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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국어 교원 Mar 24. 2021

간략하게 읽는 몽골의 역사

몽골. 2016년 8월 기획 원고

몽골은 본격적으로 국가 형태가 나오기 전 여러 부족이 유목생활을 하며 살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시기의 몽골의 역사에 대해 몽골이 직접 기록한 책은 <몽골비사> 외에 거의 없습니다. 유목 민족이라는 특성상 역사를 기록해 논 것이 별로 없고 또 중국 청나라 시절에는 중국인들에 의해 몽골의 많은 역사책이 소실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기의 역사에 대해서는 중국, 터키, 러시아 역사책을 참고해서 알 수 있습니다.


몽골의 역사는 칭기즈칸 이전과 이후로 나눠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칭기즈칸 이전의 몽골은 부족사회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훈누(Хүннү), 돌궐, 선비, 위구르, 거란족이 스텝 지대(Steppe. 강과 호수와 멀리 떨어져 있고 나무가 없는 평야) 연맹체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이 중에서 훈누 제국이 제일 처음으로 생겼다고 합니다(기원전 209년).  훈누 제국은 기원 후 4세기까지 중국인들을 괴롭히며 존속했는데, 중국 역사에 나오는 흉노족이 바로 이 훈누족을 지칭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돌궐 제국은 중국과 비잔티움 제국 등에서 그 역사를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규모가 컸습니다. 돌궐 제국이 소멸하고 몽골 지역과 동부의 스텝 지대는 8세기까지 위구르족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위구르 제국은 840년에 멸망했는데, 이때 위구르 족의 일부는 오늘날의 신강(新彊) 지역에 몇몇 군소 왕국을 세우고 강력한 이웃에 필요에 따라 조공을 바치며 4세기 후 몽골제국에 흡수되기 전까지 살아남았습니다.


10세기 초에 만리장성의 국경 북쪽에 거주하던 반(半) 유목민족인 거란족은 몽골지역과 중국 북부 일대를 정복하고 중국 왕조인 ‘요(遼)’를 건국했습니다. 1120년에 거란족은 만주지역의 여진족에 의해 쫓겨났는데, 대다수 거란족은 중국 밖으로 추방되었지만 일부는 여진족이 세운 금(金) 조의 관직을 받고 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거란족이 완전히 멸망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금조의 정복 당시 거란족의 한 왕자는 사람을 모아 서쪽 중앙아시아까지 갔고, 그곳에서 카라키타이(Qara-Khitai. 영어로는 Black Cathay. '검은 중국‘이라는 뜻이다) 제국을 세웠습니다. 카라키타이 제국은 몽골족에게 정복당할 때까지 유지되었습니다.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점령한 사람이자 몽골제국의 초대 칸(Xаан. 황제)인 칭기즈칸의 원래 이름은 보르지긴 테무친(Боржигин Тэмүжин)입니다. 칭기즈칸이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한데, 몽골에서 기념하는 칭기즈 칸의 탄신일은 1162년 11월 14일입니다. 칭기즈칸이 태어날 무렵에는 금조의 지원을 받는 타타르족이 가장 영향력 있는 부족이었는데, 그들은 대대로 몽골족의 적수이기도 했습니다. 테무친의 아버지 에수게이는 타타르족과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지만 결국 타타르족에게 피살되었습니다. 이때 테무친의 나이는 겨우 9살이었고, 테무친은 어린 나이에 주변의 위협으로부터 족장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테무친은 콩기라트 부족의 보르테이와 결혼하고, 타타르족의 가장 큰 반대 세력이자 당시 몽골 전역에서 가장 강한 통치자였던 케레이트족의 칸 토그릴과 동맹을 맺어 족장의 지위를 확립했습니다.                                                                      

칭기즈칸 초상화(출처: 위키백과)


1206년까지 테무친은 몽골지역의 부족들을 무력으로 통합하였습니다. 정적들을 숙청하였고, 토그릴을 도와 타타르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습니다. 그리고 몽골 서부지역의 나이만족을 정복한 후 대족장회의인 ‘쿠릴타이’에서 몽골지역의 모든 튀르크계 몽골족이 이끄는 최고의 칸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칭기즈 칸은 1219년부터 서아시아에 원정하여 호라즘 왕조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남러시아의 스텝 지대까지 점령하였습니다. 이렇게 공격적으로 영토를 넓히던 칭기즈칸은 서하를 정벌하던 중 1227년 진중에서 병사하였습니다.     


칭기즈 칸의 뒤를 이어 칸이 된 오고타이 칸은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지금의 폴란드와 헝가리 지역까지 점령을 했습니다. 몽골 제국은 1241년 오고타이 칸이 사망한 후 몇 년의 혼란기를 겪다가 1260년에 쿠빌라이 칸의 치세가 시작된 후 다시 영토 확장을 시작하였다. 원(元)나라는 칭기즈 칸의 손자이며 몽골 제국의 제5대 대칸으로 즉위한 쿠빌라이 칸이 1271년 몽골 제국의 국호를 '대원'으로 고침으로써 성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쿠빌라이가 대칸의 지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쿠빌라이의 몽골 제국 전체에 대한 통솔력은 약해졌습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오고타이의 후손인 하이두가 쿠빌라이에 대항하여 자립하는 등 칸의 권위가 크게 변화합니다. 이러한 과정 끝에 여러 칸국이 생기고, 원나라는 몽골 제국 중 쿠빌라이의 후계자인 대칸의 직접 지배가 미치는 영역으로, 사실상 한정된 지배력을 행사하는 쿠빌라이 가문의 세습령이 되었습니다. 쿠빌라이 칸은  남송(南宋)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남송의 황족들을 몽골의 황족과 대등하게 대우했습니다. 그리고 도망친 남송의 유민들을 전멸시켜 중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침략하여 부마국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베트남과 일본 침략에는 실패했습니다.


쿠빌라이 칸 사후 30년 동안은 꽤 평화로웠지만 그 이후 10년 동안 파벌 다툼과 내전이 잇따랐으며, 이 기간에 대칸이 네댓 번 바뀌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연재해와 경제 위기, 농민 반란 등으로 원 제국은 서서히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결국 1340년 대규모 반란이 남부에서 일어나고, 후일 명조(明朝)의 태조가 된 주원장(朱元璋)의 군대가 원조의 마지막 황제 토곤 테무르를 1368년에 북경에서 축출하면서 원나라는 멸망했습니다.      


원나라 멸망 이후 여러 칸국이 없어지거나 유지가 되었습니다. 이슬람계였던 차가타이 칸국은 14세기 중반까지도 생명력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차가타이 칸국은 1370년 칸국 내의 소부족 출신인 티무르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모굴리스탄(mughulistan, 몽골족의 땅’)이라고 알려진 동쪽 지역에 있는 동 차가타이한국은 18세기 초에 중가르 칸국에 의해 멸망당할 때까지 존속했습니다. 티무르 제국은 16세기 초에 우즈베크의 샤이반 왕조에 의해 멸망하였습니다. 티무르 제국의 왕자 바부르는 우즈베크에서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인도까지 달아났고, 16세기 초에 무굴(Mughul) 제국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원나라가 멸망하고 명나라가 중국을 통치하는 동안 몽골에서는 다양한 부족연합의 지도력 아래 몽골제국을 부활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동몽골지역의 여러 민족, 특히 가장 중요한 할하족은 칭기즈 가문 대칸들의 후손에게 지배를 받았습니다. 서몽골의 주요 부족은 오이라트족이었습니다. 1449년에 오이라트족은 명나라 황제를 포로로 잡을 만큼 명조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습니다. 동몽골족의 알탄 칸은 티베트 불교를 몽골에 재도입하였는데, 티베트 불교는 ‘환생’을 믿고 이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알탄 칸은 쿠빌라이 칸의 환생으로 여겨지고, 당대 티베트 종교의 수장 소남 가초는 파스파의 환생이라고 여겨져 ‘달라이 라마’라는 호칭을 얻었습니다. 17세기에 할하족은 청(淸) 나라에 복종했고, 오이라트족은 1758년 청조(淸朝)의 건륭제에게 패망할 때까지 중국을 위협했습니다. 그 후 몽골족의 영토는 러시아 제국과 중화제국 사이에서 점차 분할되었습니다. 북쪽의 바이칼호 지역에 거주하는 부랴트족은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남쪽 지역은 중국의 감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19세기 말부터 청조가 쇠퇴하면서 많은 중국인이 몽골 남쪽 지역으로 이주했고, 해혁명 이후 내몽골자치구가 형성되어 몽골은 내몽골과 외몽골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1911년 청조가 멸망하자 할하족은 독립을 선언하며 복드 칸국(대몽골국)을 건국했습니다. 통치권은 우르가(오늘날의 울란바토르)의 젭춘담바 후툭투(복드 칸. Богд хаан)라는 최고의 ‘활불(티베트 불교에서 누군가의 환생이라고 지명된 사람)’에게 넘어갔습니다. 


몽골의 마지막 황제 복드 칸(Богд хаан)과 그의 황후


그러나 중국은 외몽골을 압박하며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에 크게 활동했던 사람은 담딘 수흐바타르(Дамдины Сүхбаатар) 장군인데, 수흐바타르는 러시아 혁명에 자극을 받아 몽골 인민당을 결성하고 독립을 위한 무장 투쟁을 했습니다. 1921년 일본의 지원을 받은 러시아 백군 군벌 로만 폰 운게른 슈테른베르크가 몽골의 수도 우르가를 무단 점령하고 괴뢰정부를 창설하자, 수흐바타르는 레닌의 도움을 받아 인민의용군을 결성하고 총사령관이 되어 적군(赤軍)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그는 운게른 군대를 무찌르고 7월 10일 후레(현재의 울란바토르)에 인민정부를 수립하고 스스로 국방장관이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30세에 요절했는데, 몽골인들은 그를 혁명의 아버지이자 독립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습니다. 현재 울란바토르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수흐바타르 광장에는 칭기즈 칸과 수흐바타르 장군의 동상이 있는데, 광장 뒤편에 위치한 정부청사 중앙에는 칭기즈칸 동상이, 광장 중앙에는 수흐바타르 동상이 있습니다.

                             

담딘 수흐바타르(사진 출처: 위키백과)
수흐바타르 광장에 있는 칭기즈칸(좌)과 수흐바타르(우) 동상


몽골은 1924년 국호를 몽골 인민공화국으로 정하고 공산주의 체제를 선택했습니다. 몽골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소련과 협력하여 승리하는 등 소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일본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 울란바토르 전망대인 자이승 승전기념탑입니다. 자이승 기념탑은 수흐바타르 광장과 함께 울란바토르를 상징하는 장소입니다.


자이승 승전기념탑


몽골은 소련이 해체되기 전까지 소련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민주화를 원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게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소련의 영향 아래에서 민주화 인사들은 소련에 강제로 연행되는 등 탄압을 받았습니다. 급기야 1989년 12월 몽골 민주연맹의 주도하에 아시아 공산국가에서는 최초로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고, 1990년 2월 18일 몽골 민주연맹을 주축으로 해서 몽골 민주당이 창설되었습니다. 결국 1992년 몽골 인민대회에서 사회주의를 완전히 청산하고 민주주의 노선 채택했고, 국명을 몽골 인민공화국에서 몽골로 변경했습니다.


몽골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몽골 국립박물관





*이 글은 2016년에 몽골에서 국립국어원의 국외통신원으로 활동하던 당시 쓴 기사입니다.

국외통신원의 편지 (brunch.co.kr)



참고 자료:

위키백과 ‘원나라’ 항목

https://ko.wikipedia.org/wiki/%EC%9B%90%EB%82%98%EB%9D%BC#.EC.97.AD.EB.8C.80_.EC.B9.B8.28.E6.B1.97.29     

위키백과 ‘몽골제국’ 항목

https://ko.wikipedia.org/wiki/%EB%AA%BD%EA%B3%A8_%EC%A0%9C%EA%B5%AD     

<몽골족의 역사> (데이비드 O. 모건 지음. 권용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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