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국어 교원 May 18. 2023

3. 힘들어하는 가족들

우울증은 가족도 힘들게 한다

언니는 정말 열심히 공무원 시험 준비를 했다. 옆에서 부모님이 많이 내조를 해 주시는 만큼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붙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필사적으로 공부했다. 엄마와 아빠는 항상 고생하는 언니를 걱정했고 나도 그랬다. 이번이 아니면 다음은 없다는 생각이라서 언니 마음의 부담은 너무나도 컸다. 언니가 이번 시험에 떨어지면 무너져버리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들어 무서웠다. 그런데 다행히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그것도 상위권 점수로 말이다. 시험에 합격했다는 언니의 메시지를 받자 마자 너무 기뻐 언니에게 전화했다.


"언니... 정말 합격이야? 너무 축하해. 다행이다. 어떡해 나 눈물 나와."

"... 이거 기쁜 일 맞는 거지? 나 기뻐해도 되는 거지?" 

"무슨 소리야 당연히 기쁜 일이지! 이제 엄마 아빠도 마음 편하시겠다. 언니 잘했어 정말 고생했어."

"나 잘한 거지? 니가 그렇게 기뻐해 주니까 너무 고마워. 나 잘한 거 맞구나..."


축하한다는 내 말에 언니의 반응이 이상했지만 너무 좋아서 현실 감각이 없겠거니 했다. 그날 저녁 부모님과 영상 통화를 했다. 아빠의 얼굴은 오랜만에 밝아 보였지만 엄마는 여전히 표정이 어두웠다. 언니가 시험에 합격해서 이제 마음 놓이지 않느냐, 엄마도 좋지 않으냐 하니 엄마는 힘겨운 어투로 내 말에 마지못해 동의할 뿐이었다. 

 

나중에 언니에게 들으니, 시험 합격을 확인하고 어안이 벙벙해진 상태로 엄마에게 합격했다고 말했는데, 엄마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래? 그럼 이제 7급 시험 준비하면 되겠네."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순간 언니는 자신이 그렇게 힘들게 공부해서 시험에 합격한 게 별거 아닌 건가, 이게 기뻐할 일이 전혀 아닌 건가 싶어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내가 언니에게 전화를 했던 것이었다.


엄마는 예전부터 나와 언니에게 학업 스트레스를 많이 줬다. 엄마는 본인이 어렸을 때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 학교를 다니지 못했던 것에 대한 상처가 큰 사람이었고, 그 상처를 자식을 통해 극복하려고 했다. 언니는 중고등학교를 공부에만 매진했다. 나와 언니가 중고등학교 시절 엄마는 항상 자신이 못한 공부를 우리가 대신 잘해야 한다고 누누이 말했고, 우리 성적이 떨어지면 자신을 실망시켰다고 혼을 냈다. 언니는 학창 시절 내내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는데,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압박도 상처도 더 받았다. 


시간이 지나고 엄마는 과거의 욕심이 부질없었다는 것을 깨닫고, 언니를 너무 힘들게 한 것을 진심으로 반성했다. 하지만 언니는 장녀로서 동생들에게 모범을 보이고 부모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과거에 성적 스트레스로 받았던 상처가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엄마는 또 언니에게 상처를 준 것이었다. 엄마는 언니가 원래 목표한 것은 9급이 아니라 7급이라서 그랬다고, 9급 시험을 쉽게 본 게 아니라고 했지만 다른 가족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아빠도 애가 힘들어한 걸 옆에서 다 봤으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느냐고 엄마에게 화를 냈다.


나는 그나마 공부를 잘하는 편이 아니었고 둘째였기에 상대적으로 스트레스를 덜 받았지만, 엄마는 나에게도 학업과 관련해서 상처되는 말을 많이 했다. 나는 언니의 전화를 받고, 엄마가 과거에 했던 모진 말들이 생각 나서 화가 났다. 


'엄마는 도대체 만족을 몰라. 우울하다는 것도 일상에 만족을 못 해서 그런 거 아냐? 생각해 보면 엄마는 항상 그랬어. 항상 '남들은'이라고 말하잖아. 남들은 몇 년에 한 번 유럽 여행을 가는데, 남들은 딸이 생일 선물로 몇백 만 원 준다던데! 그런데 엄마가 말하는 '남들'은 항상 엄마보다 사정이 좋은 사람들뿐이잖아?'


허리도 이제 많이 괜찮아졌다고 하니 언니만 시험에 합격하면 우울증도 나아질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우리 가족은 엄마의 우울증에 계속 힘들어했다. 동생은 군대에서 제대하고 나서 대학 근처에서 자취를 했고, 나는 베트남에서 문제없이 살고 있었던 데다가 집과는 2주에 한 번만 통화하는 정도이니 별로 안 힘들었지만, 아빠와 언니는 아니었다. 언니는 항상 입맛이 없다는 엄마를 위해 맛있는 음식을 종류별로 사 주고 옆에서 효도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고, 아빠도 엄마에게 최대한 맞춰주려고 했다. 하지만 엄마의 우울은 나날이 깊어갈 뿐이었다.


언젠가는 가족들이 외가 식구들과 모임을 했었는데, 그때조차도 엄마의 표정은 계속 어두웠다고 한다. 식사 도중에 아빠가 외진 곳으로 가길래 언니가 따라갔더니, 아빠가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고 한다. 엄마가 그렇게 좋아하는 친정 식구들과 있을 때조차도 우울해하는 걸 보고 너무 속상했다고 한다. 아빠는 가족들에게 항상 굳건한 모습만 보여주려고 하고 우는 일이 거의 없는 사람인데, 그런 아빠가 울었다고 하니 내 아픔도 너무 아팠다. 가족들이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내가 귀국하면 엄마를 옆에서 많이 챙겨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내 마음에는 엄마에 대한 불만과 엄마를 도와주고 싶다는 양가감정이 같이 자랐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