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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국어 교원 May 16. 2023

1. 우울증, 그 시작

우울증, 그 시작

"어머니의 우울증이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아세요?"

"네. 2017년 초에 외할머니하고 친할아버지 장례식이 연달아 있었고 그때 엄마가 허리디스크도 터졌어요. 그때부터 우울증이 생겼어요."


의사 선생님은 엄마를 바라보며 둘째 따님은 정확하게 알고 다고 말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때 엄마를 바로 옆에서 챙긴 게 나였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때문에 나도 힘들었으니까.


지금부터는 엄마의 우울증이 시작된 때부터 엄마와 같이 정신병원에 오기까지의 긴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2017년 1월,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외할머니는 돌아가시기 14년 전 중풍으로 한쪽 다리가 마비되었다. 그 후 큰외삼촌 댁에서 몇 년 지내시다가 7년 정도는 요양원에서 사셨다. 내가 어렸을 때 외할머니는 항상 당차면서인자하시고 웃음이 많은 분이셨는데, 중풍에 걸리셨을 때부터는 항상 우시기만 했다. 면회를 가면 내내 울적한 표정을 지으시다가 우리가 갈 때가 되면 아이처럼 엉엉 우시곤 하셨다. 그런 외할머니를 보는 내 마음도 아팠는데 엄마는 얼마나 아팠을까.


외할머니는  엄마가 우리 세 남매를 낳았을 때 모두 산후조리를 해 주셨다. 그렇다고 우리가 외할머니댁과 아주 가까운 것은 아니었다. 나와 여섯 살 차이 나는 남동생이 태어났을 때 외할머니가 항상 우리 집에 와서 엄마를 보살피고 우리 세 남매를 챙겨 주셨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철없던 나는 엄마가 아닌 외할머니가 나를 유치원까지 데려다주는 게 싫어, 할머니랑 같이 가기 싫다고 징징거리고 (지금은 너무나도 그립고 먹고 싶은) 외할머니의 된장찌개가 먹기 싫어 울었다. 그럴 때마다 외할머니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아, 너네 엄마가 지금 얼마나 힘든지 알아?!"


자기를 힘들게 해서가 아니라, 자기 딸을 힘들게 해서 손녀를 꾸짖는 것이었다. 이렇게 엄마를 사랑해 주신 외할머니였기에, 외할머니를 생각하는 엄마의 마음도 각별했다. 이모와 삼촌들은 여섯 남매 중에 엄마가 제일 외할머니를 잘 챙겼다고 인정했다. 외할머니께서 마지막으로 머무셨던 요양원은 우리 집 근처였는데, 엄마는 틈만 나면 먹을 것을 싸 가서 말동무를 해 드렸다. 외할머니는 연세도 90세가 넘으셨고 돌아가시기 한 달 전부터 산소 호흡기에 의존하셨기 때문에 보내드릴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은 충분했다. 엄마도 전부터 자신은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후회가 없다고, 돌아가셔도 많이 울지도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실제로 외할머니가 임종하신 그 순간 엄마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서는 꽤 담담했다. 그런데 장례식 중 입관을 할 때, 엄마는 외할머니를 보며 가슴을 부여잡고 통곡했다. 저렇게 울다가 탈진하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나는 외할머니 보내는 것도 슬펐지만, 입관식 때는 엄마가 안타까워 울었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기억도 안 나는 아주 어렸을 때, 친할머니는 내가 중학생 때 돌아가셨었다. 이제 우리한테 조부모는 친할아버지만 남아 계셨다. 외할머니의 장례식이 끝나고, 엄마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이제 부모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은 자신의 시아버지인 우리 할아버지밖에 안 계시니, 시아버지를 진심으로 아버지처럼 여기고 잘 대해드릴 거라고.


친할머니에게 우리 엄마는 항상 마음에 안 드는 며느리였다. 우리 아빠는 시골에서 혼자 힘으로 공부 잘하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대학교에 들어가 4년 내내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그리고 교사가 되어 비록 월급은 적지만 안정적인 생활을 했다. 할머니는 아빠가 대학교에 합격했을 때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자랑을 했다고 한다. 할머니 입장에서 그런 자랑스러운 아들에 비해 초등학교만 나오고 중학교 고등학교는 검정고시만 본 우리 엄마는 부족해 보였을 것이다. 게다가 아들만 낳아도 부족한데 첫째와 둘째를 딸을 낳았으니 얼마나 마음에 안 들었을까. 어렸을 때 친가에서 엄마는 항상 시댁 식구들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었다. 친가 모임 때 엄마가 진심으로 즐거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달랐다. 할아버지는 무뚝뚝하시긴 해도 며느리들을 딸처럼 생각하셨고, 은근슬쩍 잘 챙겨주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2년 전에 식도암에 걸리시고 목에 구멍을 뚫으셔서 말을 못 하셨다. 외할머니의 장례식이 끝나고 설날을 맞아 큰집에 갔는데, 소파에 누워 계시던 할아버지가 엄마를 보자 몸을 벌떡 세우셨다. 그리고 말 대신 손짓과 표정으로 다른 누구보다 먼저 엄마를 위로해 주셨다. 엄마는 그런 할아버지에게 진심으로 효도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외할머니를 보내드리고 한 달 후 할아버지도 돌아가셨다. 갑작스러웠고 너무 슬펐지만, 할아버지 또한 고령이었고 암 치료도 받으셨었기 때문에 아주 큰 충격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엄마 아빠가 덜 슬퍼한 것은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고 아빠는 식탁에서 혼자 술을 마시며 쓸쓸하게 말했다.


"이제 엄마 아빠는 고아야..."


나는 아빠 나이가 이제 곧 환갑인데 무슨 고아냐고, 고아는 어린아이들만 하는 거라고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그렇게 말할 것을 후회했다. 단어 그대로의 의미로 고아라는 게 아니고, 고아가 된 느낌이라는 뜻이었는데 하고 말이다. 그 순간 아빠의 내면은 정말로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였을텐데. 부모의 보살핌을 받는 게 아닌 부모를 챙겨야 하는 나이가 돼도, 부모의 존재 자체는 삶의 어떤 부분을 지탱해 주고 있는, 심적으로 기댈 수 있는 기둥이 되는 것 같다. 그런 존재를 한 달 간격으로 모두 보내드려야 했으니 엄마 아빠가 느끼는 공허함은 아주 컸을 것이다.


특히 엄마에게는 더 힘든 시간이었다. 이별의 슬픔도 큰데, 두 번의 장례식으로 그전부터 안 좋았던 엄마의 허리가 더 안 좋아진 것이다. 허리디스크였는데, 장례식 전까지는 그래도 조심히 관리하며 잘 지냈었다.


엄마에게 디스크란 공포의 존재였다. 예전에 목디스크로 오래 고생하다가 입원을 하고 수술도 받았었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우리 세 남매가 어렸을 때부터 공장에 다녔다. 우리는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부족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엄마는 어렸을 때 돈이 없어 학교를 못 다닌 게 한(恨)인 사람이었고, 우리 세 남매는 돈이 없어 하고 싶은 것을 못하는 상황이 없게, 부족함 없이 키우고 싶어 했다. 그래서 일찍 일어나 가족들이 먹을 아침을 준비하고 공장에 나가 일하고 저녁에 퇴근해서는 저녁밥을 차리고 남은 집안일을 하다가 잠드는 일상을 반복하면서도 우리에게 항상 미안해했다. 남동생이 한창 엄마 손이 필요한 시기에 잘 챙겨주지 못하고 일만 했다고, 돈 아낀다고 자식들이 먹고 싶어 하는 거 다 못 사줬다고, 학교 행사 때 일하느라 참석 못 했다고.

 

이런 엄마의 수고가 쌓이고 쌓여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일 때 디스크로 돌아왔다. 디스크 때문에 한동안 일도 일상생활도 못하게 되어 엄마는 항상 짜증을 냈고 우울해했다. 다행히 수술 후에 괜찮아지긴 했지만 이 기간은 엄마한테 아주 힘든 시기였다. 집안일은 아빠가 많이 담당했었고 나도 설거지와 청소를 평소보다 더 많이 했는데, 사실 당연히 해야 되는 거고 아빠도 나도 엄마가 미안해할 일이 아니라고 했는데도 엄마는 미안해했다. 아직 어린 동생과 고3인 언니를 못 챙기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건데도 죄책감을 느꼈다. 그리고 무엇보다 디스크 때문에 너무 아파했다. 너무 힘들어서 몇 년 동안 다니지 않았던 교회를 다시 다니고 독실한 신도가 될 정도였다.


 힘든 시기가 있었기에 엄마에게 디스크는 정말 무서운 병이었다. 그런데 두 번의 장례식을 치르고 장례식장의 딱딱한 바닥에서 자며 엄마의 허리 디스크가 심해진 것이었다. 사실 엄청 심한 정도는 아니었는데, 엄마는 엄청 심한 정도로 걱정하고 두려워했다.


당시 일을 쉬고 있었던 나는 엄마와 같이 서울에 있다는 유명한 척추 전문 한방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기도 했다. 병원에서는 심각한 정도가 아니고 도수치료를 꾸준히 받으면 된다고 했지만 엄마는 불안해했다. 입원할 정도가 아니라고 했는데도 입원을 알아봤다. 입원은 짧게 해도 몇백만 원이 들었다. 나는 옆에서 엄마한테 이건 아니라고 했다. 너무 비싸기도 하고, 의사 선생님도 입원할 정도는 아니라고 하셨으니까. 하지만 엄마는 버스로 편도 두 시간이 걸리는 서울을 오고 가는 게 무섭다고 했다. 그러다가 허리디스크가 더 심해지면 어쩌냐고 말이다.


나는 그런 엄마에게 공감이 되기도 했고 안 되기도 했다. 엄마가 목디스크로 고생을 했었으니 이러는 게 이해는 되는데, 인터넷에서 찾아본 정말로 허리디스크가 심한 사람들과 다르게 엄마는 문제 없이 걸어 다니고 아주 오래만 아니면 의자에 잘 앉아 있는데도 너무 불안해하니까 말이다. 엄마는 일상생활 내내 허리를 불안해했다. 이 불안감은 불면증까지 만들어냈다. 엄마는 불안해서 잠이 안 온다고 했다. 나를 포함한 다른 가족들은 엄마에게 말했다. 그렇게까지 걱정할 일 아니고 엄마가 괜히 불안해하는 거라고. 청주에서도 충분히 치료할 수 있는데 왜 서울까지 가냐고. 마음을 제발 편하게 가지라고 말이다. 그렇게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는 갱년기에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연이은 장례식, 허리디스크, 자신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가족들의 태도에 엄마게 우울증이 찾아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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