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향·내성·소심이 만들어낸 뜻밖의 역설
지난주 ‘운명과 담쌓을 수 있는 성격’에서는 “나답게 산다는 건 나를 고집하는 게 아니라, 나를 키우는 일이다.”라는 관점을 중심에 두었습니다. 이제 그 성격 속에 숨어 있던 두 날개 중, 유독 세상의 편견 속에서 힘을 잃기 쉬웠던 한 날개의 회복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우리는 흔히 성격을 ‘내향적이냐, 외향적이냐’로 나누어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분류만으로 사람의 내면을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단순합니다. 그래서 오늘부터는 그중에서도 생활 가운데 어려움을 많이 겪는 ‘내향성’이라는 놀라운 세계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려 합니다.
내향적인 사람들은 오랫동안 자신을 설명하는 세 개의 단어를 가슴속에 품고 살아왔습니다.
마치 자신만의 정체성을 풀기 위한 비밀 열쇠처럼요.
▶ 에너지의 방향은 ‘내향적(Introverted)’
▶ 사고의 깊이는 ‘내성적(Introspective)’
▶ 세상과의 거리는 ‘소극적(Passive)’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세 행성이 그들의 우주를 이루는 전부가 되었죠.
그런데 문제는, 세상이 이 우주의 전체를 관찰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외부로 드러내는 행동과 침묵만을 보고 단정 지어버립니다. 그리고 그 복잡하고 풍요로운 작동 원리를 딱 한 문장으로 줄입니다. “숫기 없다.” 그 말은 가볍지만, 그 말이 붙기까지의 사연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저 역시 어린 시절, 그 라벨의 대상이었던 아이였기 때문이죠.
어린 시절, 저는 말수가 적은 아이였습니다. 성격이 원래 조용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속은 늘 분주했고, 하고 싶은 말도 많았습니다. 성격 탓도 분명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제가 자라난 환경이었습니다.
집에서는 군 장성이셨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집안의 질서였고, 육군사관학교식의 일상은 엄격하기가 군 생활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지시에는 어떤 반박이나 설명도 곧 버릇없는 불복종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어린 마음에 ‘표현’은 조심해야 하는 위험한 행동이 되었죠. 한 번은 반항심 섞인 말을 했다가 큰 호통을 들었고, 또 한 번은 억울함을 설명하려다 오히려 ‘말대꾸’로 오해받았습니다. 이런 경험이 쌓이자 저는 ‘말하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집에서의 습관과 태도가 바깥세상까지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학교에서도 제 모습은 다르게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보며 말했습니다.
“부끄러움이 많은 아이.”,
“말이 없는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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