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깨뜨리는 잔혹한 퍼즐

기억, 정체성, 그리고 실존주의적 선택

Dec 3. 2025 brunch_membership's

본 스토리랩(Story Lab)은 음악이 영화의 감정적 연결고리를 완성했다면, 글이 그 여운을 성찰로 확장시키는 글무리 작가 Itz토퍼의 창작적 실험입니다.

두개골 안에는 늘 대혼란이 펼쳐집니다.

한쪽 할리우드 편집실에서는 “사실 그때 내가 더 멋있게 말했어야 했는데”라는 장면을 뇌세포들이 밤새 재편집하느라 정신이 없고, 반대편의 고고학 박물관에서는 흰 장갑을 낀 큐레이터가 먼지투성이 상자에서 ‘초등학교 짝꿍 이름’이 적힌 유물을 간신히 찾아냅니다. 하지만 그 소중한 발견도 옆에서 날아온 ‘오늘의 할 일’ 메모지 폭탄에 와르르 파묻히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정보와 쓸데없이 각색된 장면, 그리고 금방 사라지는 휘발성 메모들이 한꺼번에 뒤섞여 터져 나오는 이 난장판. 이것이 바로 우리 뇌가 매일 상영하는, 혼돈 버라이어티 ‘카오스 코믹 시트콤’입니다. 그리고 이 난장판의 이름은 바로 ‘기억’입니다.

오늘의 주제도 그 기억입니다. 내용이 조금 길고 어려울 수 있지만, 걱정 마세요. 읽다 보면 어느새 빨려 들어가고, 최고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 잃어버린 기억 속, 스스로를 조립하는 실존주의적 주체

우리 모두에게는 반복되는 꿈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 꿈은 현실의 틈새로 스며든, 희미하지만 익숙한 잔상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항상 같은 꿈을 자주 꿉니다. 눈을 감으면 펼쳐지는 색을 가늠할 수 없는 바다. 얕은 모래사장을 따라 거닐고, 험한 산등성이를 넘은 뒤, 거친 파도가 울부짖는 절벽에 올라서는 여정. 분명 누군가와 함께였던 포근한 기억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한데,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모든 것은 흐릿한 잔상이 되어 부서집니다. 그리곤 아무리 애써도 그 실체는 다시 떠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 이 망각이 꿈이 아닌 잔혹한 현실이 되어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내 생활 가운데서 실제로 일어난다면 어떨까요? 새로운 기억을 만들지 못하고 10분만 지나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되는 '단기 기억 상실증'.

평소처럼 바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잠들기 전, 일기를 쓰려고 노트북을 펼칩니다. 그런데 지난 하루는 물론, 방금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 심지어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맥락까지 모두 지워져 버린다면. 마치 맑은 날 갑자기 바닷가로 몰아닥친 거대한 해무처럼 모든 것이 일순간 덮여버린 듯한 느낌.

이처럼 방금 현관문을 닫고 집으로 들어오는 순간, 이전의 모든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이 끔찍한 공백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메멘토>(Memento)는 바로 이 존재론적 악몽을 스크린에 구현해 낸, 그의 가장 냉철하고 지적인 초기 걸작입니다. 참고로 놀란 감독은 7살 때부터 영화를 찍기 시작하며 일찍이 탄탄하고 치밀한 연출력을 쌓아왔는데, 이는 <메멘토>와 같이 복잡한 구조와 깊이 있는 주제를 하나의 서사로 완성해 내는 능력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영화는 관객에게 단기 기억 상실증이라는 주인공의 고통을 직접 겪게 함으로써, 우리가 현실이라 믿었던 기억이라는 토대가 얼마나 취약하며, 정체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쉽게 해체될 수 있는지 묻는 충격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주인공 레너드 셸비의 삶은 10분마다 리셋되는 영원한 현재이며, 아내를 죽인 범인을 쫓는 그의 유일한 무기는 문신, 메모, 그리고 사진뿐입니다. 관객으로 하여금 끝없는 퍼즐 게임에 빠지게 하는 영화이면서, 우리에게 실존주의적인 강력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입니다. 기회가 있으시다면 꼭 보시길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