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의 역설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자유로워질 거라는 믿음과 달리, 현대인은 도리어 '결정의 무력감'에 빠지곤 합니다. 기록은 넘쳐나지만 기억은 희미해지는 일상의 풍경을 통해, 우리가 놓치고 있는 진정한 가치를 돌아봅니다.
망설임이 빚어낸 찬란한 찰나
초등학교 5학년, 아버지께서 어느날 저에게 조금은 오래된 카메라 한 대를 주셨습니다. 처음으로 카메라를 손에 쥐었을 때의 흥분을 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설렘 뒤에는 묘한 중압감이 따랐습니다. 초등학생에게 필름 한 통 값은 결코 가볍지 않은 비용이었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찍지도 못하면서 셔터를 아무렇게나 눌렀다가 소중한 필름을 망치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에, 렌즈 너머 세상을 한참이나 바라보고서야 조심스레 셔터를 누르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시대가 너무도 달라졌습니다. 누구나 스마트폰에 장착된 고성능 카메라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필름 한 통의 무게 대신 무한한 클라우드 용량을 누립니다. 인화를 기다리던 시간은 사라졌고, 보정과 편집은 스마트폰 안에서 실시간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 모든 편리함 속에서, 우리는 정작 무언가를 조금씩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추억을 남기기보다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여행을 떠나면 풍경보다 먼저 카메라를 들고, 감탄보다 먼저 셔터를 누릅니다. 그러다 보니 프레임 속의 풍경은 박제가 되어 남지만, 그 프레임 밖의 공기, 냄새, 온도는 가물가물해집니다. 기록은 풍요로워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기억은 오히려 희미해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추억을 가슴에 새기는 대신, 기억할 일을 기계에 '대리 저장'해두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홍게 더미 앞에서 길을 잃다
이러한 풍요의 역설은 삶의 모든 영역에 침투해 있습니다. 지난 겨울, 일본 여행 중 온천에서 겪은 일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뜨거운 온천물에 몸을 녹이고 호텔 식당 문을 연 순간, 제 입에선 "와!"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산더미처럼 쌓인 홍게, 화려한 스시, 일식 요리 박람회를 방불케 하는 음식들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중식, 양식, 한식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음식의 바다였습니다. 아이들은 이미 다양한 색상의 아이스크림 냉장고 앞에 마음을 빼앗긴 상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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