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성향을 꺼내 쓰는 사람들의 차분한 용기
대학 시절, 친구들과 함께 가슴 설레는 미팅을 나갔습니다.
설렌다는 것은 과장이구요. 그 시절의 미팅이란 마치 캠퍼스의 의례 같은 일이라고나 할까요. 바쁜 친구들은 같은 시간에 두세 군데에서 미팅을 하곤 했죠. 일종의 청춘 낭만 게임 같은 거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때론 여자 친구가 있는데도 인원수를 맞추느라 어쩔 수 없이 참가할 때도 많았습니다.
당시에는 엄격한 교육 제도 탓에 고등학교까지 이성 교제는 금기시되던 때였죠. 그래서 대학만 가면 남녀를 막론하고 모두가 굶주린 이성 사냥꾼이 되었답니다. 그런데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축제 기간인데 파트너가 필요하게 되었죠.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때 대학생으로서의 ‘체면’은 축제 때 파트너가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되었죠. 그래서 심지어는 여동생이나 사촌, 팔촌 따질 것 없이 막 데리고 갔죠. 경우에 따라서는 미혼인 이모나 고모까지, 그것도 안 되면 이웃집 누나에게 ‘공물’까지 바치면서 데리고 갔답니다.
드디어, 미팅 주선 전문가 동기 ‘마담뚜’에게 자기를 대표할 물건을 하나씩 건네주고 커피숍으로 가서 기다렸습니다! 당시 제 비장의 무기는 은박지로 잘 포장된 ‘장미 한 송이’였답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비밀 병기가 되었죠. 예쁜 사람은 예쁜 걸 알아본다나?
당시 미팅 장소로는 다방, 음악다방, 커피숍 이렇게 셋. 그중 조금 고급진 커피숍에서 파트너를 기다리는데, 이게 웬일! 웬 꺽다리가 문을 열고 나타났습니다. 솔직히 그때 숨어 있던 ‘좁쌀 숫기’가 깨어났습니다. 정말 눈 딱 감고 도망치고 싶었죠. 나중에 알게 된 사실, 저보다 한 뼘 이상 더 큰 모 대학 농구선수였습니다.
“맙소사~!!!”
뭘 먹고 저렇게 컸는지, 정말 불공평하더군요.
그때 숨어있던 ‘좁쌀 숫기’가 속삭입니다.
“얌마, 빨리 모른 척하고 뒷문으로 튀어!”
저의 좁쌀만큼 남은 숫기는 이렇게 겁만 많은 게 아니라 때론 비겁할 정도로 자신의 내면을 속이라고 꼬시기까지 합니다. 하긴 그때 그 놀람과 함께 찾아온 실망이란, 충분히 그 유혹에 넘어가도 변명거리가 없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보기와는 달리, 자신보다 키가 작은 저를 보고 수줍게 앉아서 쓴 커피만 홀짝 마시고는, 자기가 키가 너무 커서 미안하다며 그냥 가겠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도긴개긴, 아니 저보다 더 숫기 없는 여학생이었습니다.
단지 저는 없는 숫기를 꽤나 있는 것처럼, 황소개구리가 되어 허풍만 잔뜩 부풀리고 있을 뿐이었죠. 당시 제 별명은 명색이 의리에 살고 죽는 ‘부산갈매기’였습니다. 겉으론 의리로 먹고사는 머시마처럼 행세하더니 키 차이 때문에 자기 파트너를 그냥 보냈다면, 상대에게도 미안하지만 자신에게도 너무 ‘쪽팔리는’ 일이고, 동기들에게 ‘숫기 없음’이 들통날 것 같았습니다.
일단은 ‘좁쌀 숫기’를 밀쳐내고, 짧은 고민 끝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10분만 기다리이소”
그리곤 밖으로 뛰어나가 평소 친구들과 자주 가던 따로국밥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아줌마요~! 오늘 내가 미팅하는데 돈이 모자라네요. 다음 달에 갚을게요, 여자 친구랑 밥도 묵고 고기랑 술 한 잔 할라는데 괜찮는교?”
“알았다 문디야, 가시나 술 취하게 하믄 안된다~! 내가 직이삔다~!”
그리곤 공중전화로 가서, 밖으로 나올 때 봐 두었던 커피숍 전화번호로 그 친구에게 위치를 알려주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래도 함께 걷는 게 서로에게 어색하고, 저 역시 조금 창피하니까요. 그 친구가 와서 식탁을 보고는 조금 놀랐습니다.
“술 못 마시면 밥하고 고기만 묵으소, 내 혼자 마시면서 이야기나 실컷 하다 가이소. 그래야 서로 덜 쪽팔리제”
미팅에서 파트너끼리 시간을 어느 정도 채워야 서로의 체면이 서고, 또 친구들에게 덜 망신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술이 저보다 더 세더군요. 그렇게 저녁도 먹고, 소주도 한 잔 하고. 그런데 술 탓인지 한 잔 들어가니까 둘 다 말이 많아지더니, 없던 숫기까지 합석해서는 술판이 수다판이 되었답니다. 그렇게 너무 늦지 않은 시간에 맘씨 좋은 주인아주머니에게 빌린 돈으로 택시까지 태워 보내며 빠이빠이했습니다.
그녀를 잊을 즈음이었죠. 아직 파트너를 구하지 못한 저는 조바심 속에서 다시 마담뚜에게 미팅을 알아보고 있었는데, 축제 사흘을 남기고 하숙집으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바로 그 꺽다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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