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한편] 가을에 읊는 詩 <목마와 숙녀>박인환
가을 타나보다. 깊어가는 11월의 가을만큼 저녁놀도 짙어지고, 거리 가득 낙엽향이 코 끝을 자극하는 계절이 왔다. 괜스레 낙엽을 바스락 밟아보고, 더 없이 높아져 버린 파란 하늘을 훔쳐본다.
이 즈음 또 읊조리게 되는 시가 있으니, 영원한 댄디보이 모더니즘의 대표 시인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이다. 만 30살의 짧은 생을 사는 동안 그가 보았던 가을을 같이 느껴본다.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겪은 문학청년으로 시대적 우울과 페시미즘을 이보다 잘 표현할 수 있을까. 그의 정서는 이 가을이 되면 온 천지의 낙엽과 술잔 속에 가득하다.
더 늦기 전에 그가 태어난 곳, 그의 문학관이 있는 강원도 인제를 가고싶다.
호젓한 그곳에서 <마리서사>라는 책방이라도 만나면 좋겠다.
자작나무 낙엽진 벤치에 앉아 버지니아 울프 책이라도 읽으며 그녀를 추억해야지.
아니, 별빛 받은 술 한잔이라도 해야지.
목마와 숙녀 (1955)
-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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