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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담 Oct 31. 2023

[독서후기]무라카미 하루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현실과 비현실은 구분되는가

  이십대 하루키가 재즈카페를 경영하는 겸업 초짜 작가시절 쓴 소설을 40년이나 지나 일흔의 기성작가가 되어 완성한 소설이라는 것으로도 이미 읽을 이유는 충분했다. 벽돌 크기의 700쪽이 넘는 분량이라 하더라도. 한 작가가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는 스토리의 큰 줄기는 몇 되지 않는다는 작가의 후기 말을 보더라도 이 소설은 하루키 소설의 여기저기와 꽤 닮아 있다. 묵혀 두었던 서사를 완성해 낸 그는 홀가분하다고 하나, 읽는 독자 입장에서는 꽤나 어려운 도전이고 읽고 나서도 쉽지 않은 과제를 남기는 책이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그저 그런듯 변화를 잘은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곳은 진정 실체로서 내가 살고 있는게 맞는가, 혹여 나의 실체는 어딘가 다른 곳에 존재하고 있고 나는 그저 그림자에 불과하진 않은가. 의식 속의 나와 나의 의지는 같은 삶을 살고 있는가. 혹 의지와 다른 스쳐가는 숨결 같은 허상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가. 이 세계 외 또다른 세계가 존재하지는 않을까. 적어도 의식 속에서라도. 그 곳에서 나는 내가 원하던 모습으로, 원하는 일을 하며 살고 있지 않을까. 과연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맞는가.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 이들의 아쉬운 영혼이 천국으로 가지 못하고 떠돌지는 않을까. 때론 깊이 공감하는 이들에게 그 모습을 보이기도 하면서.


  이런 수많은 질문들은 평소에 지니기도 했고, 하루키의 신작을 통해 더욱 명료해지기도 했다. 어느 누구도 현답을 내놓을 수 없는 질문들이나, 짧은 생을 살아내는 우리에게 꽤 깊이 있는 울림을 준다.

 하루키다움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이 소설은 곳곳에 그다움을 싣고 있다. 항상 그의 소설이 녹아 있는 재즈 음악과 클래식의 배경이나 심리와 적절한 조화된 전개, 다소 적나라했던 그의 사랑 행위 묘사는 자제되어 있으나 충분히 직설적이었다. 의식의 흐름대로 전개되는 주인공의 소년시절과 장년시절의 솔직한 내면의 소리들을 좇다보면 어느새 끝이 보인다.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 결말이라 더욱 좋았다. 긴 글을 읽었음에도 책을 바로 덮기보다  계속 그를 찾고 생각하게 되는 여운이 깊다.


  열일곱 소년과 열여섯 소녀의 사고 속에서 만들어진 세계, 불확실한 벽으로 둘러싸인 의문의 세계, 강력한 의지로 반드시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만 허락된 또 다른 도시 세계 이야기이다. 한곳 뿐인 출입구를 지키는 험악한 문지기와, 추운 겨울 겨우 살아내다 쓰러져 죽으면 웅덩이에 버려져 태워지는 단각수들,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과 앞만 보고 걷는 주민들, 바늘 없는 시계탑과 흐르지 않는 시간, 책이 없는 도서관과 그곳에서 일하는 어린 소녀와 오래된 꿈을 읽는 소년과  잘라버린 그의 그림자, 때때로 움직이는 도시의 벽. 왜 이런 세계를 만드었는지 두 아이들의 삶에 연민도 느껴지고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되기도 했으나 결국 현실 세계로 돌아가기로 결심하는 소년처럼 다시 주위 사람들과 어울려 다양한 감정들을 공유하며 살아가기를 바랐다.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했던 소녀가 하루 아침 사라진 후, 소년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그저 살아가다 결국 함께 만든 세계로 이동한다. 그곳에서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소녀와 재회한다. 그림자를 몸에서 분리시킨 후, 돌아가지 않으면 곧 사라질 그림자를 두고 갈등한다.


  "당신은 나와 다시한번 하나가 되어 벽 바깥의 세계로 돌아가야 해요. 내가 여기서 죽고 싶지 않아 이러는 게 아니에요. 당신을 생각해서 하는 말입니다. 정말로, 거짓이 아니에요. 들어 보세요. 내가 보기엔 저쪽이야말로 진짜 세계입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고생하고 나이 들고 쇠약해져 죽어가요. 물론 썩 재미있는 일은 아니죠. 하지만 세상이란 원래 그런 것 아닌가요. 그 과정을 이어가는 게 순리입니다. 나 또한 미흡하게나마 그에 따르고 있고요. 시간은 멈출 수 없고 죽은 것은 영원히 죽은 겁니다. 사라진 것은 영원히 사라진 겁니다.그런 현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어요."   P-153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죽은 시골 도서관 관장 고야스 씨의 유령과 중년의 주인공과의 교우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의 삶도 평탄치는 않았으니, 죽음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리라.


"성경 시편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람은 한낱 숨결에 지나지 않는것, 한평생이래야 지나가는 그림자입니다. 인간이란 숨결처럼 덧없는 존재이고, 살면서 영위하는 나날도 지나가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그 의미를 진심으로 이해한 것은 죽어서 이런 몸이 되고서였습니다. 우리 인간은 그저 숨결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죽어버린 제게는 이미 그림자조차 달려 있지 않습니다."  -358~359


티없이 순수한 사랑을 한번 맛본 사람은, 말하자면 마음의 일부가 뜨거운 빛에 노출된 셈입니다. 타버렸다고 봐도 되겠지요. 더욱이 그 사랑이 어떤 이유로 도중에 뚝 끊겨버린 경우라면요. 그런 사랑은 본인에게 둘도 없는 행복인 동시에, 어찌보면 성가신 저주이기도 합니다.    - P449


지금 여기서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믿는 마음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강하고 깊게 믿울 수 있으면 아마 갈 길은 절로 뚜렷해집니다. 그럼으로써 이다음에 올 격렬한 낙하를 막을 수 있을 겁니다. 혹은 그 충격을 크게 누그러뜨리거나요.   -P452


  간절히 원하는 자에게는 결국 또 다른 세계가 열리지 않을까. 같은 공간에 있다하나 벽 속에 있는 듯 다른 이들을 가끔 보지 않는가. 그들은 그 세계에서 잠시일지 오래일지 그들의 시간대로 의식이 흘러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또 문득 자각하여 이 세계로 돌아올 것이고. 그러니 그 벽은 불확실하고도 움직이는 벽으로 둘러싸인 세계이지 않을까. 우리들의 의식에서 만들고 또 우리들의 의지로 드나들수 있는 세계.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닌가? 아니, 애당초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짓는 벽 같은 것이 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가? 벽은 존재할지도 모른다. 라고 나는 생걱한다. 아니,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벽이다. 경우에 따라, 상대에 따라 견고함을 달리하고 헝상을 바꿔나간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 P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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