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후에 세종학당 1학기
4월 30일부터 5월 2일까지는 후에 축제 기간이지만 베트남 남부 해방 기념일과 노동절, 대체 휴일 연휴이기도 했다. 하지만 휴일이라도 수업은 해야 했다. 휴일 수업 여부는 세종학당마다 다르다. 어떤 학당은 수업을 안 해도 상관없다고 하고 어떤 학당은 수업을 하거나 나중에 보강을 하라고 한다. 후에 세종학당 학당장님은 수업을 하기를 원했고 이건 우리 파견교원들도 동의했다. 후에 세종학당은 한 학기에 10주, 60시간 과정인데 교재인 <세종한국어>가 딱 60시간에 맞게 수업할 수 있게 구성되어있다. 그보다 적게 수업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럼 진도를 나가기에 급해져서 학생들이 한국어를 충분히 연습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도 휴일에 수업을 안 하는 대신 보강을 하거나 휴일 당일 다른 근무는 안 하고 수업을 해야 했다. 그런데 보강 일정을 잡자니 교실 사용 때문에 다른 선생님들과 일정도 맞춰야 했고 학생들과도 맞는 시간을 잡아야 하는데 휴일이 3일이나 되니 보강해야 하는 수업도 많았다. 그래서 차라리 보강을 하지 말고 휴일에 수업을 하기로 했다.
당연히 학생들은 많이 결석했다. 휴일인 데다가 축제 기간이니 이해가 되었다. 오히려 이 기간에 학당에 와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대단해 보였다. 소수의 학생들과 수업을 하니 단란한 느낌도 들고 수업을 들으러 온 학생들에게 고마운 마음에 중간중간 웃긴 이야기도 많이 하니 분위기는 평소보다 더 좋았다. 거의 결석을 안 하고 항상 떠들썩하던 초급 1권 아침반 학생은 3분의 1 정도 되는 다섯 명만 왔는데, 나는 학생들이 온 것도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신기했다. 그래서 학생들한테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고 더 열심히 공부하는 척해 달라고 하며 사진을 찍었다. 저녁에는 4권 수업이 있었는데,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과 같이 저녁도 먹고 카페도 가기도 했다. 휴일에 수업하는 건 교사인 나도 싫었지만 나름 재미있었던 경험이었다.
그런데 내가 수업을 해야 해서 축제 기간에 나를 보러 후에에 온 친구를 챙겨 주지 못했다. 그저 베트남 패션쇼를 한번 같이 본 게 다였다. 그래도 다행히 친구가 혼자서도 잘 노는 성격이고 내 사정을 알고 혼자 후에를 돌아다닐 계획을 다 짜 왔다. 친구는 다낭 시장에서 맞춘 아오자이를 입고 후에 고궁부터 외국인거리까지 돌아다녔다고 한다. 나는 베트남에 1년 넘게 있으면서 아오자이를 한 번도 안 입었는데... 심지어 날씨가 친구가 맞춘 아오자이 입고 돌아다니기에는 날씨가 너무 무더웠었는데 아주 잘 돌아다녔다.
친구는 우리 집을 아주 좋아했다. 후에는 대부분의 건물이 4층을 넘지 않는데, 특히 구시가지 쪽은 높은 건물이 법적으로도 규제가 되어 더 그렇다. 우리 동네는 구시가지에 가까웠고, 우리 집은 아파트 4층이었기 때문에 발코니에서 동네 경치를 훤히 볼 수 있었다. 친구는 내가 이국적인 느낌이 드는 완전 현지인 식 아파트에 사는 것도, 집에서 흐엉 강과 동네 경치를 훤히 볼 수 있는 것도, 해외에 사는 것도 부러워했다.
그런데 나는 내가 해외에서 일해서 좋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오히려 문화도 환경도 낯설고 학당을 벗어나면 사람들과 말도 안 통해서 한국에서 일하는 것보다 단점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코이카 봉사단원으로 선발되어 몽골로 가기 전에는 한국에서 일자리를 알아봤다. 그런데 국내에서 한국어 교사로 일하려면 경력이 있어야 했다. 거의 경력자를 뽑아서 경력이 없는 사람한테는 입구가 너무 좁았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는 그나마 자원봉사 자리라도 구할 수 있는데, 내가 살던 청주는 그 자리도 없었다. 나 역시 서류 전형부터 계속 탈락했었고, 그러다가 붙은 곳이 코이카 해외봉사단이었다. 코이카 계약이 끝나기 전에 세종학당 파견 교원 공고가 났고, 마침 몽골 파견 교원도 뽑아서 지원을 한 거지 해외 체질이라서 해외에서만 일하는 게 아니었다. 가끔은 한국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다. 뭐 지금은 낯선 문화에 점차 익숙해지는 게 좋고 개인적인 이유로 해외에서 잠시 동안이라도 살기를 원하고 있지만 그때는 그랬다.
축제가 끝나고 친구도 다음 여행지로 떠나고 나도 일상생활로 돌아왔다. 축제 기간에 수업을 빠진 학생들이 너무 많아 지난 수업 내용을 듣고 싶은 학생은 수업 시간 30분 전에 미리 오게 해서 지난 수업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해 줬다. 1학기도 거의 끝나갈 때가 되어 보충 수업하랴 진도 나가랴 정신이 없었다.
정신없는 중에 계속 걸리는 것이 있었는데, 그건 올해 초 후에에 다시 오기 전에 세종학당재단에서 나눠 준 'K-뷰티' 문화수업 재료였다. 말은 문화 수업 재료지만 내용물은 팩과 화장품 세트였다. 이걸로 어떻게 문화수업을 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수업을 할 만한 재료도 아니었고 'K-뷰티 문화수업'을 하기에는 내가 화장에 대해 잘 모르고... 화장이나 한국 화장품은 나보다 학생들이 훨씬 더 잘 알았다. 문화 수업 보고서를 써야 하는 것도 아니라서 이 화장품 세트를 꼭 수업에 활용할 필요는 없었는데, 그래도 학생들에게 써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들었다.
고민하다가 학생 수가 많지 않아 화장품을 충분히 나눠 가질 수 있고 수업 시간이 넉넉한 반에 한국어 게임을 통해 화장품을 나눠 주기로 했다. 초급 1권 아침 반이 딱 좋았다. 학생들을 한국어를 잘하는 학생이 고루 들어갈 수 있게 두 개의 팀으로 나누고 게임을 3단계로 진행했다. 첫 번째는 '스무고개' 게임이었다. 게임 규칙을 설명하고 연습 게임을 한 후에 스무고개 게임을 세 번 진행했다. 학생들이 1권 수준이라 게임 규칙을 설명하는 게 어려웠지만 다행히 이해력이 빠른 학생이 다른 학생에게 다시 잘 설명해 주어서 게임을 진행할 수 있었다.
나는 학생들이 알아맞히기 쉽게 교실에 있는 사람이나 물건으로 문제를 냈고, 학생들은 규칙을 이해하자 열정적으로 게임에 임했다. 너무 시끄러워서 내가 중간중간 목소리를 낮추라고 할 정도였다. 두 번째 게임은 퀴즈 게임이었다. 퀴즈 게임은 사진 문제와 초성 문제를 냈다. 초성은 어려워 보이지만 1권 책에 있는 단어만 냈다는 힌트를 줬기 때문에 교재 뒷부분 어휘 부록에서 단어를 찾으면 되었다. 사실상 스피드 게임이었다.
세 번째는 받아쓰기였다. 팀별로 한 명씩 나와서 칠판에 나와 받아쓰기를 하게 했고 교재에 나온 문장만 문제로 냈다. 학생들은 받아쓰기 주자가 되어 나올 때마다 잔뜩 긴장과 결의에 찬 얼굴로 나왔고, 나머지 학생들은 무슨 올림픽을 보는 것처럼 응원을 했다. 앞에 나온 학생이 받아쓰기를 하지 못하면 앞으로 뛰쳐나가 어떻게든 힌트를 주려고 하기도 했다. 나도 학생들이 이렇게까지 게임에 진심일 줄은 몰랐다. 받아쓰기가 이렇게 긴장감이 넘치는 활동이었나... 테스트로 하면 재미없는데 게임으로 하니 달랐다.
게임이 끝나고 이긴 팀이 약속대로 먼저 화장품을 가져가라고 했다. 그런데 이긴 팀은 이겼다고 할 때는 엄청나게 좋아하더니, 화장품을 나눌 때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먼저 가져가지 않았다. 나한테 이 화장품이 어디에 좋은 거냐고 물어보고 제품 설명에 있는 단어를 사전으로 찾아보면서 진 팀과 상의를 해서 나눠 가졌다. 게임에서는 이기고 싶어 했지만 상품은 평등하게 나누는 것이었다. 나였다면 그냥 비싸고 예뻐 보이는 것을 가져갔을 텐데... 학생들에게 또 배웠다.
화장품은 수량 때문에 아침반 학생들에게만 나눠줄 수밖에 없었다. 초급 1권 저녁반 학생들에게 미안했다. 그래서 저녁 반은 팀을 나누지 않고 게임을 하고 학생들에게 자비로 간식을 많이 사서 돌렸다. 아침반과 마찬가지로 학생들은 게임에 아주 진심이었다.
1학기 기말고사 시험을 보기 전 중급 7권 반 수업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수업이 끝났는데 학생 한 명만 밖으로 나가고 나머지 학생들은 가지 않고 내 눈치를 봤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는 순간 나갔던 학생이 예쁜 꽃다발을 들고 교실로 다시 들어왔다. 학생들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그날은 5월 15일이었다. 베트남은 스승의 날이 11월에 있고 작년에도 11월에 스승의 날 꽃다발을 받았었는데 고맙게도 한국 스승의 날도 챙겨 준 것이다. 작년 5월 15일에는 일부 학생들에 페이스북 메시지로 축하 인사를 하긴 했지만 직접 축하받지는 않아서 이런 이벤트를 준비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너무 고마웠다. 어느덧 2018년 1학기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언제나 느끼지만 시간은 참 빨리 간다. 후에에서 내가 머물 시간도 빨리 갔다. 하루하루가 아쉬운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