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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강 김철기 Jul 01. 2021

'뜨는 인류'가 탄생하는 그날까지

ㅡ불치병을 딛고 생존수영법 '잎새뜨기' 전도사가 되다

 은퇴 후 인생이모작, 새 출발하다

제가 불치병을 의식하지 않고 불굴의 투지로 벅찬 업무를 감당해온 것에 감명받은 제가 이십 년 가까이 일해온 국제기구 아시아개발은행 (ADB)경영진의 배려로 업무상 재해로서 인정받고 정년보다 삼 년이나 앞당겨 은퇴할 수 있었습니다. 귀국 후 저는 병 회복을 위해 매진했던 수영 경험을 활용해 맨몸으로 물에 쉽게 떠서 익사를 방지하는 '잎새 뜨기'를 공동 개발하고 한국안전수영협회를 설립해서 지금껏 '생명 살리기 봉사활동'에 몰두해 오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 몇 년간 혼신을 다해 '뜨는 인류'의 구현을 꿈꾸며 '잎새뜨기 전도사'로서 해 온 일들에 관한 글을 적으려니 울컥 목이 멥니다.


왜냐고요? 그건 생명 살리기 운동을 위해 제가 시작한 봉사활동이 너무나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설마, 그럴 리가? 반문하실지 모르겠지만 정상인이라도 힘들 일을 파킨슨병 10여 년 차 환자의 몸으로 감당해낼 수밖에 없었던 입장이었기에 그렇습니다. 그래도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랬을까?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ADB에서 지병을 얻다

 제가 1995년 한은에서 이직해간 ADB에서 근무해 오던 중 약 13년 전부터 왼쪽 몸이 굳어져 고생해오다가 십 년 전에 국내에 잠시 들어와 특수검진을 받아 본 결과 희귀성 불치병인 파킨슨병으로 확인해 주더군요. 학과장님으로부터 확진을 받은 그 순간 큰 충격을 받았으나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활짝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확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왕 이렇게 된 이상 저는 앞으로 매일매일을 세배씩 더 열심히 행복하게 살아가겠습니다." 제 인생 제2막을 두려움 반, 기대감 반으로 시작했습니다.


곧바로 지병 극복을 위한 프로젝트를 힘차게 시작했습니다. 일은 일대로, 운동은 운동대로, 인간관계는 관계대로 이전에 비해 훨씬 더 집중해서 열심히 하게 됐습니다.

건강 관리를 위해 아파트에 딸린 수영장에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빠짐없이 장거리 수영을 한 것이 몇 년간 도합 2,000km를 넘게 했습니다. 수영으로 경부고속도로를 몇 차례 왕복한 셈이지요. 이렇게 끈기 있게 장거리 수영을 열심히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굳는 증세가 진행되자 2014년 1월에 조기 은퇴를 허락받았고, 귀국 후 팔자에 없던 생존수영계에서의 봉사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신개념의 생존수영법을 개발하다 

제가 귀국해서 장거리 영법인 'TI 수영'의 귀재로 알려진 안치권 폴 코치를 소개받아 그가 창안한 발을 물 위에 띄운 채 수영하는 법을 배우고 나서 매일같이 이 영법을 익히다가 이 기발한 영법을 활용해서 물 위에 누워 뜬 채 호흡을 계속할 수 있는 생존수영을 개발해 보자는 데 두 사람의 뜻이 맞아 이른바 '잎새뜨기 생존수영법'을 함께 개발해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민도로섬에서 실시한 잎새뜨기 실전 테스트

2015년에 밤잠을 아껴 폴 코치와 함께 생존수영 교육프로그램과 매뉴얼을 작성한 후 제가 '잎새뜨기 (LEAF-FLOAT)'로 이름을 짓고 나서, 이것이 실제 바다나 강 등 실제 상황에 도움이 되는지를 확인해 보기 위해 이듬해 1월에 폴 코치와 함께 필리핀 민도로섬을 방문해서 실전 테스트를 해봤습니다.


자원한 섬주민들과 함께 태풍이 지나가던 시기에 해변에서 1km 넘게 떨어진 한 바다에 작은 배에 묶인 나이론 줄 두 개에 의지한 채 '잎새뜨기'로 이동한 후에 격랑 속에 몸을 던진 채 잎새뜨기로 생존할 수 있는지를 실험해 보았습니다. 기대와 두려움 속에 실시한 이 실전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마닐라를 거쳐서 귀국한 뒤 4월에 예정된 현지 청소년들 300명에게 이 잎새뜨기를 가르치기 위해 인천예람교회 우영균 목사 겸 동료 코치 및 김무길, 나붕희 코치와 이들이 국내 선교단 청년들 20여 명을 훈련시켜 함께 4월 초순에 민도로섬을 다시 방문했습니다.

저는 그때 현지 청소년 수백 명이 몇 시간 동안 잎새뜨기를 훈련받고 바다 위에 둥둥 떠있는 인류사상 초유의 장면을 보면서 느꼈던 그 감동을 도저히 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조사해 바로는 인류사에 이렇게 많은 인원이 동시에 장시간 깊은 물에 떠서 생존한 사례는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한국의 봉사대원 가운데 고등학생 한 명이 현지 청소년들과 함께 떠 있다가 다시 수십 길이나 되는 바다라는 것을 깜빡 잊고 일어서게 되자 바닷속으로 쑥 들어가는 것을 천만다행으로 담임 목사님이 마침 곁에 있다가 물 위로 끌어올린 뒤 "숨 들이마시고, 잎새뜨기" 이 한마디에 사고를 막았던 위험천만했던 사건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고는 무사히 이 인류사상 기억될 실험을 마칠 수 있었답니다.


부산소방학교의 '119 생존수영' 채택을 시발로 잎새뜨기를 국내에 보급하다

귀국 후 곧바로 파킨슨병 환자와 잎새뜨기에 관한 기사를 접한 당시 소방청의 부산소방학교 강대훈 학교장님이 이 생존수영의 유효성을 간파하고 저희 코치들을 부산으로 불러 부산소방학교 교수 교관요원 10여 명을 대상으로 코치 양성 교육을 시켜 달라는 요청을 해왔습니다. 이들이 코치 교육을 받은 후 잎새뜨기를 119 생존수영으로 채택해 소방대원들의 소양교육과 학교 관리자들에게 체험학습을 위주로 자체 보급해 오고 있습니다.

이 잎새뜨기가 국민의 수상안전을 위해 꼭 필요한 아이템으로서 그 효용성이 높음을 간파한 한국안전인증원 김창영 이사장님이 용산 청소년수련관에서 전국에서 가족단위로 모집한 108명에 대해 잎새뜨기 강습을 해 달라고 요청해 왔습니다. 그해 7월 하순에 이틀간 진행된 강습회에서 108명 전원이 동시에 20분 이상 물 위에 떠 있는 대단한 광경을 시현했습니다.


이어서 8월 초순에 국민안전처가 '수영 못해도 OK, 맨몸으로 뜨는 획기적인 잎새뜨기 생존수영'으로 홍보 영상을 제작, 대국민 홍보를 해주었답니다.


한국안전수영협회를 설립, 험난한 여정 시작되

2016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잎새뜨기를 국내외 보급하자면 비영리법인 조직이 필요하다는 중론을 좇아 사단법인 한국안전수영협회를 설립키로 했습니다. 이때까지 제 인생 이모작에서 험난한 여정이 복병처럼 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국내의 협회란 비영리 법인체는 대부분이 설립자가 거의 대부분의 책임을 지고 운영해 나가는 방식이더군요. 어쩔 수 없게도 설립자로 나선 제가 협회의 시드머니 및 운영자금 조달, 협회 경영, 잎새뜨기 홍보 및 대외 교섭 등등을 제가 대부분 직접 맡아서 해내야 하는 운영구조였습니다.


더더구나 잎새뜨기는 세계 최초로 저희가 개발한 교육 프로그램인 만큼 선구자로서 업계 표준을 만드는 일과 민간자격증 발급 기관 자격 취득, 저술과 홍보활동 등 힘든 일을 도맡아 진행해 나가야 했습니다.


일본과 구미 수영 선진국들의 경우 '수영을 해야 물에서 생존할 수 있다'라는 전통적인 방식을 유지하고 있는 데 반해 저희가 개발한 잎새뜨기는 '수영을 못해도 OK, 맨몸으로 호흡법과 자세만으로 누구나 물에 자연스럽게 떠서 익사를 예방할 수 있는' 전혀 새로운 개념의 생존수영법입니다. 따라서 국내에서도 이 신개념의 생존수영법을 검증받기 위해 국내 최고의 전문가(대학교수, 철인 삼종 전 국가 대표 감독 등)들을 협회 임원으로 모시는 한편, 해양경찰청에 협회 설립 허가를 신청했답니다.

어렵사리 해경청의 협회 설립허가를 득하고 2017년 초에 협회를 출범시켰습니다. 이어 미국 특허청에 잎새뜨기 익사방지법 교육 방법으로 특허 출원을 마쳤고 금년중 특허 발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점차 늘어나는 잎새뜨기 생존 사례들 

저희 협회가 잎새뜨기 보급을 늘려감에 따라 잎새뜨기 생존사례가 점점 늘어나고 있어서 기쁩니다. 최근 부산 광안대교에서 투신한 고교생이 잎새뜨기로 구조된 사례와 함께 작년 인천 무의도 갯벌에서 조개를 채취하던 여학생이 잎새뜨기로 떠서 해경청 헬기에 의해 구조된 사례 뿐만 아니라 잎새뜨기가 익사사고를 미연에 예방할 수 있는 안전수영법임에 따라 신고할 필요가 없는 사례도 많을 것입니다. 압권인 생존사례로는 2017년 8월 3일에 인천 옹진군 대청도 해변에서 물놀이를 즐기던 중학생(김대원, 13)이 이안류에 휩쓸려 바다 복판에 밀려갔으나 수영을 할 줄 몰랐음에도 30분 이상을 '잎새뜨기' 자세로 버텨서 고속정으로 출동한 해경에게 무사히 구조된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사례가 바로 그것입니다. 당시에 현장에서 4대 독자 아들이 내민 손을 놓치고 아들이 순식간에 이안류에 휩쓸려 들어간 후에 파고가 2-3미터가 넘는 해변에서 그 험악한 파도에 압도되었던 엄마는 아들이 무사히 구조돼 보건소에 도착했다는 무전 교신을 듣고도 이를 믿을 수가 없었다 합니다.


잎새뜨기가 생존수영 표준이 되면서 심해진 견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국내의 강, 호수, 수영장 등 내수면에서 수상안전사고를 책임진 119 소방이 잎새뜨기를 '119 생존수영'으로 채택하고 이어 해수면에서 사고를 책임진 해경청도 잎새뜨기를 생존수영으로 채택했으며 이후 교육부의 전북교육청이 정식 교육과정으로 잎새뜨기 생존수영을 채택한 것 외에도 각종 후발 협회들이 잎새뜨기를 모방한 프로그램을 보급하기 시작하더군요. 이때부터 타 기관들의 견제 또한 심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험난했던 민간자격증 등록 과정 

저희 협회가 생존수영 교육기관으로서 '생존수영지도자' 민간자격증을 발급하는 것이 필수적인 요소가 됩니다. 그런데, 민간자격증 발급기관 등록을 어렵사리 제반 규정에 맞춰서 신청했더니 등록기관(해경청)이 저희가 교육하는 내용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등록 불허를 통보해 왔습니다. 하지만 물에 빠졌을 때 스스로 물에 떠서 생명을 지키는 잎새뜨기를 국민의 안전을 해치는 교육으로 간주한 것은 누가 봐도 어불성설이고 최근 대청도에서 잎새뜨기로 너울성 파도에서 생존한 실사례도 있는 만큼 제가 행정처분 이의신청을 했습니다. 더더구나 해경청이 저희 '잎새뜨기'를 임의로 사용, 생존수영 과목으로 전국의 어린이들과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강습해 오고 있었기에, 실로 익숙한 4자 성어가 딱 들어맞는 상황이었습니다.


해경청 측이 생존수영 교육을 독점하려는 이기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 막무가내로 제 이의신청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아 저는 담당관들과 지루한 논쟁을 벌여야 했답니다. 이는 해경청이라는 관을 상대로 민간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어서 제가 이 말도 안 되는 논쟁 과정에서 겪은 고초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답니다.


오죽했으면 제가 해경청장님께 사태를 해결해 달라고 편지를 여러 통 썼을까요? 이 편지들은 부치지 않은 채로 제 문서 파일에 잠자고 있지만요.


결국에는 이의신청 마지막 날에서야 해경청의 민간자격 규정을 전면적으로 고친 후에야 등록 허가를 내주었습니다. 이 사건이 제가 협회 설립자로서 겪었던 가장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듬해 저희 협회의 운영 전반을 실사 감사한 해경청 직원들이 협회를 모범 협회로 추신하여 해경청장님의 표창장을 받게 돼서 순간 지난날 고생한 것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너무나 힘들었던 비영리법인 운영

비영리 사단법인의 운영 또한 만만치 않게 저를 너무나 힘들게 했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민간자격증 발급비를 주 수입원으로 삼아야 했기에 지출을 최소화하기 위해 상당기간을 사무국 직원도 없이 제가 온갖 종류의 일을 도맡아 했고, 지도자 교육은 수석코치가 맡아서 하는 식으로 협회를 운영해 왔는데요, 수석코치의 경우 교육이 없는 날은 노동시장에서 막일을 해서 생계비를 조달했고 제가 퇴직연금으로 수석코치의 생계비와 협회 운영비를 충당하는 식으로 해 왔답니다. 이것이 지속 가능한 운영 방식이 못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제 고민은 날로 커져만 갔습니다.


이외에도 매년 개최해야 하는 총회를 준비하는 일이야말로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정관에 따라 총회 의결 정족수를 충족하는 인원을 확보하는 일이 너무나 힘들었고, 무엇보다 수영장을 갖추지 못한 채 생존수영 사업을 하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소수의 사무국 인원으로 임원진 재구성과 정관 개정, 기부금 단체 등록 등 굵직한 결정을 총회에서 의결해서 추진해야 해오다가 작년에 제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저는 수영장을 갖추고 전북 초등학생 생존수영 교육을 책임진 전북지회장{현 신승훈 협회장}에게 협회 운영을 맡아주기를 부탁했는데 흔쾌히 들어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협회가 전문경영인 체제를 갖출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잎새뜨기와 협회를 홍보하고 책자 저술활동은 여전히 대부분 제 몫으로 남아 있어서 열심히, 때로는 밤낮없이, 기사 글을 쓰고, 홍보 동영상을 제작하고, 책을 써야 했습니다. 그 결과 구글, 네이버, 유튜브, 틱톡 등에 "잎새뜨기"를 검색하면 넘치게 많은 자료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글을 마치며

제가 인생이모작으로 시작한 이 봉사활동이 이렇게 힘든 줄 미리 알게 됐더라면 과연 어떻게 했을까요? 저는 5년 전 민도로섬에서 태풍 속 깊은 바다에 주저 없이 몸을 던졌고 이때 저는 제 목숨을 걸었던 것이라 후회라고는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만약에 제가 지병을 얻지 않은 채 국제기구에서 정년까지 보냈다면 이 지구 상에 잎새뜨기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잎새뜨기가 없다면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익사를 예방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저는 제가 불치병에 걸린 것도 다 제게 주어진 응당한 짐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렇듯 제가 겪었던 모든 역경과 고난을 제가 신봉하는 '홍익인간'이라는 차원에서 달갑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저는 제 오랜 꿈인 세계에 수천만 명이 물에 뜰 수 있을 때 "뜨는 인류가 탄생"하는 그날이 꼭 오리라 믿습니다. 


저는 탈무드의 격언이며 영화 신들러 리스트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말 한마디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온 세상을 구한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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