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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국어 교원 May 24. 2023

9. 엄마, 같이 산책하자

엄마와 같이 우울증에 맞서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엄마에게 가서 잘 잤느냐고 물었다. 그전에는 어차피 대답은 언제나 똑같이 '잘 못 잤어'거나 '잘 잤는데 이러다 또 못 잘까 봐 불안해'일 것이 뻔했기에 굳이 묻지 않았었다. 엄마는 전날처럼 삶을 포기한 듯한 얼굴이었고, 역시 잘 못 잤다고 대답했다.


"괜찮아 엄마. 좋아질 거야."


나는 엄마를 안아 주었다. 엄마의 아침이 불안이 아닌 안정으로 시작되길 바랐다.


나도 우울증 혹은 그 근처까지 갔었지만, 우울증 환자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도와줘야 할지 잘 몰랐다. 엄마가 죽고 싶다고 한 다음 날, 친한 선생님과 약속이 있었다. 그 선생님과 밥을 먹으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물어봤다. 선생님은 같이 산책을 해 보라고 조언해 주셨다. 앉아서 마주 보고 이야기하면 이야기가 끊길 때 어색한 분위기가 될 수도 있는데, 산책은 걷는 행위를 계속하기 때문에 이야기가 끊겨도 상관이 없다는 장점이 있고, 우울증 환자들은 얼굴을 마주 보는 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데 산책은 그럼 부담도 없다며 말이다.


다행히 엄마는 매일 산책을 하는 사람이었다. 저녁 식사 후에 산책을 30분 정도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씻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자는 게 일상이었다. 산책을 좋아해서 매일 한 것은 아니었다. 운동이 우울증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하여 엄마는 꾸준히 헬스클럽에서 간단한 운동이라도 하곤 했었는데, 우울증이 극심했던 이 시기에는 운동을 할 기운이 나지 않아 최소한 산책이라도 한 것이었다.


"엄마, 같이 산책하자!"

"네가? 너 수업해야 하잖아."

"지금은 7시고 수업은 8시에 시작하니까 시간 충분해. 앞으로 산책 같이 다니자. 그래도 돼?"

"... 그래."


나는 산책을 하는 내내 엄마의 손을 잡았다. 엄마는 아주 옛날부터 누군가의 손을 잡으면 그 손을 계속 꼬집고 손톱으로 누르는 습관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 왜 안 그러냐고 하니, 그럴 힘이 하나도 없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엄마는 미세하게 손을 떨었고, 선선한 날씨였는데도 손에 땀이 났다. 우울증이 심해진 후로 계속 그랬다고 했다. 손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엄마가 지금 상태가 얼마나 안 좋은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손에 땀이 맺히면 손을 떼고, 마르면 다시 잡고 산책을 했다. 산책을 하는 내내 우리는 오랜만에 긴 이야기를 나눴다.


"엄마,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

"무슨 말."

"아무 말이나. 그냥 하고 싶은 말 해. 나 엄마 이야기 들어주고 싶어."

"없어... 하고 싶은 말이 뭐가 있겠어."

"오늘 있었던 일이나, 지금 심정, 서운했던 이야기 다."

"서운한 게 뭐가 있겠어. 나 때문에 네가 더 힘들었지. 심정은... 여전하지 뭐."

"일은 어때? 요즘 기운이 너무 없어서 일 다니기 힘들지 않아?"

"아니야. 오히려 일을 해서 더 좋아. 일이라도 해야 내가 살아있는 것 같고... 또 OO(직장 동료)가 얼마나 잘해주는지 몰라. 나 우울증 걸렸다고 많이 챙겨주고, 위로해 주고, 옆에서 웃긴 얘기도 많이 해. 내가 걔 때문에 많이 웃었어."

"그래, 엄마는 동료 정말 잘 만난 것 같아. 엄마 얘기 들어보면 나도 그분한테 참 감사해."

"나는 가족도 잘 만나고 동료도 잘 만나고... 그런 거 생각하면 내가 정신을 차려야 되는데 이러고 있는 게 너무 미안하고 나 자신이 한심해."

"아니야, 그런 생각하지 마. 엄마는 아픈 거야. 제일 힘든 건 엄마잖아."

"평생 이러고 살아야 하나 싶어서 무서워."

"좋아질 거야. 참, 병원 옮겼다고 했지? 새로 다니는 병원은 어때?"

"좋아. 의사 선생님이 말씀을 참 편하게 하셔. 전에 다니면 병원은 의사가 그냥 형식적으로 진료 보는 거 같아서 좀 불편했는데, 이번 선생님한테는 마음이 편해져서 하고 싶은 말도 편하게 하게 돼."

"정말 다행이다. 나는 엄마 마음 불편하게 했는데..."

"아니야. 엄마가 잘못한 거야. 그런 생각하지 마."

"우울증은 의사한테 맡기고, 나는 내가 잘 사는 모습 보여주는 게 엄마한테 도움이 되는 거라고 생각했었어. 그리고 솔직히 전처럼 우울증에 나도 영향을 받는 게 무서웠어. 그래서 그동안 엄마를 신경 안 썼어. 미안해. 더 심해지기 전에 내가 챙겨 줬어야 하는데."

"내가 너희를 챙겨야지..."


문득 옛날 일이 생각났다. 고등학생 때, 양쪽 무릎 인대가 늘어나고 염증이 찼던 적이 있었다. 오래 아프지는 않았지만, 한동안 무릎을 굽히지 못해 엄마가 내 발을 씻겨 주었다. 그때의 느낌이 아직까지 생생히 느껴진다. 아픈 딸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아주 소중하고 사랑스럽게 만지는 느낌... 엄마가 언니와 나에게 공부를 강요하고 짜증은 자주 낼지언정,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은 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나는 아무리 딸이라도 발을 매일 그렇게 정성스럽게 씻겨 주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내가 평생을 아팠어도 우리 엄마는 그렇게 매일 내 발을 정성스럽게 씻겨 주었을 것이다. 이때의 기억을 말하며 고마웠다고 하니, 엄마는 그걸 아직도 기억하냐며 그건 엄마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했다. 글쎄, 나는 당연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엄마는 나를 많이 사랑해 줬는데, 나는 엄마 아플 때 외면하려고 해서 미안해. 이제 난 괜찮아. 그러니까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다 털어놔. 내 욕을 해도 돼. 내가 엄마가 기댈 수 있는 기둥이 되어 줄 거야."

"고마워. 그런 말을 해 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돼."


산책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기 전, 엄마는 교회에 갈 테니 나 먼저 집에 들어가라고 했다. 나는 대학생 때 이후로 교회를 안 다니고, 예전에 엄마가 교회 좀 나오라고 화를 낸 적이 많아서 교회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몇 번 대들기도 했었는데, 그 때문에 엄마는 나에게 교회 이야기를 잘 안 하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엄마를 혼자 두기 싫었다.


"나도 같이 갈래."

"... 교회에 간다고? 괜찮아?"

"괜찮아. 엄마랑 같이 있을래."


교회에 들어간 엄마는 불 꺼진 예배당 단상 아래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엄마는 하루 동안 본 모습 중에서 기도를 올리는 모습이 가장 힘이 있어 보였다. 그만큼 열정적이고 간절하게 기도를 올렸다.


"하님 아버지, 오늘 제 딸이 저를 도와주겠다고 같이 산책을 나왔습니다. 저에게 이런 소중한 딸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딸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 가족이 저 때문에 힘들어하지 않도록 저를 구해주시옵소서.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옵소서.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발... 저에게 당신의 권능을 보여주시옵소서!"


엄마는 '아멘'을 연신 외치며 울었다. 내 눈에도 눈물이 조용히 흘렀다. 나는 엄마 옆에 무릎 꿇고 거의 15년 만에 조용히 기도를 했다.


'들으죠? 엄마의 기도를 들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아멘.'


엄마는 매일 산책이 끝나면 교회에 와서 이렇게 울며 기도했다고 한다. 엄마는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 하루 힘을 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고, 아침 점심 저녁을 먹기 전 기도하고, 산책 후에 교회에 와서 기도하고, 자기 전에도 기도했다. 원래도 기도를 자주 했지만, 우울증에 걸리고 나서 더 자주, 간절하게 했다.


그렇게 부정적인 생각만 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봐, 웃으려고 노력을 해 봐, 우울증에는 운동이 제일이라던데 이런 운동해 봐 저런 운동해 봐. 이거 먹어 봐 저거 먹어 봐 우울증에 좋대...


나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은 엄마를 위해 조언하고, 이것저것 추천하고, 엄마에게 노력을 하라고 했지만 엄마의 반응은 항상 시들했다. 그런데 사실 엄마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우울증을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힘이 없는데도 꾸준히 운동하려고 했고 먹기 싫어도 열심히 먹었다. 힘을 내기 위해 몸에 좋다는 음식과 영양제를 계속 찾아보고 먹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쉬운 일이지만, 엄마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렇게 매일 신에게 절실하게 빌었다. 자신을 구해 달라고.


그동안 우울증에 대해 잘 모르면서 함부로 조언한 것이 미안했다. 이제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집에 돌아와서 인터넷으로 우울증에 관련된 책을 찾아봤다. 마침 딱 나에게 필요한 책이 있었다. '<소중한 사람에게 우울증이 찾아왔습니다>(휘프 바위선 저/장혜경 역)'. 파킨슨 병과 치매로 우울증을 앓았던 부모님을 20년간 보살폈던 임상심리학자가 쓴 책이다. 이 책은 우울증 환자 가족인 나에게 위로도 되면서, 내가 엄마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세히 알려줬다. 다음 글에서는 이 책을 통해 내가 우울증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을 이야기해 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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