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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우했던 고려 천재 시인 정지상

by 다담

'시를 쓴다'는 것과 '시를 가르친다'는 것은 참 다르다. 어느 강연에서 교과서에 본인의 시가 수록되어 어린 학생들이 배운다기에 서점에서 참고서를 구입해 문제를 풀어봤는데, 시인의 창작 의도를 묻는 문제를 틀렸다는 안도현 시인의 씁쓸한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쓴 사람의 의도를 잘못 가르치고 있는건 아닌지 깊이 반성하게 하는 이야기였다.


나역시 시를 쓰는 재주는 없으나 지금까지 수업이라는 틀로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치고 있다. 평생 유일한 직업이다보니, 시를 접하면 거의 분석적 사고가 발동하여 시의 갈래니, 표현상의 특징이니 작가의 창작 의도를 짐작하려는 나를 본다. 모든 시에 해설서가 있지는 않고 있다한들 극히 단편적인 지식들의 나열이라 늘상 부족함을 느꼈다. 학부 시절 국어학을 전공했으니, 더욱 그러하지싶어 국문학 석사 과정을 수료해도 나의 부족한 노력 탓인지 별 만족감을 채우지 못했다. 결국 한 분 한 분 내 스스로 알아가는 노력이 필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교과서에 늘상 수록되는 작가와 작품들 역시 그 하나로 한 단원에서 단편적으로 배우고 넘겨 버리는 수업은 내 스스로 아까웠다. 한 시대를, 한 인간으로 산 작가의 삶도 궁금하고 온 삶을 담은 시 역시 제대로 알고 싶은 정말 순수한 앎의 호기심이 자꾸 발동했다. 다행으로 디지털 시대에 온갖 자료들은 무궁무진했다. 읽지 못했던 도서들도, 듣지 못했던 감동적 강연들도 뒤늦게 접하면서 나를 기쁘게 했다. 아마도 교단을 떠나서도 이 일은 계속 하리라 여겨진다.


'우리 문학의 빛깔'이 단원이 되거나, 문학사를 수업하게 되면 여지없이 교과서적인 우리 고유 문학의 전통적 정서라며 '이별의 정한'을 언급한다. 그리고 뒤 이어 그 연원을 거슬러 고조선 시대로 추정되는 <#공무도하가-임아 강을 건너지 마오>부터 주몽의 아들인 고구려 2대왕인 유리왕의 <#황조가>부터 시작한다. 전해지는 설화가 있으니 아이들이 참 좋아한다. 역사도 스토리텔링으로 다가가면 아이들의 흥미 끌기에 충분함을 수업할 때마다 느낀다.

이 계보는 현대시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까지 이어지면서 보충 자료로 고려 시대 속요로 <#가시리>가 들어가고 한시로 정지상의 <#송인(送人)>이 첨부된다.


이 시는 고려시대 시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개경에 가서 유학하기 이전 평양에 살 때 지은 작품이며, 송별시로 당대에 벌써 애송되었다 한다. 이 시가 걸려 있다는 대동강 부벽루를 언젠가는 갈 수 있을까.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채제초색다)

비 갠 긴 둑엔 풀빛이 짙어 가는데

送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

남포에서 임 보내며 슬픈 노래 부르네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

대동강 물은 어느 때 마르려는지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

해마다 이별 눈물 푸른 강물에 더해지네


- 당대 권문세력가 척준경을 탄핵하여 유배 보낸 담대한 관료인 정지상이 쓴 이 시는 너무나도 서정적이고 애절하다 못해 대동강가에서 눈물 짓는그 여인을 달래주고 싶어진다.

이 시를 쓴 작가로서 정지상이 너무나 궁금해지는 건 당연했다.

서경(현 평양) 출신의 그는 당시 수도인 개경에서 유학을 했으나, 고향 서경을 사랑했다. <#서도>라는 그의 시에 묘사된 서경은 참 아름답다. 봄비가 촉촉이 내린 번화한 서경 거리와 버들가지 휘늘어진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듯 그리고 있다.

번화한 거리 봄바람에 보슬비 지나간 뒤

가벼운 티끌조차 일지 않고 버들개지만 휘늘어졌다

푸른 창 붉은 문에 흐느끼는 노랫가락

이 모두 다 이원(梨園)의 제자 집이라네

시인으로서 그의 천재성은 이미 5세에 강 위에 뜬 오리를 보고, "어느 누가 흰 붓을 가지고 乙(을) 자를 강물에 썼는고."라는 시를 지었다 하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뛰어 났다고 한다. 고려사 열전에도 빠진 그는 출생에 대한 기록도 없을 뿐더러 친척들도 뿔뿔이 흩어져 사는 가난한 집안의 홀어머니 아래 성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총기는 그를 단번에 과거에 장원급제 시켰으며, 관료로서 삶을 시작하게 한다.그러나 그의 관료로서의 삶보다는 시인으로서의 능력이 더욱 부럽다.

당대 사람들에게 '대동강'을 이별의 장소로 확대시켜 준 그의 다른 시를 보자.

또 다른 <#송인(送人)>이란 제목의 이 시는 남편을 멀리 떠나보내고 홀로 남아 그 남편을 그리워하는 아내의 심정을 읊은 시이다.


庭前一葉落(정전일엽락)

뜰 앞에 한 잎 떨어지자

床下百蟲悲(상하백충비)

평상 밑 온갖 벌레 슬피 운다오.

忽忽不可止(홀홀불가지)

갑자기 떠남을 말릴 수 없지만

悠悠何所之(유유하소지)

하염없이 어디로 가시는게요.

片心山盡處(편심산진처)

산이 끝난 곳에는 한 조각 마음

孤夢月明時(고몽월명시)

달 밝을 땐 외로운 꿈에 잠긴다오.

南浦春波綠(남포춘파록)

남포에 봄 물결 푸르러지면

君休負後期(군휴부후기)

그대여 뒷기약 어기지 마시오.


- 낙엽지고 풀벌레 우는 쓸쓸한 달밤에 갑자기 떠난 임을 기다리는 여인의 그리움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정지상의 불우한 삶의 정점은 아마도 평생 숙적 김부식과의 교우이지 않을까. 당대 개경의 최고 권력가이자 글도 제법 쓴다는 김부식에게 문자 관계로 열등감을 안겨 준 그를 곱게 보진 않았을 것이다. 서경을 사랑하는 그가 묘청과 어울렸다는 이유로 그를 묘청의 난에 연루시켜 임금의 허가도 없는 단독 결정으로 그를 제거해 버린다. 인간의 컴플렉스의 위해성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그리하여 출생연도를 모르는 그는 사망연도만 확실한 웃픈 사람이 된 것이다. 허나 그는 죽어서도 김부식의 콧대를 눌러버리는 여담을 남겼으니, 이규보의 <백운소설>에 전해 온다.

정지상이 죽은 후의 어느 날 김부식은 <봄>이라는 주제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고 한다.


柳色千絲綠

버들빛은 일천 가닥 푸르고

桃花萬點紅

복사꽃은 일만 점이 붉구나

그런데 갑자기 공중에서 정지상 귀신이 나타나더니 김부식의 뺨을 때리며 "버들가지가 천 가닥인지 복사꽃이 만 송이인지 세어 보는 미친 놈이 어딨냐? 왜 이렇게 못 짓느냐?"라며 자신이 김부식이 지은 시를 고쳤다는 것이다.


柳色絲絲綠

버들 빛은 실실이 푸르고

桃花點點紅

복사꽃은 점점이 붉구나


한 글자씩 바꿔 놓았으나 시의 품격도 높아지고 '사사, 점점' 동음 반복으로 입에 달라붙듯 읽기도 좋다. 역시 시를 두고 김부식은 정지상에게 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부식은 더욱 마음 속으로 지상을 미워하였을 것이다.


타고난 천재성을 지녔으나, 그 천재성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불우한 정지상을 추모하며 더욱 정성을 다해 그의 시를 아이들에게 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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