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퇴근 운전 중 횡단보도 초록불이 붉게 변해도 다 건너지 못해 굽은 허리로 종종 내딛는 할머니들을 만날 때면 시선을 떼지 못한다. 재래시장 초입 좌판에 채소를 널어놓고 열심히 손질하는 굵은 주름의 할머니를 보거나, 혹여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옥수수라도 팔고 있으면 가슴 한켠이 아려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요즘은 '00 미역'이라는 고유 브랜드의 미역국 전문점이 제법 있다. 소고기 미역국이 아닌 가자미 미역국을 보면 또 괜스레 외할머니 생각에 눈물이 난다.
맞벌이하시는 부모님에 연년생인 동생에...... 아직 엄마 사랑이, 젖이 그리운 내가 엄마 곁에서 여린 시선으로 엄마를 쳐다보고 있는 게 안쓰러우셨다는 외할머니는 "나랑 시골 가서 살래?"라고 물으셨다고. 뭔지도 모를 어린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고. 그렇게 시골 외가에서 외할머니와 나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돌이켜 보면 그 때 엄마 나이가 겨우 삼십 대 초반, 외할머니 역시 겨우 오십 대 중년. 한국 전쟁에 참전하신 젊은 외할아버지는 그 길로 생사를 알 수 없고, 어린 딸 넷을 홀로 키우신 우리 외할머니.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최초의 유년 기억은 시골 외가에서의 할머니와의 추억이다. 농한기 마을 주민들끼리 어울려 버스를 대절하여 이런저런 유명 온천을 다니곤 했었다. 어린 나도 끼여 할머니랑 다녔으리라. 어느 큰 단체방에 자리를 푸는 사람들 무리 중에 난 할머니 품에 안겨서 간식을 먹고 있고, 여러 할머니들이 번갈아가며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귀여워하시며 한마디씩 하는게 쑥스러워 할머니 품으로 얼굴 묻었던 게 나의 첫 기억이다.
그렇게 서로 빈자리 품어주고 의지했던 할머니와의 동거는 나의 초등학교 입학 전날까지였다. 초봄, 입학식 전날 난 우리 집을 떠나 엄마 집으로 왔다. 그때만 해도 난 시골 외가가 우리 집이었다. 가끔 만나는 부모님과 형제와의 조우에서 "엄마 집은~ 언니 집은~"이란 말을 했다고 한다. 어린 딸의 그런 구분이 그렇게 마음 아팠다는 엄마의 말을 이젠 나도 충분히 이해하는 엄마가 되었다. 젖먹이 어린 딸을 맡겨야 했던 심정과 그 딸이 우리 집을 엄마 집이라 부르며 돌아가는 딸을 보내는 젊은 엄마의 심정을 어찌 말로 표현할까.
외할머니와 함께 막내 이모의 예비 학습 지도가 있었으나, 새까맣고 수줍은 시골 소녀에게 학교생활은 낯설었다. 할머니 품이 그립고 마냥 뛰놀던 시골 산천이 그리운 난, 저녁마다 이불 뒤집어쓰고 할머니 사진 품고 훌쩍거리는 날이 많았다. 시골 생활의 시간 사이클이 몸에 밴 나와 도시 생활을 하던 형제와는 기상 시간부터 달랐다. 새벽에 자연스레 눈이 떠지나 가족들은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시각. 시골에선 할머니가 밤새 빈 속부터 채우라고 뭐든 주시던 습관에 주린 배를 쓰다듬기도 했다. 내가 뒤척이는 걸 어찌 아시고 늦은 잠자리로 피곤할 텐데도 엄마는 말없이 내 등을 쓰다듬어 주셨고, 머리맡에 간식을 챙겨놓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해 주셨다. 홀로 남겨진 할머니 역시 나의 빈자리가 얼마나 크셨을까, 그래도 미리 정해진 이별이었기에 할머닌 입학 전 엄마에게 그간 달달이 모은 적금 통장을 주며, 딸에게 딸을 부탁하는 말씀을 하셨단다. 할머니와의 생이별로 눈물짓는 밤이 많은 걸 아시는 부모님은 주말이면 시골 외가로 데려다 주셨다.
외가에 없는 할머니는 십중팔구 밭에 계신다. 수건 둘러 쓰고 쪼그려 앉아 계신 할머니가 보이면 무작정 달려가 할머니 품에 안겨 그리운 냄새 맡곤 했다. 그 너른 품이 얼마나 그리웠던지.
까치
깍. 깍. 깍.
까치야, 까치야
울 강생이 올라나
아침부터 우찌 그리 울어대노
밭 갈던 호미 한 번 멈추고 하늘 바라본다.
하알매. 할매.
아이고 아이고
단발 머리 찰랑이며 뛰오는 아가
내 강생이 아이가
그랄라고 아침부터 저리
까치가 울었나부다
조심해서 오니라
할미 보고잡아 왔구나
그리고 그 뒤 우리 이종사촌 형제들은 여름, 겨울 방학 때마다 외가에서 요즘 말로 자연과 함께하는 친환경 생태 체험 학습을 방학 내내 했다. 여름이고 겨울이고 종일 나가서 놀아도 하루해가 짧은 나날들이었다.
긴 강줄기가 논밭을 휘돌아 바다와 합류되는 어촌이며, 얕은 언덕배기도 있는 외가는 사계절 놀거리가 풍부한 곳이었다. 삼거리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운영하고 계셨으니 자연 먹거리 외에도 늘 간식은 풍족했다. 분명 장사로 파는 것보다 여덟 외손주가 먹어 치우는 게 훨씬 많았으리라. 종일 강에서 바다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을 허기진 손주들을 위해 광주리 가득 간식 챙겨와서 먹이셨다. 강에 툭툭 던져주신 사과를 건져 튜브에 드러누워 아삭아삭 먹었던 기억은 그림처럼 아직도 선명하다. 그러다 입술 새파래진 우리는 뜨거운 모래찜질로 온기를 채우고, 하루해가 뉘엿 넘어갈 때 쯤 데리러 오신 할머니의 “배 곯으면 안 된다. 고마 가자.”는 고함소리에 쌓은 모래성을 또 서로 무너뜨린다며 깔깔거렸다.
아궁이 가마솥에 한가득 삶아주신 찰옥수수는 기본 대여섯 개는 먹었으며, 곰솥 가득 끓여 주신 구수한 가자미 미역국은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았다. 그리고 온 동네를 쏘다니며 널어놓은 이웃 동네 집의 멸치는 아무리 주워 먹어도 나무라는 어른이 없었다. 햇살에 말린 가자미를 아궁이에 노릇노릇 구워 주실 때, 난 또 그 아궁이 옆에 앉아 할머니 어깨에 기대 그렇게 졸며 기다리곤 했다.
옹기종기 배 깔고 한 방에 누워 다같이 방학 일기를 쓰고, 책을 읽고, 숙제를 하기도 하며 방학을 즐겼다. 물론 언니의 일기며 방학 숙제를 거의 베끼는 수준이었지만. 그저 깔깔거리며 종일 붙어서도 우린 싸움이라곤 한 적이 없었으니 정 많고 다정했던 할머니의 품이 준 은혜였다.
그렇게 인생 최고의 순간들은 빨리도 흘러가고.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방학은 더 많은 공부를 보충해야 하는 시기였고, 각자 학원을 다녀야 했기에 외가를 방문하는 횟수는 짧아졌으며, 고등학교를 진학하고선 아예 가지 못하고 넘어가는 방학도 늘었다. 바쁘나 행복하지 않은 방학이 계속 이어졌다.
외할머니는 고향 그 외가에 그저 그 자리에 늘 계실 거라고 믿었는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시절 외할머니와 떨어져 살면서 홀로 계실 할머니 걱정에, 돌아가시지 않게 건강하게 해달라고, 뭣도 모르고 그저 주워들은 영험함만 믿고 매일 밤 잠들기 전 백일기도를 드린 적이 있다. 그때의 꼬맹이는 제 앞가림하느라 그렇게 시간을 헤쳐 나가며 어른이 되었다. 얼른 어른 되어 할머니 호강시켜드리겠다는 약속은 제 가족 건사하느라 어느 허공에 흩어져 버렸는지.
폐암으로 마지막 요양병원에 누워 계신 할머니를 뵈러 가서도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제대로 말씀드리지 못하고 그저 눈빛만 주고받고 온 게 이렇게 후회될 수가 없다. 그 시간이 마지막이 될 줄 어찌 알았을까.
지극한 후한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남은 자들이 그래도 애써 삶을 부여잡고 사는 가장 큰 힘은, 먼저 간 사랑하는 이가 저 높은 곳에서 지켜주고 있다는 강력한 믿음일 것이다. 종교 못지 않은 강력한 그 믿음이 바르게 살도록 하지 않을까. ‘우리 강생이는 평생 평안하게 부자로 잘 살거야’라며 늘 입버릇처럼 말씀해 주신 우리 외할머니의 축복으로 오늘도 건강하게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다.
어느새 외할머니를 여읜 지 십 년이 다 되어간다. 평생 사셨던 외가 그 터를 지역 유지가 모조리 사들여 기념관으로 개관 후 이젠 외가는 흔적도 없어졌으며, 어른 시절 우리의 놀이터였던 바닷가는 값비싼 카페들로 줄 서 있다. 그래도 이번 주는 외가 마을을 찾아가 보고 싶다. 혹여 남은 자취라도, 기억이라도 추억하고 싶다.
그리운 울 할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