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르는 듯한 뜨거운 햇살에 눈을 떴다. 커튼 빈틈으로 쏟아지는 햇살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여긴 어디? 어제 분명히 기분 좋게 시작한 회식 자리였다. 다들 오늘만 살 듯이 부어라 마셔라 끝까지 가자며 광란의 밤을 즐겼는데, 그 끝이 기억나지 않는다. 요즘 기억이 자꾸 끊어지는 걸 보니 나이를 속일 수 없나보다. 하긴 너무 오랜 살았다. 낯선 이 허름한 곳은 어디인가. 난 또 어디로 실려온 것인가. 왜 나만 덩그러니 낯선 이곳에 누워 있는지. 여름의 농익은 햇살이 스물스물 들어오더니 텅 빈 몸을 달군다. 어제의 기억 파편 몇 가닥이 후레쉬를 터뜨리듯 스쳐가니 다시금 얼굴이 붉어진다.
오천 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이 민족은 도대체 흥과 끼를 유전자 속에 타고 나는지, 틈만 나면 노랫가락을 붙들고 춤을 얹어 덩실거린다. 같이 장단 맞추는 나 역시 덩실거린다. 천성이 맑고 사교적인 나를 어찌 알고 항상 나를 끼워준다. 인싸 중에 인싸인 내가 빠질 리가. 그렇게 나는 유명인이 되었다. 자고 일어나니 세상이 나를 알더라는 유명세가 아니라, 온 역사와 함께 서서히 유명해진 것이다. 이 또한 나의 운명인가. 이제는 반갑지도 않은 유명세. 점점 나를 비난하고 차단하는 이들이 늘어남을 나도 안다. 명망은 부질 없음을 알고 있었으나, 돌아선 이들의 배신은 늘 아프다.
쓰린 속을 달래지도 못한 오늘 아침도 어김없이 핸드폰 알람은 울고 난리다. 보나마나 나를 둘러싼 값싼 기사와 비난을 알려 주고 있을 것이다. 나를 가정 파탄의 주범으로, 선량한 시민을 사회 부적응자로 만든 원흉으로 만드는 별의별 스토리들이 난무할 것이다. 억울하다 아무리 말해도 믿지 않으려는 자에게는 그저 핑계임을 안다. 그들이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세상이니. 만드는 대로 믿어지는 세상이니.
진짜 내가 미친 년인가. 세상을 도탄에 빠뜨리는 요녀란 말인가. 새로운 문물인 이 SNS는 아무리 적응하려 해도 안 된다. 어디에나 나를 끼워 원하지도 않는 사진들을 올려 뭇시선을 끈 뒤 ‘좋아요’를 구걸한다. 또 그렇게 선심 쓰듯 하트를 날리고 공유한다. 처음에는 지금껏 받아 보지 못한 관심에 우쭐하여 고관대작이나 된 듯 어깨에 힘이 들어갔었다. 지금까지 이렇게나 나를 많이 알아봐 주는 때가 있었을까. 자랑스레 나와 찍은 사진들을 보면 모두가 행복한 미소를 보이니, 덩달아 나도 행복했다.
믿을 수 없는 게 얄팍한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루 밤새 돌아서는 애인의 배신에 처음에는 상처도 받았다. 붉어진 얼굴로 사랑한다고 어루만지며 지긋한 눈빛과 낮은 목소리로 나만이 기쁨을 주는 존재라 추켜세우던 이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러나 다음 날 해가 뜨면 내 탓으로 제 몸이 상했다고, 내 탓으로 정신이 혼미하다고, 내 탓으로 사회에서 따돌림당한다고, 더 나아가 내 탓으로 차마 못할 범죄까지 저질렀다고 본인들 잘못이 아니라는 변명들을 늘어 놓는다. 곳곳에서 시위를 떠난 화살들은 또 그렇게 내게로 와 박힌다.
네 탓이야, 네가 날 유혹했쟈나.
네만 믿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쟈나.
용기내라고.
너만이 진실을 말하게 한다며.
너만이 구원해 줄 수 있다고.
다 네 탓이야.
아, 애달프구나.
어느새 나의 말투조차 시류(時流)에 영합(迎合)하는 저급한 소인배(小人輩)가 되었구나.
산천의 정기(精氣)를 배고 정진하는 학인들의 한중진미(閑中眞味)를 더하기 위해 태어난 나이거늘, 속세(俗世)에서 자라는 동안 세인들과 함께하며 몸에 밴 향락적 기질이 이젠 돌이킬 수 없는 나락(那落)으로 나를 몰고 간다. 누구를 원(怨)하리. 지위고하(地位高下), 남녀노소(男女老少)를 불문하고 나를 가까이 함을 거리낌 없이 받아주고 인생 영위(營爲)의 지음(知音)이 되어 주었건만. 만사 정도(正道)를 지키지 못함은 결국 파국으로 치달음을 지난 광음(光陰) 속에 배우지 않았는가. 배웠으나 익히지 못한 나의 탓이로다. 어찌 그들에게만 과이불개(過而不改)의 죄를 물을 것인가.
지겹다. 반복되는 비난의 화살들. 정신 차리자. 이런저런 별의별 놈들 다 보지 않았나. 인간이란 자책보다는 남탓이 더 쉽지. 나 역시 '그래, 내탓이야'라며 허물 뒤집어 쓰고 싶지는 않다. 원하지 않은 영광과 원하지 않은 질책으로 뒤엉킨 나의 허울은 오늘도 양끝에서 당기는 힘으로 가랑이가 찢어진다.
한 세상 나를 알아주는 지인 둘만 있어도 살 만하다 하니, 그래도 떠오르는 진솔한 이들이 있으니 이 세상도 잘 살고 있다. 기나긴 하루 노동 끝자락, 나를 불러 허름한 선술집 한 자리에 앉아 삼겹살 몇 조각뿐인 자리라도 함께 나누는 삶이 따뜻하지 않았는가. 한평생 반려자를 삼도천 홀로 보낸 이와 한밤 지새며 나눈 이야기는 또 얼마나 진솔하였는가. 어두운 골목길 처진 어깨로 돌아가는 아비의 한 손에 든 붕어빵과 함께하는 시간도 그럭저럭 위로가 되지 않았는가.
아, 그립구나.
사계절 산천초목(山川草木)의 변화를 목전(目前)에 두고, 지인들과 음풍농월(吟風弄月)하던 호시절(好時節)이 다시 올까. 청계(淸溪)를 곁에 두고 물 위 산영(山影)에 비친 도화(桃花)를 바라보니 무릉도원(武陵桃源)이 여기구나 여겼던 그 시절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시절(時節)이 하 수상하여, 올똥말똥하는구나. 이에 북받쳐 오르는 정회(情懷)를 다스리고자 작은 글로 남기노라.
*주정(酒精) : 알콜(술)
*주정자소전(酒精自小傳) : 술이 스스로에 대해 쓴 작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