인물들 때문에 모든 한국인이 싸잡아 이런 말을 듣게 된다는 사실에 속이 아주 많이 상했습니다.
세상에는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 순간을 ‘이성적인 판단’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며 슬그머니 비켜갑니다.
그들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지만, 정작 마주해야 할 적의 눈은 제대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대신 약한 자를 향해 허공에 칼을 휘두르며 “나는 정의를 지키고 있다”라고 외칩니다.
우리는 이 현상을 한 단어로 부를 수 있습니다. 바로 ‘비겁(卑怯)’입니다.
‘낮을 비(卑)’와 ‘겁낼 겁(怯)’. 즉, 천하고 비루한 겁먹음이라는 뜻이죠. 영어 cowardice 역시 라틴어 cauda(꼬리)에서 유래해, 겁에 질려 꼬리를 내리는 동물의 모습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옳음을 알면서도 책임을 회피하는 도덕적 나약함을 의미합니다.
한국어의 ‘비겁(卑怯)’은 이처럼 윤리적 비열함과 심리적 겁이 결합된 개념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비열한 연기를 덧칠합니다.
이 글은 바로 그 연극의 막 뒤에서, ‘권력’이라는 무대 위 배우들의 진면목을 들춰보려 합니다.
옛날 한 성에 황금 열쇠를 지키는 파수꾼이 있었습니다.
적이 쳐들어오자 그는 망루에 올라 외쳤죠.
“나라를 위해, 백성을 위해, 나는 끝까지 싸우리라!”
그러나 화살이 성문에 꽂히는 순간, 그는 슬그머니 성벽 뒤로 몸을 숨겼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내가 다치면 누가 이 나라를 지키겠는가?”
그가 남긴 빈 성문으로 도둑이 들어와 열쇠를 빼앗았고, 백성들은 무너진 성벽 앞에서 그 파수꾼의 이름을 오래도록 기억했습니다.
비겁이란 그렇게, ‘책임’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책임’을 버리는 행위입니다.
오늘날의 정치인들을 보면, 이 우화가 그리 허무맹랑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그들도 스포트라이트 앞에서는 “국민을 위해 헌신하겠다”라고 외치지만, 조명이 꺼지는 순간엔 “우리”라는 무리 뒤로, 혹은 “전 정권”이라는 핑계의 망토 속으로 사라집니다.
누가 봐도 ‘비(卑)’가 ‘고귀함’의 옷을 빌려 입은 꼴이지요.
정치란 본래 ‘공공의 선’을 위한 무대여야 하지만, 지금의 무대는 명예를 잃지 않기 위해 진실을 감추는 오디션장처럼 변했습니다. 그들의 가장 큰 재능은 ‘책임을 나누는 기술’입니다.
마치 도둑 잡으랬더니 서로 손가락만 가리키는 연극처럼 말입니다.
검찰의 칼은 본디 정의를 세우는 도구입니다. 하지만 요즘 그 칼은 좀 이상합니다.
강자 앞에선 종이처럼 무뎌지고, 약자 앞에선 쇠처럼 날카롭습니다. 진정한 악을 마주하면 칼이 아니라 계산기를 꺼내드는 모습이죠.
“이 수사가 내 인사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건 조직의 신뢰에 타격을 주지 않을까?”
이런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늘 같습니다.
“조심하자. 지금은 때가 아니다.” 마치 땅굴 속으로 숨어 들어가는 두더지 떼 같습니다.
그 대신 만만한 상대를 골라 화풀이하듯 수사에 나섭니다.
정의를 향한 검의 ‘진동’이 아니라, 권력에 대한 겁(怯)의 ‘떨림’입니다.
그들의 ‘정의’는 언제나 선택적으로 작동합니다.
거대한 어둠 앞에서는 침묵하고, 손쉬운 대상 앞에서는 ‘엄정 수사’를 외칩니다.
이쯤 되면 칼이 아니라, 방향 조절은 되지만 마음대로 돌아가는 목이 고장 난 선풍기 같습니다.
그래서 그 바람은 언제나 위가 아닌, 아래로만 붑니다.
이토록 명백한 비겁함이 어째서 매번 반복될까요?
그건 그들 머릿속의 인지 부조화 엔진 덕분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여전히 ‘정의로운 사람’이라 믿습니다. 그러니 핑계를 댈 때는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요. 단지 행동이 조금 다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스스로를 설득합니다.
“세상은 원래 이렇게 돌아가.”
“나만 이런 게 아니야.”
“큰 뜻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
이 말들이 반복될수록 양심은 고요해지고, 두려움은 덮입니다.
비겁함은 이렇게 스스로를 보호하는 정신적 방탄복을 입습니다. 그들에게 ‘정의’는 검찰청 벽에 걸린 액자 속 글귀일 뿐, 실제 행동의 기준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들의 녹이 잔뜩 쓴 칼을 보셨나요?
그 칼은 절대 전장에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동안 정의를 위해 싸우기는커녕, 오래전부터 창고 구석에 방치된 채 녹이 슬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결국, 국민이 정치인과 검찰에게서 보는 것은 능력이 부족함이 아니라, 책임감과 용기의 부재입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의 비겁함은 단순히 그들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사회 전체의 신뢰를 무너뜨리며 우리가 서 있어야 할 '정의'의 기반을 허물어버립니다.
비겁함은 어둠과 침묵을 먹고 자랍니다.
우리가 그들의 비겁한 행위를 멈추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그들의 가면 뒤에 숨겨진 '卑'와 '怯'을 끊임없이 지적하고, 용기 있는 공적 행동을 요구하는 시민의 지속적인 주시와 비평일 것입니다. 우리의 끈질긴 비판과 주시야말로, 성벽 뒤에 숨은 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꺼지지 않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비겁한 자들의 세계에서는, 용기가 종종 ‘무모함’으로 취급됩니다.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무모한 자들의 손에서 움직였습니다.
성문을 지키던 파수꾼이 도망쳤던 자리에, 이름 모를 백성이 칼과 방패를 들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성벽 앞에 서 있는가?”
“그대는 도망칠 것인가, 아니면 칼과 방패를 들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