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엄마에게 가장 편한 딸
우울증은 가족도 힘들게 한다
엄마는 웃는 일이 없어졌고 매일매일 불안해하며 살았다. 엄마의 마음이 이렇게 불안정해진 데에는 아빠의 탓도 있었다. 엄마와 아빠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건 틀림없다. 그런데 아빠는 우리 세 남매는 자상하게 대하면서도 엄마에게는 그러지 않는다. 말투를 예를 들면, 내가 배가 아프다고 하면 아빠는 "언제부터 아팠어? 병원에 가 봤어? 병원에 가야지. 지금은 좀 괜찮니? 밥은 먹을 수 있겠어? 아휴 아파서 어떡하니."라고 말한다면, 엄마에게는 "약 먹었어? 아프면 병원 가든지."가 끝인 셈이다. 뒤에서는 우리한테 엄마 아프니까 신경쓰지 않게 티비 소리를 줄이라고 한다든지 집안일을 다 한다든지 해도 말이다. 특히 엄마의 시댁인 우리 친가와의 갈등이 있을 때 아빠의 이런 태도는 엄마를 더 섭섭하게 했다. 옛날부터 엄마가 친가에서 상처를 받으면 아빠는 엄마보고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이해해야지 어쩌겠냐 식으로 거의 엄마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자식은 없어도 남편 없이는 절대 못 산다고 할 정도로 아빠를 사랑하는 엄마는 아빠의 이런 태도를 많이 섭섭해했다.
엄마의 우울증이 시작된 2017년 초에는 이제까지 쌓여 왔던 엄마의 섭섭함이 아빠에게 한꺼번에 터졌었다. 나는 엄마가 이해가 되어 엄마의 편에서 아빠를 질책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서로 제대로 대화를 해서 풀라고 화해의 자리를 만들려고 했는데, 그때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그러지 못했다. 엄마도 같은 처지가 된 아빠가 불쌍하다고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아빠에게 쌓인 마음이 없어진 건 아니었고 아빠의 무심한 말투도 여전했기에, 아빠는 엄마에게 마음으로 의지가 되는 사람이 못 되었다.
언니는 다른 지역에 있는 회사를 다니고 있어서 자주 와야 한 달에 두 번 오는 사람이었고, 동생은 군대에 있었다. 그래서 엄마에게는 내가 가장 의지가 되는 가족이었다. 사실 언니와 동생 모두 같이 살 때도 엄마는 내가 제일 편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동생은 엄마와 마음 터놓고 이야기하기에는 나이가 어리고, 언니는 엄마와 성격이 안 맞았다. 반면에 나는 성격이 편한 편이었고 부모님과 문제가 있었던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엄마는 속상한 일과 불평불만이 있으면 나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그런데 나도 내가 스트레스 받고 정신없을 때는 엄마의 한탄을 들어주기가 힘들었다. 언젠가는 엄마에게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안 하면 안 되겠느냐 말한 적이 있는데, 엄마는 "그럼 어떻게 해. 니가 제일 편한데. 너한테밖에 이야기할 사람이 없잖아." 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2017년 초에도 나는 계속 엄마의 말을 들어 줬다. 아빠에게 섭섭한 마음, 외할머니를 보낸 슬픔을 모두 십분 이해했고 허리로 고생하는 엄마가 불쌍했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말을 들어주려고 했다. 하지만 매일매일 엄마의 우울한 감정을 받는 내 마음도 점점 지쳐갔다. 언니와 동생이 다른 지역에 있기 때문에 나 혼자 갈등으로 냉랭해진 집안 분위기 속에서 엄마 아빠를 화해시키려고 노력하는 것도, 장례식 후 더 가라앉은 집안 분위기를 되돌리고 불안해하는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해 밝은 척하는 것도 점점 힘들어졌다. 나도 사랑하는 외할머니와 할아버지와의 이별로 마음이 울적했는데 말이다.
더군다나 이때는 베트남 후에(HUE)로 파견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3월에 파견을 가야 했는데, 비자 준비 기간이 길어져 4월에 파견을 가게 되었다. 엄마는 파견이 늦어져서 다행이라고 했고, 나도 엄마도 엄마지만 내가 나가면 엄마와 단 둘이 있어야 하는 아빠를 위해서라도 조금이라도 옆에 더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긴 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 분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파견을 빨리 나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엄마, 나 잘 다녀올게. 허리 치료 잘하고 잘 자고. 불면증은 엄마 마음이 불안해서 그런 거 같으니까 마음 편하게 가져."
"네가 없으면 나는 어떡하니. 아휴... 잘 다녀와라."
엄마는 마지막까지 나의 부재를 걱정했다.
<세종학당 파견교원 이야기> 매거진에서도 썼듯이 베트남 후에에서 나는 잘 지낸 편이었다. 처음에는 낯선 문화와 너무 더운 날씨에 적응하느라 좀 진이 빠졌지만 점점 익숙해졌다. 그리고 수업은 재미있었고 학생들하고도 잘 지냈다. 부모님과 카톡은 자주 했고 회상통화는 최소한 이주일에 한 번 했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의 표정은 안 좋아 보였다. 근황을 묻는 내 질문에 대한 대답도 항상 똑같았다.
"엄마 요즘 허리는 괜찮아? 잠은 잘 자?"
"항상 똑같지 뭐... 잠도 더 못 자는 것 같아. 큰일이다."
나는 엄마 아빠의 걱정을 덜기 위해 통화할 때마다 밝은 모습을 많이 보여줬지만, 엄마는 웃을 때도 힘겨운 표정으로 웃었다. 언니는 나한테 요즘 엄마가 많이 힘들어하시는데, 자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며 죄책감을 느꼈다. 언니가 회사 일이 힘들어서 퇴사를 하고 집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언니는 부모님께 죄송해서라도 공무원 시험에 붙으려고 필사적으로 공부했다. 꼭 언니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엄마의 우울은 더 심해지고 있었다.
"나 정신병원 다니기 시작했어. 우울증이래."
"아 그래? 잘했어. 정신병원이라고 해서 정신이 많이 이상한 사람들만 가는 곳도 아니라더라. 아프면 병원에서 치료받아야지. 불면증도 우울증 때문에 그런 거래?"
"응. 그래서 요즘 수면제 먹고 자고 있어."
"그런데 그거 계속 먹으면 몸에 안 좋은 거 아냐?"
"응... 걱정이다. 이러다가 평생 수면제 먹고 자야 되는 건 아닌지."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계속 하니까 더 우울한 거야. 긍정적으로 생각해. 괜찮아지겠지!
"괜찮아져야 할텐데 걱정이다..."
이때 나는 우울증을 그저 '우울한 정도가 심한 증세'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엄마를 진심으로 걱정하긴 했지만 우울증이라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병원에서 치료도 받고 있으니 언니가 시험에 합격하고, 엄마가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면 괜찮아지겠지 싶었다. 정말 나는 우울증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