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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강 김철기 Oct 16. 2021

간절히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호롱불 촌놈의 기상천외한 명문대 입학기

"철기야, 혹시 대학에 한번 가 보지 않겠니?"


평소에 덜렁대던 제가 어쩌다 고3이 된 1974년 3월 초에 아버지께서 저를 조용히 불러 의견을 물어보셨다. 아버지는 매우 엄격한 데다 과묵한 분이셨고 저는 엄친 시하의 성장기 내내 저를 괴롭혀온 열등감으로 말없이 자란 아이였기에 부자지간에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눠본 기억이 별로 없다. 그리고 그때까지 학교에 덜렁덜렁 갔다가 오는 으로 다녔기에 한 번도 심각하게 대학에 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저는 자칫 머뭇거리다가는 혼날까 두려운 나머지 아버지께 "예, 고맙습니다"라고 딱 한마디 답을 드린 게 다였다. 그러고는 혼자서 끙끙대며 대학입시를 준비할 계획을 세웠다. 아버지께서는 대신 제가 해오던 농사일은 형들에게 배분해 주셨다. 참 고마울 따름이다.


이 글은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나 과수원 농사일을 돕던 고등학생이었던 제가 호롱불 아래서 딱 9개월간 입시공부를 해서 명문대 입학에 성공한 기상천외한 체험담을 소개하기 위해 쓴 것이다. 저는 고 3이 돼서 처음으로 하게 된 입시공부를 마치 첫사랑을 만난 것에 비유하고 싶다. 첫사랑에 빠진 제 몸과 마음이 9개월 내내 후끈거렸고 피곤한 줄을 몰랐으니 말이다.


저는 사람들에게 "그 나이에 첫사랑에 빠지면 무엇이든 못할 게 무엇이 있겠냐고" 얘기하곤 한다.


저는 전후 세대로 전쟁이 전국을 파괴한 뒤 재건 작업으로  모두가 정신없이 바빴던 시기에 어렵사리 잠시 틈을 내 수고해 주신 부모님의 노력 덕택으로 정말  운 좋게도 잉태되어 7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이다.


저는 당시에는 누구나처럼 가난했던 가정에서 5남매 가운데 넷째이자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하늘도 무심한 것이 제가 첫 돌 무렵 장티푸스가 창궐해서 동네에서 동갑내기들이 죄다 더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기억을 못 하지만 저도 마찬가지로 장티푸스에 걸려 심하게 앓았고 종래에는 죽은 줄 알고 포기한 채 담요로 둘둘 말아 방 한구석에 뒀는데 한참 뒤 제가 꼼지락 거리며 살아서 기어 나왔다고 한 엄마 말을 그대로 믿고 있다.


소년기에 우리 집안의 가난은 점점 심해져 갔는데 나중에 알게 된 사정은 이러하다. 당시 일본의 명문대 경제 학부에서 유학을 어렵사리 하다가 징용당해 히로시마에서 온갖 참상을 겪고 귀국 후 우연히 시작한 교편생활을 천직으로 삼고 성실하게 일해오신 아버지께서 너무나 부지런한 나머지 당시에는 고 수익원이었던 사과 과수원을 만들어 농사를 시작하시면서 그리 된 것이다.


 당시의 사과나무 한그루에서 논 한 마지기와 맞먹는 소출을 기대할 수 있었기에 너도나도 과수원에 손대기 시작했다 한다. 그야말로 노다지에 가까운 사과농사였으나 당시 수종에 따라 투자 후 수확하기까지 자그마치 10-15년 정도나 걸려 그때까지는 투자와 비용만 지출해야 하는지라 수익은 멀리 있고 당시 교원의 쥐꼬리 만한 봉급의 상당 부분을 초기의 과수원 조성 작업과 비료 구입 등으로 지출해야 하는지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과유불급'이라는 4 자성어가 떠오르는 장면이다.

그래도 주변의 모든 이웃들이 비슷하게 가난했기에 끼니를 건너뛰는 일이 있어도 불평하는 법이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를 남들보다 한해 일찍 들어가서 밤 톨만한 체구에 눈만 커다랗게 반짝이던 아이였다 한다.


3학년이 돼서 제게 인생 최대의 전기가 주어졌다. 아홉 살짜리 소년이 세계사와 세계 명작을 마음껏 섭렵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아버지께서 안동의 한 시골 학교에 발령을 받아 저를 데리고 가서 둘이서 초가집 관사를 얻어 자취를 하게 되었다. 하루는 아버지께서 안동 시장에 나가셔서 이야기 세계사 상하권을 사 가지고 들어 오셨다. 이 책은 어른들이 읽을 두꺼운 하드 커버 책이었는데 제가 이 책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셨나 보다. 그 날밤 제 눈 아래 펼쳐진 수천 년간을 아우르는 세계사에 폭 빠져 밤을 꼬박 새워 두 권을 다 읽고 다음날도 다시 밤을 새워 두 권을 다시 읽었다. 세계사를 수십 독 한 뒤에 세계 명작을 읽기 시작했는데 아버지께서 부탁해서 도서관에서 매일 책 몇 권씩을 빌려 속독하는 기술을 나름대로 익혀서 읽다가 여름 방학을 맞아서는 몇백 권의 세계 명작을 죄다 섭렵했다. 이때 독서를 통해 배운 지식은 실로 방대한 분량이어서 이후에는 학교 공부가 거의 필요하지 않을 정도였다.


 안동군에서 이 년간에 걸친 아버지와의 밀애가 끝나고 고향인 김천으로 돌아와 별 감흥 없이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진학했다.

당시에는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학교를 골라서 시험을 봐야 했다. 인근에서는 명문학교로 손꼽히던 김천중학교에 지원해서 시험을 치렀는데 그중 음악 과목의 시험 문항수가 사지선다로 14개였는데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답을 골랐는데도 나중에 채점을 해 보니 아뿔싸! 어찌하여 14문제 전부 틀린 답만 용케 고른 것이다. 다른 과목에서는 전체 문제 중 네 개만 틀렸지만 음악 과목을 포함해 열여덟 개 문항이나 틀려서 내심 걱정을 하고 기다렸는데 다행히 합격 통보가 왔다.


입학 후 엄마의 사촌이 중학교 교사로 계셔서 내게 알려준 내 입학 성적을 보고 깜짝 놀랐다. 360/360!

내가 360명 가운데 맨 꼴찌로 입학한 것이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상기하면 소름이 돋곤 한다.

2 때부터는 아예 우리 식구들이 합심해서 개간한 하천부지에 과수원이 있는 하천부지에 우리들 손으로 직접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집 설계를 아버지께서 손수 하셨고 형들이 벽돌을 만들고 나는 벽돌 쌓는 것을 도왔다.

이때부터는 반 농사꾼 학생으로 우리 형제들 간에 분담된 각자의 몫을 해가면서 학교는 건성으로 다니게 되었다. 전기가 아직 들어오지 않아서 모든 작업을 경운기 한대에 주로 의존해서 과수원 농사일을 했었는데 자라나는 사과나무에 농약을 내가 양팔로 밀고 당겨 압축시키면 형들이 나무에 농약을 뿌리는 일을 맡았다. 그 덕분에 난 지금껏 팔씨름을 해서 져 본 적이 거의 없다.


하교 후에는 가축들에게 꼴을 뜯어 먹이는 일도 내가 맡았다. 과수원 농사일을 하다 보면 철마다 하는 일이 다르지만 매년 되풀이되는 일들이다. 벼농사를 지을 논이 없었기에 쌀이 없어 농사지은 고구마로 주로 겨울과 봄철을 넘기곤 했다. 당시에 점점 더 힘들어진 가계 운영이 빌미가 되어 부모님심한 불화를 맞게 됐다.

가정불화 속에서 사춘기를 지나면서 나는 심한 열등감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집에서나 학교에 가서 아무 말하지 않고 당시 유행했던 어두운 곡조의 노래를 혼자서 시도 때도 없이 중얼거렸다. 중고등학교 6년간 내가 새 교복은 입어 본 적이 없고 형들이 물려준 것을 기워서 입었고 매점 카운터에 놓인 단팥빵을 한 번도 사 먹어보질 못했다.


이렇게 맨 꼴찌로 중학교에 입학해 우울한 중고등학교 생활을 하던 제 인생 진로를 180도 확 바꿀 행운이 제가 고3이 되던 해에 찾아왔던 것이다.


 평소에 학교 공부를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대학에 갈 수 있을지에 대해 아무도 얘기를 해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저는 부담 없이 학교만 갔다가 오는 '덜렁이 학생'으로 어쩌다 보니 고3이 되었다. 그런데 고3이 된 그해 3월 초에 아버지로부터 '말도 안 되는' 대학 진학 권유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때까지 대학 진학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어떤 대학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조차 몰랐던 시골뜨기가 앞으로 9개월 남짓밖에 남지 않은 대학 본고사를 준비해야 한다니! 이는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라 할 수 있겠다. 고민에 빠져 이런저런 궁리를 하던 저는 놀랍게도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어딘가에 숨어있던 용기가 발현하였고 어느새 소년의 가슴은 투지로 활활 불타올랐다. "까짓 거, 한번 해보지!"


그런데 독자 여러분께서도 잘 알고 계시다시피 공부란 것이 제때에 갖춰야 하는 기초를 필요로 하는데 내가 워낙 고1-2학년을 건성으로 다닌 탓에 공통수학이 가장 큰 문제였고 물리 화학 과목을 다시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매일 공통수학을 세 시간 수학 1 세 시간, 합쳐 수학 두 과목만 여섯 시간 집중해서 공부하기로 시간표를 짰다.


물리 화학은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대신 생물 한 과목과 국영수 및 사회, 독어만 요구하는 학교 가운데 고려대가 있어서 목표로 삼았다. 내가 중학교 2 학년 때부터 취미 과목이 됐던 영어를 별도로 공부하지 않아도 됐고, 국어 사회과목은 상식 수준의 평소 실력이 탄탄했기에 수학과 제2외국어인 독어와 생물 과목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하천부지에 조성한 과수원이라 동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탓에 당시 전기를 끌어오자면 전봇대 설치 비용을 절반은 부담해야 해서 몇 년째 엄두도 못 냈다. 그러다가  나중에 제가 대학 2학년이 돼서야 비로소 집에 전기가 들어왔다. "만세!" 저의 중학교 시절에 박정희 대통령께서 전국의 산간지방을 총망라한 전력망 보급을 이미 완성한 때였다.

 그러고 보니 제가 당시에 국내에서 몇 안 되는 자랑스러운 '호롱불 입시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호롱불 밑에서 대학 입시 준비를 하는 것이 불빛이 어두침침했던 것을 빼고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음을 이내 알아차리게 되었다. 호롱불 아래서 공부를 하면 주위가 어두워 집중이 잘 될뿐더러 집에 전기가 없으니 라디오 TV 등 공부를 방해할 요소가 전무해서 보기보다는 막강한 장점을 갖고 있었다. "아싸!"


그리고 난생처음 공부라는 걸 해본 시골소년에겐 공부가 마치 첫사랑 연인처럼 다가왔다. 그래서 저는 9개월 동안 첫사랑에 폭 빠진 큐피드의 포로가 되었다. 사랑의 열병에 걸려 하루 종일 몸과 마음이 후끈거렸고 피곤한 때가 없었다.


아침저녁 보충수업을 포함해 11시간 동안 엉덩이를 의자에서 떼지 않고 공부에만 몰두했다. 하루에 40리를 자전거로 통학했는데 비포장길을 다니는 일은 보통 힘든 게 아니어서 제가 중학교 때 친구로부터 배운 배호마지막 잎새를 부르면서 기운을 내서 달리곤 했다.


학교에서 돌아와서도 1분도 허비하지 않고 정해진 시간표대로 공통수학 3시간, 수학 1 3시간에다 여타 과목 한두 시간을 9개월간 한 치의 오차 없이 반복했다.

이때 제 모습을 기억하는 중고등학교 친구들은 나를 '끈기 지존'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선택과 집중' 전략이 주효했던 덕분에 9개월 후인 그 해 12월에 모든 준비를 끝내고 편안한 마음으로 생전 처음 고속버스란 것을 타고 상경했다. 그 당시에는 고속버스마다 승무원이 동행하고 있었는데 그때까지 우리 집 누나 이외엔  여자라고는 거의 만나 본 적이 없었던 내 눈에 그 여승무원은 지상의 여성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위한 얼굴 몸매와 복장을 하고 있어서 나를 뿅 가게 만들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서로 친해져서 말을 섞어봤는데 수험생인 것을 알고 내게 시험을 잘 보게 될 거라고 진심을 담아 응원해 주었다. 그때 저는 고속버스가 아니라 마치 비행기를 탄 기분이었다.  어렵사리 여 승무원과 작별을 하고 헤어지고 나니 텅 빈 가슴만 남았다.


동대문 고속터미널에 내려서 그때부터는 선생님의 손을 놓칠세라 꽉 잡고 조마조마하며 걸어서 주변에 정해놓은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지하철을 타고 고대 경영학과 강의실에 준비된 시험장에 도착했다.


한 교실에 75명이나 들어가는 생전 첨 보는 넓은 교실에 앉게 된, 유일하게 교복을 입은 데다 바리깡 머리를 한 촌놈이 주눅이 들지 않을 수 없어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제가 괜히 쓸데없는 짓을 해 왔구나! 여기가 어딘데 다들 형들이나 아저씨 같은 사람들과 입시 경쟁을 하러 왔다니…  수치심에 쿵쾅거리던 제 가슴은 첫 시간을 알리는 벨소리가 나자마자 웬걸! 특유의 투지로 활활 불타올랐다.


첫 시간 국어 시험에서 평생 씻을 수 없는 큰 실수를 저질러 버렸다. 국어시험은 사지선다 문제와 마지막에  논술 작문 문제로 돼 있었는데 제가 흥분을 해서 문제들을 다 풀고 한 번 더 훑어보고 난 뒤에 작문을 하기로 정한 것이 크나큰 패착이었다. 그날 작문의 주제는 그 쉬운 '길'에 대한 것이었다. 아마도 누구에게나 쉽게 느껴질 주제인데 그래서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나 보다. 시간을 계산 못하고 푼 문제를 다시 한번 한 문제씩 리뷰해 나던 중 수험시간 종료를 알리는 벨이 울렸다.

아뿔싸! 이를 어쩌나. 작문은 한자도 손대지 못했는데…


두 번째 시간은 영어 과목이었던 것 같은데 평소에 영어를 취미로 삼아온 덕에 어려움 없이 마쳤다. 이렇게 이틀간 진행된 대입고사를 마치고 마을 이장댁에 공중전화를 걸어서 집의  부모님께 "합격했노라"는 말씀을 전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그러고는 함께 올라와서 시험을 본 만섭이라는 친구가 서울에 집을 갖고 있는데 하루 더 묵고 가자고 해서 그렇게 했다.


열흘 정도 지나서 합격자 발표가 있어서 다시 고속버스를 타고 상경했다. 그런데 그 승무원 아가씨는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학교 경영관 앞에 게시된 합격자 명단에서 번호를 확인하곤 깜짝 놀랐다. 제 수험번호 뒤로 15명인가가 뻥 비어있었다. 그때서야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창피한 얘기를 해 보자면 제 시험 점수가 당해 커트라인이 총 400점 만점에 304점으로 기억하는데 이보다 30점이나 높은 걸로 나왔는데 만약 국어 논술 작문만 제대로 했더라면 20-25점 정도가 추가돼 어렵지 않게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후 4년 내내 우리 가족을 힘들게 한 제 향토장학금을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가 지금까지 제 가슴속에 응어리로 남아 있다. 


최근에 아버지께서 남겨 놓으신 평생 동안 써 오신 일기 가운데 맨 마지막 묶음을 뒤져 볼 기회를 가졌다. 1975년 1월 13일 자 일기장에 아버지께서 이렇게 적어 놓으셨다. 학수고대하고 있던 철기 대학입시 합격. 동기생은 2명만이 합격.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장래 영광! 이번에는 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간절히 두드리니  문이 활짝 열렸다. 시골 촌놈의 서울 유학을 발판 삼아 저는 후일 서울대학교 대학원 경영학과에 진학하였고 한국은행에 입행한 후 세계적인 톱 비즈니스 스쿨인 유펜의 와튼스쿨 유학을 거쳐 꿈의 직장인 국제기구 아시아개발은행에 진출해 전문가로서 활약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삶은 결국 '선택과 집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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