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지 않는 삶과 한 아버지의 존엄
“행복은 목적지가 아니라, 매일의 선택으로 이어지는 인생철학입니다.”
이른 아침, 샤워를 마치고 평소와 달리 드라이를 하지 않았습니다. 깔끔한 것보다 조금 흐트러진 헤어스타일이 더 나을 것 같아서입니다. 어젯밤 미리 꺼내 둔 빛바랜 청바지와 후드티를 입고 거울 앞에 섰습니다. “됐어. 이 정도면 되겠지.”
그리고 평소에는 애용하지 않는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백팩에는 필요 물품과 커피가 든 보온병, 그리고 보조배터리를 챙겼습니다. 아직 밖은 어둑어둑했지만 지금 나가야 했기에 서둘러 집을 나섰습니다. 집에서 멀지 않은 신축 아파트에 도착하니, 단지 문 앞에는 이미 몇 사람의 남녀가 저처럼 배낭을 하나씩 메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젊은 친구가 나오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제게 가까이 와 귓속말로 말했습니다.
“교수님, 괜찮겠어요?”
“얌마, 목소리 좀 낮춰.”
신축 아파트가 완공되고 인테리어가 끝난 집을 청소하는 일. 일종의 일용직 알바입니다. 수십 년 만에 다시 알바로 돌아온 셈이죠. 은퇴 후, 사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은퇴는 곧 무소득’이라는 등식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평소에 해보지도 않던 체크카드 잔액 확인이 습관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잔액을 들여다본다고 입금 알림이 울리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그냥 식충이 되어 먹고 자고, 혼자 바쁘고... 하지만 ‘혼자 바쁘다’는 말은 수입이 없다는 뜻입니다. ‘돈 되는 일은 안 한다.’가 아니죠. ‘돈을 벌지 못한다’가 정확합니다.
참, 저는 브런치 작가입니다. 하지만 이제 백일을 맞이한 작가 지망생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죠. 수입이 없는 건 아니죠. 독자님의 응원과 멤버십 구독자가 계십니다. 단지, 아직은 미미한 출발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호주머니에 남은 것만 조금씩 아껴 먹는 삶이 된 듯했습니다. 없어서 아끼는 것이 아니라, 많이 남겨두어야 오래 먹으니까요.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죠. 열매 맺을 철에 잎사귀만 번지르한 나무처럼, 가지엔 아무것도 없이 세월만 보내다 잎까지 떨어지면 그저 고목이니까요. 그래서 누군가 이전의 호칭을 부르면, 뭐라고 할까요. 솔직히 조금 불편합니다. 그 시절을 잊기엔 아직은 초보 은퇴자이기 때문이죠. 결국 아직은 양쪽 다 적응이 되지 않습니다.
몇 달 전, 수업을 마치고 나온 보배단지가 말했습니다.
“아빠, 돈 있어? 나 살 게 있는데.”
“당연히 있지. 뭐가 필요하니?”
“아빠 요새 일 안 하잖아. 그러면 돈이 어디서 나와?”
“응... 은행에서 나오지.”
그리고 그날 밤, “그러게... 은행에 돈이 있긴 있지...”
그 뒤의 생각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건 겨울잠을 위해 도토리를 모아둔 다람쥐도 아니고, 그냥 ‘씁쓸하다’입니다. 처음으로 에스프레소를 마실 때도 이만큼 쓰지는 않았는데. 최소한 보배단지에게는 수고 끝에 얻은 대가로 필요를 채워주고,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사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당장 뭔가를 새로 한다는 게 쉽지 않은 나이가 되었죠. 더구나 해외에서는 더더욱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래서 오랜 고민 끝에, 인테리어 회사를 운영하는 제자에게 ‘마치’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습니다.
“혹시, 쉬엄쉬엄 할 수 있는 일 없을까? 집에만 있으니 몸이 불편해. 운동 삼아 할 수 있는 거 있으면 알려 주게.”
실은 이 말을 꺼내기까지 몇 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소심하거나 내향적이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 건 전혀 관계없습니다. 이건 스스로에게조차 말하기 어려운 떨림과 망설임, 그리고 ‘차라리’, ‘내가 뭐가 아쉬워서’ 같은 수십 가지 자기 변론과 체면, 그리고 조금은 흐트러지는 자존감이 뒤섞인 감정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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