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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국어 교원 Feb 18. 2021

나는 ‘너’가 아니고 ‘선생님’이야

만 4세 아이에게 존댓말 가르치기

2020년 5월, 전국으로 퍼진 코로나 19로 인해 다니던 대학교 한국어교육센터에서 계약 연장을 못하고 실업급여를 받으며 지낼 때였다. 3월에 다문화 교육지원센터 ‘찾아가는 한국어 교육’에 인력풀 강사 등록을 했었는데 5월 말에 연락이 왔다.   

   

“OO 병설유치원에서 한국어 교육을 신청했는데 하실 수 있으세요?”     

실업급여를 받고 있어서 돈 걱정은 크게 되지 않았지만, 경력이 끊겨서 나중에 취업을 못할까 봐 걱정이었던 나는 바로 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다문화교육지원센터에서는 병설 유치원의 담당 선생님이 따로 연락을 주실 거니까 연락이 오면 자세한 수업 일정을 조율하라고 했다.      


사실 걱정이 많이 되었다. 그전까지는 대부분 성인 학습자만 가르쳤었고 대상도 다문화가 아니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맡은 다문화 학생이 유치원생이라니? 내 주변에는 유치원생은커녕 초등학생도 없고, 다문화 학생을 가르친 경험이 있는 선생님도 A 선생님밖에 없었다. A 선생님은 내게 찾아가는 한국어 교육 인력풀 강사 등록을 추천해주신 분인데, 이미 그 프로그램 한국어 강사로 활동하고 계셨다.


OO 병설유치원 담당 선생님은 내가 가르칠 학생의 담임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나에게 학생에 대해 자세하게 말씀해 주셨다.


이름: 진수(가명)
나이 : 6살. 생일이 안 지나서 만 4세.
국적: 외국. 부모님은 모두 외국인
한국어 실력: 부모님도 아이도 한국어를 잘하고 웬만한 의사소통은 됨. 그런데 아이가 가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함.
특징 :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교사의 말도 안 듣는데 특히 놀이가 끝나고 정리하는 걸 안 함. 친구를 가끔 때려서 혼남. 개별 면담을 하면 그래도 괜찮은 편인데 단체 놀이에 전혀 참여하지 않음.  운동을 싫어함. 색종이를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함. 어른에게 반말을 함. 제멋대로이고 고집이 강함.

 

유치원 선생님에게 자세한 정보를 듣고 나니 더 걱정이 되었다. 언제부터 수업을 시작하냐는 질문에 담당 선생님은 ‘내일부터 하셔도 된다’고 했지만, 나는 준비할 시간이 필요해서 이틀 뒤에 나가기로 했다. 그 이틀 동안 A 선생님에게 다문화 학생, 특히 유치원생은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조언을 듣고 유아교육 분야였던 코이카 봉사단 동기에게도 궁금한 점을 이것저것 물어보고 도서관에서 관련된 책도 읽어 보았다.   

  

그렇게 살짝 긴장한 채로 OO 병설 유치원에 들어갔다. 유치원 선생님들이 나를 반갑게 맞아 주셨는데, 반가운 표정 속에 왠지 모를 안쓰러움이 느껴졌다. 진수의 담임선생님의 안내를 받고 진수를 보러 갔다. 진수는 교실에서 색종이를 접고 혼잣말을 하며 놀고 있었다. 선생님이 진수를 불렀지만 쳐다보지도 않았다.   

  

담임 선생님 : 진수야, 진수 선생님 오셨다. 어제 선생님이 진수 선생님 오실 거라고  이야기했지?
진수 : (중얼중얼....) 응? 응.
나 : 진수야, 안녕? 나는 진수 선생님이야. 진수하고 같이 놀러 왔어. 우리 같이 놀러 가자.

    

아이를 교실에서 데리고 나오는 게 힘들 줄 알았는데 의외로 진수는 벌떡 일어나서 내 손을 잡고 같이 우리가 공부할 교실로 갔다. 교실은 나와 진수만 썼다. 교실에 도착하자 진수는 살짝 당황하며 나한테 말했다.     


진수 : (선생님 의자를 가리키며) 여기 선생님 어디 갔어?
나 : 내가 선생님이야. 선생님은 진수만 가르칠 거야.
진수 : 너가 누군데?


아이가 반말을 한다는 건 알았지만 여섯 살 아이에게 ‘너’라는 소리를 들으니 살짝 당황했다. 하지만 아이는 정말로 다른 친구는 한 명도 없고 선생님과 자기만 있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고 내가 누군지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다. 아이 얼굴은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가득했다. 나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고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나 : ‘너’가 아니고 ‘선생님’이야. ‘선생님은 누구세요?’ 라고 해야지.

진수 : 응. 선생님은 누구세요?

나 : 선생님은 진수 선생님이야. 진수 몇 살이야?

진수 : 나는 여섯 살이지.

나 : 아, 진수 여섯 살이구나~


진수 : 그러는 너는?     


첫날은 아이에 대해 알아보고 아이와 친해지기 위한 시간으로만 보내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색종이만 계속 만지작거리며 노래를 부르는 것인지 혼잣말을 하는 것인지 중얼거리는 진수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좋아하는 놀이나 음식은 무엇인지, 가족은 몇 명인지, 선생님에게 궁금한 것이 있는지 등등. 진수는 ‘프레디의 피자가게’를 좋아한다고 했다. 나에게 ‘프레디의 피자가게’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해 주는데,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프레디의 피자 가게’가 아이들이 보는 만화 영화인가 보다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아이의 눈을 쳐다보며 웃으며 계속 듣고 호응해 주었다. 신기하게도 아이는 평소에는 반말을 하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걸 이야기할 때는 존댓말을 썼다. 그래서 더욱 아이가 하는 말을 잘 들어주고 이야기를 이어 갔다.

    

진수 : 프레디의 피자 가게는 경찰 아저씨가 골든 프레디 치카 보니 폭시 잡아요. 망치로 이렇게 잡고 이렇게 때려요.

나 : 아, 그렇구나. 그럼 경찰 아저씨가 나쁜 사람인 거야?

진수 : 응. 골든 프레디가 우웅 우웅 하고 토끼 보니는 (알 수 없는 말) 해요. 폭시가 (알 수 없는 말) 하고 밤에 경찰 아저씨가 이놈 해요.

나 : 그럼 진수는 거기서 누가 제일 좋아?

진수 : 토끼 보니 좋아요. 골든 프레디 좋아요.

나 : 그런데 걔네는 피자도 만드는 거지? 걔네가 만드는 피자는 어때?

진수 : 아! 아니거든!     


진수는 갑자기 짜증을 내며 휙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 버렸다. 왜 짜증이 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진수를 달래고 산책을 같이 하는 게 어떠냐고 했다. 그런데 진수는 ‘산책이 무섭다’고 했다. 진수에게 ‘산책은 무섭지 않아. 선생님하고 손 꼭 잡고 같이 다닐 거니까 괜찮아. 한번 나가 보고 무서우면 다시 들어오자’라고 달래자, 놀랍게도 순순히 따라 나갔다. 그런데 나오자마자 진수는 세상 모든 것이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신이 나서 이것저것 말하기 시작했다.   

   

진수 : 이거 봐! 꽃이야!

나 : ‘이거 보세요. 꽃이에요.’

진수 : 이거 보세요! 꽃이에요!, 우와, 차 엄청 많아! 여기 봐! 차가 인사하고 있어.

나 : ‘여기 보세요. 차가 서로 인사하고 있어요.’ 어, 진짜네! 차가 서로 인사하고 있네. 진수야, 어쩜 그렇게 멋진 생각을 했어? 진수 너무 멋있게 말한다!     


이렇게 주차된 차를 보고 진수는 '서로 인사한다'라고 했다. (출처: pngtree)


진수는 내 칭찬을 듣고 기분이 좋은지 방방 뛰었다. 이제 약속된 시간이 끝나고 진수 교실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진수는 가기 싫다고 떼를 썼다. 나를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교실로 가는 게 무섭다고 한다. 친구하고 놀기 싫단다. 나는 진수에게 산책이 무섭지 않듯 교실에서 친구하고 노는 것도 무서운 일이 아니라고 달랬지만 진수는 껌딱지같이 떨어지지 않았고, 결국 담임 선생님이 어르고 달래서 간신히 헤어질 수 있었다.


집에 와서 ‘프레디의 피자가게’를 검색해 봤는데, 알고 보니 아동용 만화영화가 아닌 공포 게임이었다. 피자가게에 살인마와 그 살인마에게 죽은 아이들의 영혼이 들어간 애니매트로닉스(Animatronics. 간단하게 말하면 로봇 인형)가 있고, 게임 플레이어가 5일 동안 경비를 서면서 그들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남는 게임이었다. 진수는 경비 아저씨를 경찰 아저씨라고 말한 것이다. 6살 아이가 이런 공포 게임을 좋아한다는 게 어이없었고, 이걸 보지 말라고 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그건 가정에서 해야 하는 일이라 내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진수와 친해지고 진수가 유치원 생활을 더 즐겁게 할 수 있도록 프레디를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프레디의 피자가게 유튜브 소개 영상. 깜짝 놀람 주의)


프레디의 피자 가게 등장 인물(출처:  게임《프레디의 피자가게 3》(Five Nights at Freddy's 시리즈))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선물 같았던 아이 진수. 나는 진수를 6월부터 10월까지 약 5개월 동안 담당했다. 진수를 못 본 동안 진수가 너무 보고 싶어 진수를 만나는 꿈까지 자주 꾸었다. 지난달 우연히 진수의 유치원을 지나는 길에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놀던 진수를 만났는데, 진수는 나를 보자 천사 같은 환한 미소로 나에게 달려와서 ‘선생님! 너무 보고 싶었어요! 이거 보세요. 제가 만들었어요.’라고 말하며 자기가 흙으로 만든 아이스크림을 보여 줬다. 감격의 짧은 인사를 끝내고 가는 나에게 ‘선생님, 이따가 와요!’라고도 말했다. 첫 만남에 나에게 ‘너’라고 말하던 진수는 이제 존댓말도 꼬박꼬박 쓰고, 친구들과 노는 게 무섭다는 진수는 이제 친구들과 한 무리가 되어 행복해한다.


앞으로 8편에 걸쳐 진수와 나의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나로 인해 바뀐 6살 아이의 이야기. 그리고 그 아이로 인해 바뀐 나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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