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에는 큰 관심이 없는 편이지만, 이쁜 그릇에는 꽤 집착한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별 솜씨 없는 요리라도 그 요리를 최고의 작품으로 마무리하는 것은 결국 어떤 그릇에 어떻게 담아 내느냐에 크게 의존한다. 결혼할 당시 그 때 유행이라던 잘 깨지지 않는 세라믹 그릇을 세트별로 왕창 산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물론 아무 것도 모르는 나를 대신한 엄마의 적극적인 관여이자 일방적 결정이었다. 똑 같은 무늬의 세트 그릇은 금방 질리게 만들었고, 실용성 위주의 그릇들은 예쁘지도 않았다. 그 후 제각각일지언정 하나하나 발품 팔아 사 모은 그릇들은 장식장에 전시한다. 보는 것으로도 미소 짓게 하는 예술 감상품인 것이다. 때로는 문화센터 도예반 수강에서 직접 빚은 내 이름자 새긴 그릇에 솜씨는 없으나 내 요리를 담으면 그냥 뿌듯하다. 그러하니 예전 그릇들은 상자에 담아 창고행이었다가 이사 몇 번에 어디서 유실되었는지 기억에서 사라졌다.
음식을 담다 보면, 분명 그릇은 예뻤으나, 과한 욕심으로 음식을 너무 수북히 쌓는 바람에 원래 그릇은 감춰져 잘 보이지도 않을 때가 있다. 조금씩 음식이 줄어들기 시작하면 그제서야 그릇의 원모습이 드러나고, 그 그릇을 살 때의 행복감을 떠올리며 미소 짓기도 한다. 그러나 이미 배는 부른 상태여서 그릇의 만족도는 시기를 놓친 뒤이다. 음식도 남기고 그릇도 제 역할을 못 본 낭패의 경우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릇은 크고 테두리 문양도 독특하여 인상적이나, 음식은 볼품 없고 그릇과 어울리지도 않는 경우가 있다. 남의 옷을 얻어 입은 듯 겉돌아 음식이 더 초라하다. 예술인 양 눈속임의 데코레이팅을 한 것으로 보기에도 조잡하다. 차라리 그릇 가득 풍성하게 음식을 담아 식욕을 자극하는 편이 더 나을 뻔했다. 그릇이 아까운 경우이다.
이렇듯 요리 하나조차도 쉽지 않다. 재료의 선택부터 다듬고 만드는 과정의 노고도 물론 중요하지만, 마무리로 식탁에 오르기 전 적합한 그릇에 담아내는 행위는 또 다른 예술이라 볼 수 있다. 미식가도 탐식가도 아니나, 우연히 들른 식당의 그릇이 요리와 안성맞춤으로 잘 맞은 날은 그저 기분이 좋아진다. 이렇듯 조화가 필요치 않은 곳이 있겠냐마는 그릇과 음식에서도 요구된다.
흔히들 사람을 그릇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사람마다 제 각각의 크기는 다르다고 한다. 어느 누구는 간장 종지만한 그릇일 뿐이고, 어느 누구는 대접만한 그릇이라고 한다. 본인은 물론 다른 사람을 포용할 만한 그릇이 되냐마냐로 인격을 논하기도 한다. 과연 일상적인 삶에서는 그 크기를 잘 인지하지 못하나, 시련에 맞닥뜨리면 여지 없이 본인의 그릇 크기는 탄로 난다. 콩알만 한 간만큼이나 작은 그릇의 주인은 자기 안위를 보살피기에도 정신이 없어 타인이나 국가니 민족이니 인류를 담을 수 없다. 이미 꽉 차버린 그릇의 용량은 본인 외의 것은 그저 바깥으로 흘러 넘칠 뿐이다. 그러나 태평양 같은 너른 그릇의 주인은 본인의 이익이야 저 그릇 밑바닥에 깔아두고 그 위로 대의를 내세우며 인류 보편적인 정의와 옳음을 가득 채우고도 여유가 있다.
단지 그릇의 크기뿐이랴. 내가 중요시하는 그릇의 빛깔과 모양도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사람마다 다른 모양과 문양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안에 담는 내용물과의 조화로 그 가치를 드러낸다. 뛰어난 외양을 감사하게도 지니고 있을지언정, 그 안에 오물을 담으면 그저 쓰레기통이 되는 것이다. 그 그릇만 화려하게 꾸며져 있으면 결국 식탁 위의 독불장군마냥 도드라져 어울리지 않으며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러나 소박하고 단아한 백자는 그 어떤 요리와도 어루러져 본인은 낮추고 요리를 두드러지게 한다. 참으로 오묘한 삶의 이치가 느껴진다.
저믈어가는 해걸음에 나는 과연 어떤 그릇으로 완성되어 가는지 돌아본다.
그대는 어떠한지요?
어떤 그릇이 되고 싶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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