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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강 김철기 Oct 19. 2021

나는 어떻게 삼성의 반도체 사업 첫출발을 도왔나?

삼성의 64K D램 개발 해외투자 허가를 담당하다


2022 년 5월 20일, 국내외 통신사들은 일제히 한국을 방문한 Joe Biden 대통령이 도착 즉시 삼성반도체 공장으로 직행한 사실을 실시각 뉴스로 알렸다. 한미간 경제 안보 동맹 협력의 파트너로 삼성을 목한 것이다. 대한민국과 일개 기업의 위상이 이렇게까지 높았던 적이 있었을까? 이 방송을 보면서 저는 남몰래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한은 재직 시 삼성의 반도체 사업 첫 사업인 64K DRAM을 미국 개발 후 국내에서 양산하는 프로젝트를 제가 해외투자 허가를 담당했던 적이 있었다. 오늘날 삼성이 세계 속에 우뚝 서게끔 되는 과정에서 그 첫 단추를 끼워 준 역할을 제가 운 좋게 담당하게 된 것이다.


정말 가슴이 뿌듯하다.

이 역사적인 에피소드를 담은 재미있는 브런치 글을 올려드린다.



"6개월 만에 64K D램을 미국에서 개발해서 국내에 도입 양산한다고요?" 


저의 1982년에 입행한 한국은행에서의 첫 보직이 해외투자 허가담당이었는데 이듬해 1983년 하반기에 삼성전자가 최초의 반도체인 64K D램 연구개발 후 국내에서 양산하는 목적으로 한 해외투자 허가를 신청해왔다. 그리고 운 좋게 제가 그 해외투자 허가를 담당했던 것이다.




허가신청 서류 검토를 시작했는데 문과 출신인 제게는 도통 어려운 내용들이었다. 국내에서 반도체가 아예 없었던 때라 반도체의 기초개념부터 시작해 웨이퍼가 무엇인지, D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머리를 싸매고 배워가며 투자 안을 분석한 결과 타당성이 인정돼 당시 외환관리부장이셨던 김명호 총재님께 허가를 품의했는데 흔쾌히 결재해 주셨다.


그때 삼성이 비밀문서로 제출한 향후 10년간 사업계획서에는 10년 후인 1992년까지 1M D램의 개발에 성공하겠다는 당시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던 비밀계획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삼성이 6개월 만에 목표한 64K D램의 해외개발과 함께 국내 양산에 성공한 것뿐만이 아니라, 10년 후로 계획한 1M D램 개발을 달성하는 데 채 4년이 걸리지 않았다.


1986년 7월 1M D램 개발에 성공한 데 이어 4M D램 시장에서 일본의 선두 주자들을 따라잡기 시작한 삼성은 당초 계획했던 10년 후 1M D램 개발이라는 목표를 몇 배나 뛰어넘어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지 10년째인 1992년에는 64M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였다.


그런데 1992년에 제가 한은의 지원을 받아 미국에 유학을 간 학교가 필라델피아에 소재한 아이비리그의 하나인 유펜의 와튼스쿨(Wharton School)이었다. 석사과정 2년 차의 경영전략 과목에서 하버드 사례연구(case study) 수업을 했는데 그 사례의 제목이 "후발주자였던 삼성이 어떻게 4M D램 시장에서 일본의 선발 그룹을 제칠 수 있었나?"였다.


그 사례분석을 해보니 당시 세계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고 있던 히다찌, 미쓰비시 등 일본의 선발 그룹이 4M D램 시장이 미처 성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1M D램 시장에서 다음 단계로 옮겨가는 바람에 막대한 시설투자가 드는 장치산업인 반도체 사업에서 큰 손실을 입고 주춤하는 사이에 후발 삼성이 1M D램 시장에서 엄청난 이익을 챙겨 자금 경쟁력을 확보한 덕분이라는 결론을 냈다. 반도체 사업을 시작할 때 일본 기업들에 비해 10년이나 뒤처졌던 삼성에게 대단한 행운이 주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물론 와튼스쿨의 스터디 그룹 차원에서는 삼성그룹이 당시 이건희 회장님의 탁월한 리더십 하에 임직원들이 똘똘 뭉쳐 정말 열심히 노력한 점은 잘 알 수 없었다. 이렇게 4M D램 시장에서 일본의 선두 주자들을 따라잡기 시작한 삼성은 1992년에 와서는 64M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 메모리 강국인 일본을 따돌려 버렸다.


당시 일본 학생들이 월등하게 많았던 그 수업에서 저는 '극일'의 통쾌함을 만끽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해초 회장 취임 5년 차를 맞아 미국을 방문한 이건희 회장님이 소니 제품에 밀려 가전매장의 한 귀퉁이에 먼지에 덮여있는 삼성제품을 목격하고는 큰 충격에 빠졌다고 현지 신문들은 뉴스로 전했다.  정도로 당시 주문자 생산 (OEM) 방식에 주로 의존해 온 한국의 가전제품은 경쟁력이란 눈을 씻고 봐도 볼 수 없었던 열악한 수준으로 당시 가전업계의 선두주자로 미국 시장을 호령하던 소니 등의 일본 업체들에 비해 말할 수 없게 뒤떨어진 시기였기에 말이다. 이어 이 회장님은 프랑크푸르트 임직원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신경영 선언으로 혁신과 변화를 주창하게 된다.


 "마누라와 자식을 빼고는 다 바꿔라. 삼성이란 회사명도 바꿀 수 있으면 바꿔라"


이후 삼성은 회사 명을 바꾸지 않은 채, 그리고 임직원들은 각자의 가족관계를 그대로 유지한 채, 혁신을 거듭해 오늘날의 세계 가전업계의 선두주자로 우뚝 솟아 나는 데 성공했다. 당시에 이건희 회장님께서 그렇게 부러워하셨던 소니 등 일본의 선발 업체들을 모두 다 합쳐도 삼성의 절반 규모밖에 되지 않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큰 역사적인 사건을 만들어 낸 삼성의 그 저력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날 하버드 사례연구 수업의 주인공은 당연히 저였다. "내가 한국은행에 재직하고 있는데 삼성반도체 사업의 첫걸음을 떼게 도와준 위치에 있었다"라고 배경을 설명해 주자 다들 저를 부러워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수업을 마치자 삼성전자 직원이었던 급우(현 동원산업 이명우 부회장)가 다가와서 "삼성을 도와줘서 감사하다"라고 말하고 제게 반도체 칩을 넣어 만든 넥타이 핀 세트를 선물하였다.



이외에도 당시 군부세력이 주도한 제5 공화국 청와대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반도체 칩을 연병장에 비유해 사전재가를 득한 삼성의 기지, 삼성과 현대의 선대회장님들의 반도체 사업 애착과 피 말리는 경쟁관계 등 흥미롭고도 민감한 이야기도 있었다.


유강 김철기 (65세)

 국제기구 아시아 개발은행에 20년 근무 후 은퇴/한국은행 14년 근무

UPENN 와튼스쿨 MBA(WG94)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제경영학과/고려대 경영학과 졸업

(사)한국안전수영협회 설립자 /초대회장

맨몸으로 물에 뜨는 익사 방지법 '잎새 뜨기'를 최초로 공동개발

세이프타임즈 논설위원 /고문

브런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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