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들 사이에서 사라진 ‘나’를 찾아서
※ 본 싱코그래피의 주제어는 ‘킨츠기(Kintsugi, 金継ぎ)’입니다. 이 글의 사유가 머무는 하나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처음으로 ‘아빠’라고 부르던 날, 이상하게도 눈물이 났다. 기뻤다. 하지만 그 눈물의 의미가 기쁨이었는지, 아니면 그 순간 무언가가 끝났음을 직감했던 것인지 지금도 확실히 알지 못한다. 그날 이후로 나는 아이 이름이 앞에 붙은 ‘아무개 아빠’가 되었고, 회사에서는 ‘아무개 대리’가 되었으며, 집에서는 아내의 ‘여보’가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거울 앞에 서서 조금은 엉뚱한 생각에 빠졌다.
“이 사람, 도대체 누구야?”
무언가 잃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실에는 여러 얼굴이 있다. 사람을 잃는 것, 꿈을 잃는 것. 그러나 가장 조용하고 가장 오래 지속되는 상실은, 어쩌면 ‘자신’을 잃는 일인지도 모른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직장에 매달리는 사이, 나는 ‘나’를 잃어 가는 건가? 서서히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 역할이라는 이름의 껍데기만 남기고.
역할의 감옥, 혹은 역할의 보호막
처음에는 달콤했다. 누군가의 남편이 된다는 것, 누군가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 그것은 일종의 소속감이었고, 성숙함의 완결이었고, 존재의 이유였다. 삶이 갑자기 뚜렷한 좌표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일어나야 할 이유, 늦게까지 일해야 할 이유, 이를 악물어야 할 이유. 역할은 우리에게 방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방향이 보이지 않는 감옥처럼 조금씩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퇴근 후 혼자만의 시간을 원한다는 것이 죄스럽게 느껴지고, 아이와 놀아 주면서도 머릿속은 어제의 보고서로 가득하고, 직장생활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퇴근 후 가사를 돌보는 아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개는 끄덕이지만 정작 내 안의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꺼낼 수가 없다.
감정이 있어도, 피곤함이 있어도, 두려움이 있어도 ‘가장’은, ‘직장인’은, ‘아빠’는 그런 감정을 가져선 안 된다는 묵묵한 압력이 늘 어깨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프로이트가 말한 ‘우울(Melancholia)’은 자아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결핍 상태를 가리킨다. 거창한 사건이 아니어도 된다. 좋아하던 음악을 오랫동안 듣지 않게 되었을 때, 읽고 싶었던 책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책장 구석에 꽂혀 있을 때, 더 이상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게 되었을 때. 바로 그 순간 우리의 자아는 소리 없이 상실된다.
이름 없는 고통에 이름을 붙이는 일
이 상실이 힘든 이유는 그것이 너무나 우리네 일상 속에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잃었을 때 우리는 슬퍼할 ‘이유’가 있다. 그러나 ‘나’를 잃었을 때 우리는 종종 슬퍼할 자격조차 없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다들 이렇게 사는데’, ‘나만 힘든 것도 아닌데’, ‘이 정도 가지고 불만이라고?’라는 내면의 검열이 먼저 작동한다.
“어떡하나? 그냥 입만 다물면 상처가 저절로 나아지는가. 곪아서 터지면 어떡하나?”
언젠가 브런치에서 어느 작가의 글을 읽다 남은 깊은 인상.
“우리에게는 사유(思惟)가 필요하다. 사유란 거창한 철학적 사색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자신에게 솔직한 질문을 던지는 행위다.”
갑자기 이 구절이 생각나며 고개가 끄덕여진다.
“나는 요즘 어떤가?”
“나는 무엇이 그리운가?”
“나는 언제 마지막으로 나였는가?”
막연한 공허함에 언어를 부여하는 순간 무언가가 달라진다. ‘왜인지 모르게 지친다’가 ‘나는 오랫동안 아무것도 나를 위해 하지 않았다’로 바뀌는 그 순간. 이름 없는 괴물은 공포의 대상이지만 이름 붙여진 감정은 다룰 수 있는 대상이 된다. 날카로운 유리 파편조차 흐르는 물에 오랫동안 씻기면 둥근 조약돌처럼 변하듯이, 언어화된 고통은 어느 순간 손으로 느낄 수 있는 감각이 될 수 있음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사라진 나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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