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잠든 나를 깨우는 이야기
지난 글은 편견 속에 가려졌던 내향성의 가치를 조명했습니다. 내향(에너지), 내성(사고), 소심(거리)이 결합되어 나타나는 '숫기 없음'은 사실 환경이 만든 습관이자, 내향인이 복잡한 생각을 처리하는 과정(버퍼링)이 외부로 드러난 것입니다. 내향인의 내면은 풍부하지만, 신중한 대화 처리 방식 때문에 세상은 그들을 '소극적'이라 오해합니다. 글쓴이는 이 오명을 벗고, '숫기 없음'을 세상을 살아가는 자신만의 속도로 인정하며, 그 속에 숨겨진 창조적 힘과 스펙을 재발견하는 여정을 시작한다고 예고했습니다. 이제부터 '숫기의 재발견'을 통해 그 진면목을 탐구합니다.
어린 시절 나의 삶은 남들과는 달랐다. 그래서일까, 성격도 확실히 달랐다. 삶이 지옥과 천당을 왕복하는 열차에서 내리지 못하는 모습이었다면, 종착지에 따라 내 성격 역시 그러했다. 어디서 출발하느냐가 아닌, 어디에 도착하느냐에 따라서.
그래서 나의 삶 속에서의 말이란, 많으면 어둠이 따라왔고 적으면 차디찬 얼음 덩어리가 날아왔다. 결국에는 ‘차라리’라는 단어와 함께 입을 다물거나 참거나 아니면 혼자서 울분을 토하는 게 전부였다. 결국 한 단어가 그들로부터 뱉어졌는데, 바로 ‘숫기 없는 녀석’이었다. 그리곤 덤으로 하나 더 덧붙였다. 말이 없을 뿐인데, ‘고집이 세다’라고.
사람들은 상대의 약점을 보게 되면 아마도 원시적 본능이 발동하는 것 같다. 상대가 아직도 철없는 어린아이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굶주린 야생 늑대처럼 그곳만 집중해서 공격을 가한다. 어쩔 수 없는 사냥감은 결국 피를 흘리며 자신의 육신이 야수에게 먹히는 모습을 보며 처절한 비명과 함께 마지막 하늘을 볼 뿐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나는 ‘나’를 찾기로 했다.”
어느 여름날 멀리서 매미 소리가 ‘맴~맴~’ 하며 울고, 시원한 산바람이 대청마루 위를 스치며 지나갈 때, 외할머니께서 바느질을 하다 고개도 들지 않고 중얼거리셨다.
“니 산에 가서 뭐 생각하노? 엄마 생각하나?”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내 생각밖에 안 한다. 실데없는 생각은 안 한다.”
하지만 속으로는, 마치 부뚜막 찬장에서 달콤한 설탕을 훔쳐 먹고서 들킨 느낌이었다. 하지만 둘 다 맞다. 외할머니 말도 맞고, 내 말도 맞다. 나는 어려서부터 성당 뒤편 작은 고아원 마당에서 만났던 ‘나’만 생각하였다. 외가에서 살기까지 여덟 살밖에 되지 않았었는데, 나는 이미 열차를 두 번 타고 내렸었다. 물론 나중에 한번 더 타게 되었지만. 고아원에서 아버지 집으로, 다시 고아원으로. 그러다가 외가로, 다시... 이유는 몰랐다.
사람들은 ‘숫기 없다’는 말로 내향적이거나 내성적이어서 소극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판단한다. 왜, 사람들은 ‘없다’라고 말하는가? 있는지 없는지를 왜 드러나는 모습만으로 그렇게 판단하는 것인가? 속은 알지도 못하면서. 마치 내 속에 들어와서 보물 찾기라고 한 것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두고 ‘없다’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완전한 백 퍼센트도 없겠지만, 완전무결할 정도로 ‘없는’ 것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 사는 세상은 결코 신화 속의 세상이 아닌데 말이다.
나는 자라면서 그 녀석을 내 속의 다락방 깊숙한 구석으로 들고 가 단단한 상자 속에 넣고 자물쇠를 채운 뒤, 열쇠를 삼켜 버렸다. 그래서 없는 게 아니다. 언젠가 필요할 때 토해내고 다시 그 녀석을 불러낼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가끔 ‘숫기 없다’라는 말을 들을 때 한편으로는, “맞아, 그게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내가 그런 면이 없는 건 아냐.”라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말을 하지 않다 보니 차라리 편한 경우가 자주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또 한편으로 가끔은 말을 하기 싫은 마음이 많이 들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냥 싫다. 그리고 나보다 강해 보이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보면 내 속에 숨겨놓은 열쇠가 들통날까 봐 두렵고, 부끄러워서 감히 정면으로 쳐다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날 부끄러움을 많이 탄다고 했던 것이다. 사실 어른들이 어린아이의 마음을 훔쳐보고 알아맞히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란 건 이미 ‘숫기’에 짓눌린 뒤, 한참 성장한 후에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친구들은 달랐다. 그 녀석들은 그냥 놀기 좋은 상대면 최고다. 달음박질 잘해서 술래에게서 녀석들을 풀어주면 그만이고, 산에서 전쟁놀이 할 때도 나무를 잘 타고, 겁 없이 뱀 꼬리 잡고 패대기칠 줄 알면 용감하고 재미있는 친구가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숫기’라는 녀석은 두 얼굴이었다. 선천적으로 내 속에 이미 숨어 있던 녀석, 그리고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나에게 끌려와 나랑 함께 사는 녀석. 그렇다, 둘이다. 하나는 선천적인 것, 또 하나는 자라는 환경 속에서 만들어지고 습관화된 성격. 그래서 사람들이 드러난 성격을 보고, ‘숫기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숫기 없다는 평가 속에서 복잡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나는 여러 난관을 스스로 헤치며 자라났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는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소속감을 갈망하는 ‘사회적 존재’였을 뿐이며, 다만 내 표현 방식이 조금 더 조심스러웠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만약 누군가가 어떤 연유에서든, 어린 시절의 나처럼 말수가 적고 마음을 드러내는 데 서툰 성향을 지녔다면, 그들에게 작은 등불 하나라도 건네고 싶다고. 비록 강단이 아니더라도 글을 통해서라도 나누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준비한 것이 바로, ‘숫기의 재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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