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고 그리운 친구

-잊지못할 벚꽃연가

by 다담

아픔으로, 꺼낼 수 없어 꼭꼭 숨겨둔 봄날의 추억을 회상하며...용기를 내본다.


온 누리가 새잎으로 고개 내미는 봄날.

연두라는 이름도, 신록이라는 이름도 듣는 것만으로도 설렘을 준다.

녹음으로 성장하기 전, 긴 겨울을 아프게 이겨낸 뒤 다시 시작하는 이의 어설프나 씩씩한 시작을 보는 흐뭇함이 있다. 그래서 신록의 계절, 오월을 가장 좋아한다. 오월이 되면 그저 초록 세상에 속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한다. 달리는 차 안에서라도 초록으로 번지는 산을 보고 싶고, 이왕이면 그 속에서 같이 숨 쉬고 싶어서 그렇게 나들이를 하게 되는 계절이다. 일 년 중 가장 행복을 느끼는 달이나, 신록은 아쉽게도 짧다. 일상에 쫓겨 며칠을 놓치면 짙은 녹음으로 이미 성장해 버린 숲이 무안하게 느껴질 때도 많았다. 그도 그 나름의 매력은 있으나, 다독여 주고 쓰다듬어 주고픈 신록일 때 더 행복하다.


올해는 유달리 따뜻한 기후 탓에 봄꽃 개화 시기가 보름 가까이 빨랐다. 며칠의 꽃샘추위 후 이어진 초여름 같은 더위에 서둘러 만개해 버린 봄꽃에 봄은 갑자기 찾아왔다. 달맞이길의 개나리가 만개할 즈음 아직 겨울옷 정리도 못 했는데, 채 며칠 지나지 않아 파릇 싹이 나더니 이웃 벚나무들을 깨웠다. 그 긴 달맞이길이 온통 분홍 벚꽃으로 뒤덮여 꽃터널을 이루었다. 연일 늘어나는 확진자에 모든 꽃축제는 취소되어도 마스크 쓴 춘상객으로 거리는 사람으로, 차로 붐볐다. 지친 긴 겨울 끝에 꽃이 주는 위안이라도 받으려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듯 꽃은 그저 감탄을 쏟게 할 만큼 매력적이다.


기쁨은 짧고 슬픔은 길다고 했던가. 며칠의 화려한 개화도 강풍을 동반한 제법 많은 양의 봄비에 붉은 꽃대는 아직 매달린 채 꽃잎들만 바닥으로 추락하여 분홍 융단으로 깔리고 말았다. 결국 4월의 경주 벚꽃 완상은 날씨는 초겨울마냥 온기 없고, 벚꽃은 이미 떨어져 바닥에 깔려 뒹구는 희한한 나들이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좁은 땅덩어리의 나라이나, 남쪽 지방부터 차츰 개화가 위로 번져 가는 순리를 어기고, 올해는 이른 개화와 이른 더위에 거의 비슷한 시기에 온 나라가 일찍 봄꽃을 맞았고, 또 일찍 봄꽃과 작별했다.

그렇게 5월의 신록도 다급하게 4월의 신록으로 성큼 다가왔다. 막 새싹이 난 연두 잎을 단 버드나무가 잔잔한 호수 바람에 살랑이는 4월의 첫 주말이었다. 삼삼오오 나들이객들의 여유로움은 마스크 낀 얼굴 너머로도 보였다. 이미 분분히 낙화해 버리고 어린 초록 싹을 띄운 벚나무들이지만, 다소 외진 곳 음지에는 아직 만개한 벚나무가 바람에 벚꽃잎을 살랑이고 있었다.


“아직 벚꽃이 남아 있네”라며 소녀처럼 친구가 웃는다. 올해는 개화가 빨라서 벚꽃을 놓친 줄 알았는데 어쩜 하나님 곁으로 가기 전 마지막 선물로 봄꽃을 보려나보다며 기뻐한 친구는 3월을 오롯이 병실에서 생사를 넘나들었다. 양쪽 친구의 부축을 받으며 느리게 걸으면서도 늦게나마 벚꽃을 봐서 너무 기쁘다는 친구는 마른 풀잎 같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더도 말고 일 년만 더 살아서 내년에도 봄꽃을 보고 싶다는 친구의 소원이 이뤄지길 간절히 빌었던 아픈 봄나들이였다.


십여 년을 암과 투쟁 중인 친구는 한 달의 반을 병실에서 보내야만 한다. 그것도 제대로 듣는 항암약이 있으면 다행이나 이젠 그마저 없다는 그녀는 “내 몸 구석구석 암세포 없는 곳이 없어.”라며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며 삶의 끈을 부여잡고 있다. 부산에서 같은 아파트 옆집 인연으로 맺어진 한 살 어린 이웃 친구는 나보다 더 현실적 안목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감성도 풍부하여 늘 풍부한 화젯거리를 주는 대학 강사 엘리트 워킹맘이었다. 자녀 교육에 관한 정보며, 재테크 정보 등 모르는 게 없었다. 두 집 모두 남편이 늦는다는 저녁엔 같이 자장면에 탕수육 시켜 애들 실컷 먹게 하고 우리 둘은 온갖 수다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유쾌한 시간들을 보내곤 했다. 아들 둘을 키우면서도 큰소리 내지 않고 끝까지 아들들과 대화를 시도하며 바른 육아의 길을 고민하는 친구였지만, 결국 암세포는 이기지 못하고 주말 부부 생활을 청산한 후 남편 직장이 있는 용인으로 이사를 갔다. 그래도 계절별로 일 년에 3~4번은 만나 회포를 푸는 장거리 우정이 지속되었다. 국내에선 효과를 보는 항암약이 없어서 일본에서 값비싼 약을 수입해서 먹어도 보고, 신약 실험군으로 신청해서 치료하는 한 해 두 해 동안 친구는 점점 말라갔고, 만남은 소원해졌다.


어느 날 문득 톡이 아니라 병원에서 직접 전화가 왔다. “날 보러 올라와~ 꼭” 한 번도 떼쓰지 않은 친구의 요청은 심장을 덜컥 깊은 바닥까지 떨어뜨렸으나, 밝은 목소리에 이유조차 묻지 않고 약속을 잡았고 그렇게 4월 이른 신록의 계절에 만났다. 5분을 채 걷지 못하고 쉬어야 하는 기력이나 더 맑고 커진 눈망울로 반가워하며 “내가 넘 떼 썼지? 보고 싶었어.”라며 예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아픈 1박 2일 봄나들이를 했었다.


그 후 어느 이른 저녁이었다. 퇴근 후 저녁 끼니를 해결하면 그래도 나만의 온전한 시간을 보내며 하루 직장에서의 피곤 풀려고 한다. 낮의 피곤을 미뤘던 책을 읽으며 음악과 함께 느긋이 풀어져 있을 즈음, 카톡이 연달아 울린다. 친구의 톡이다. "이제 나는 자유다~ 항암 끝~~!!" 어? 하는 의문으로 정신이 번뜩 들어 읽고 있는데, 뒤이어 "의사가 날 버렸어......먼저 천국 갈 것 같아......미안해ㅠㅠ" 라는 결국 듣고만 말들. 거의 누워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으나 바로 답장을 할 수 없었다. 되도록 담담하게, 나의 슬퍼하는 맘이 격하게 전달되지 않으려 노력하며 아직은 내 곁에 더 있어 달라며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부탁을 했다. 어찌될 줄 모르니 미리 인사한다는 친구는 그동안 더 사랑해 주지 못해 줘서 미안하다는 인사로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볼 거라고 약속했고 차마 젖은 목소리를 들을 용기가 없어서 톡으로만 마무리를 했다. 그 뒤 친구는 더 자주 ‘굿모닝’ 인사며 ‘잘자’라는 인사를 한다. 난 그저 예쁜 봄 사진을 보내며 친구에게 삶의 끈을 이어가라는 무언의 힘을 건넨다.


코로나 이후 더욱 헌혈 수는 줄고 수혈 인구는 더 늘어 혈액이 부족하다는 뉴스를 접했던 터라, 학교서 실시하는 헌혈에 반 학생들이 적극적 나서주기를 조례 시간 당부했다. 봉사 점수가 아닌, 마음으로 동참하기를 바라며, 조그만 도움이 큰 결실을 이룰 수 있음을 전했다. 그래도 나이며 건강 상태 등 이런저런 조건이 안되는 학생 외 제법 자발적으로 양호실을 찾는 애들이 기특하여 응원차 방문하여 칭찬을 전했다. 작년에 이어 그래도 우리 반 학생들의 참여율이 제일 높아 담임으로 뿌듯했다. 종례 시간, 잠깐 틈을 내서 "다들 헌혈하니 어땠니? 오늘의 느낌을 잊지 말고 늘 봉사하는 마음 가지도록~!"하고 끝내야 했는데, 참지 못하고 "선생님 친구 중에 항암 치료를 오래 받고 있는 친구는 수혈을 자주 해야 해....근데 요즘..."이라며 채 말을 끝내지도 않았는데 "선생님, 이거요~~!!"하며 몇몇 친구가 헌혈 증서를 들고 와선 건넨다. 평소 말썽꾸러기로 두통을 유발했던 남학생도 벌떡 일어나 덩달아 자기 것도 전해달라는 그 밝은 미소는 아직도 생각만으로 흐뭇하다. 누가 이런 아이들의 미래를 그저 성적만으로 판단하고 혀를 찰 수 있을까. 작은 네모 헌혈 증서로 그날 우리 반 온도는 충분히 따뜻했고 세상도 그만큼 데워졌다고 믿는다.


붉은 혈액 속 감염체 면역 기능을 담당하는 백혈구와 지혈을 담당하는 혈소판의 중요성을 알고는 있으나 생활에서 인지하며 살지는 않는다. 때 이른 4월의 신록을 맞아, 호숫가에서 만난 친구가 혈소판 수치가 30이 안된다는 말도 백혈구가 거의 없다는 말도 실감 나지 않았다. 계속 오르지 않는 수치를 위해 수혈을 무리하게 하다 아나팔락시스가 와서 생사를 몇 번이나 오갔다는 말조차 밥 먹다 체했다는 말 정도를 가볍게 전하니...그저 듣기만 했다. 그날 저녁 같이 잠자리에 들기 전, 오늘의 만남 직전까지 병원 퇴원이 결정되지 않아 조바심이 났나는 얘기와, 알레르기로 밤새 고열로 냉찜질을 했던 고통, 결국 심정지가 왔던 위급 상황까지 전하며, 너무 힘들어 그만 살고 싶다는 말을 끝내 하고 돌아누웠고 나 역시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에 친구는 생의 끈을 놓고 싶었단다. 그리고 의사에게도 떼 쓰듯 부탁하여 마지막 힘겨운 봄나들이에 나선 것이었다. 마지막임을 예감했을까.


"죽음이 우리에게 미소로 다가오면, 미소로 답하라"라고 말하는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명상록>을 읽으며, 지나온 날을 헤아리지 말며 그 짧음을 한탄하지 말며, 우리를 데려온 것이 자연이니 돌아가라는 그의 말처럼 죽음에 미소로 답해야지. 구차해지지 않으리라 오만하게 생각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100세 인생에 아프게 오래 사느니 짧고 굵게 살다가 가리라는 그 생각들은 얼마나 오만하고 겁 없는 자만인가. 배우가 연출가의 명에 따라 무대를 떠나듯이 내 인생을 5막이라고 우기지 말며, 원래 신의 소관으로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니 내 삶은 3막이라 받아들이라 했다. 그러나 정작 내 삶이 정말 3막이고 이제 2막이 끝나감을 알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 누구가 태연하리. 남은 생의 시간을 짐작할 수 있다는 그 두려운 예측 앞에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인생 연극을 잘 마무리할 수 있을까. 혹은 곧 무대를 떠날 배우를 지켜보는, 남은 또 다른 배우는 어떻게 그를 보내 주어야 하는 것인가. 이래저래 아픈 사념만 늘어가는 봄날이었다.


그렇게 친구의 굿모닝 인사를 더 받고 싶고 나는 이쁜 사진을 보낼 수 있기를 바랐다.

같이 늦은 벚꽃을 본 지 두 달도 지나지 않아 친구의 톡으로 남편이 보낸 부고 소식을 받았다. 그렇게 친구는 서둘러 별이 되어 곁을 떠났다. 이제 벚꽃을 보면 마냥 기뻐할 수 없을 것같다. 친구의 커다란 눈망울과 맑은 미소가 아프게 생각나는 벚꽃연가가 돼 버렸다.

그립고 그리운 친구,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