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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국어 교원 Apr 20. 2021

아프면 서럽다. 외국에서는 더

2017년 후에 세종학당 2학기

코이카 단원으로 몽골로 파견 갔을 때였다. 정식으로 내가 일할 기관에 파견되기 전에 안전 교육 때 들었던 이야기가 있었다.


단원 한 명이 배가 너무 아파서 병원에 입원을 했어요. 그때 너무 급해서 현지 의사에게 먼저 진찰을 받았는데, 그 의사가 단원의 맹장이 터졌다고 당장 바로 수술을 해야 한다고 강하게 말했다더라고요. 단원도 코이카 사무소도 이거 큰일 났다 싶어서 수술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죠. 맹장이 터진 거면 빨리 수술해야 되잖아요. 그때 코이카 국제협력의사 내과 선생님이 급하게 병원으로 오셔서 단원의 상태를 보셨는데, 글쎄 맹장이 터진 게 아니고 장염이라고 절대 수술하면 안 된다고 하시는 거예요. 결과적으로 장염이 맞았어요. 코이카 의사 선생님이 안 계셨거나 조금이라도 늦게 오셨으면 정말 그 단원은 수술대에 올랐을 거예요.

이 이야기를 들은 후 나는 ‘정말 심각하게 아픈 거 아니면 절대 병원에 가지 말자’고 다짐했다. 다행히 몽골에서 살았던 2년 동안 심각하게 아팠던 적은 없었다. 딱 두 번 병원에 갔는데, 한 번은 가래에 피가 계속 섞여 나왔을 때고 한 번은 금으로 때운 치아 보철물이 떨어졌을 때였다. 다행히 가래에 섞인 피는 날씨가 너무 건조해서 코 안 쪽이 헐어 나온 피였고, 몽골 울란바토르에 이비인후과 전공인 코이카 국제협력의사 선생님이 계셔서 그분께 진료받을 수 있었다. 치과도 울란바토르에 시설이 좋은 한인 치과가 있어서 거기에서 보철물을 다시 붙였다.


하지만 베트남 후에는 달랐다. 코이카 의사 선생님은커녕 한국어가 통하는 병원이 없었고, 도시라고는 하지만 시골에 가까운 도시였다. 현지 의료 시설이 안 좋은 것은 외국인인 나뿐만 아니라 현지인들도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파견 전에 혹시나 베트남에서 아프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많았다.


2017년 6월에 걱정하던 일이 터졌다. 설사와 복통이 너무 심했고 먹는 것마다 구토를 했다. 배 안에 큰 가시가 있어서 움직일 때마다 사정없이 쑤시는 느낌이었다. 식은땀이 났고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찜통 같은 더위에 배까지 아프니 정말 힘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으니 큰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해서 참았다. 아니, 사실 참지 않으면 병원에 가야 했기 때문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아픈 것보다 병원에 가는 게 더 무서웠다. K-MART에서 양반죽을 사서 점심으로 간신히 먹고, 집에서는 흰 죽을 끓여 먹었다. 그래도 구토감과 복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프니 부모님이 보고 싶고 엄마가 끓여 준 정성스러운 흰 죽이 먹고 싶었다. 부모님한테 전화해서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었지만 가뜩이나 걱정이 많을 텐데 내가 아프다는 사실까지 굳이 부모님께 알리고 싶지 않았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서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울지는 않았지만 울고 싶었다.


다행히 사흘 정도 지나자 아픈 것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아마 장염이었을 것 같은데, 장염도 참으면 저절로 낫는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한국에서는 감기만 걸려도 바로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약을 타 왔는데, 장염에 걸려도 참아야 하다니, 외국에서는 정말 조금만 아파도 무섭고 서럽다.


더 무서웠던 건 감기에 걸렸을 때였다. 2017년 여름에 감기 때문에 2주 가까이 고생을 했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감기약을 다 먹었는데도 낫지 않아 걱정이 많았다. 지금이면 감기 증상이 있으면 ‘코로나 19 아니야?’ 하겠지만, 그때는 ‘말라리아나 뎅기열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그때는 그냥 감기여서 2주가 지나고 자연적으로 괜찮아졌다. 하지만 2018년에는 정말 심하게 고생했었는데, 이때는 결국 그토록 가기 싫었던 병원에 가야 했다. 이때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다루려고 한다.


장염으로 추측되는 복통도 감기도 괜찮아진 어느 날, 아침을 먹다가 갑자기 딱딱한 것이 씹혀 깜짝 놀랐다. 나는 주로 아침을 빵이나 과자로 먹었기 때문에 딱딱한 것을 씹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조심스레 뱉어 보니, 그건 바로 금으로 때운 치아 보철물이었다. 그걸 보는 순간 식은땀이 나면서 정신이 멍해졌다. 내가 조금이라도 실수했으면 그걸 그대로 삼켜 버렸을 수도 있었던 거 아닌가. 그랬다면 뒷일이 어떻게 됐을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다행히 삼키진 않았지만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 됐다. 치과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시설이 열악하다 보니 치과를 믿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말이 전혀 안 통하니.


세종학당 운영요원 선생님께 근처에 치과가 있는지, 오후에 점심을 일찍 먹고 치과에 가줄 수 있는지 여쭤봤는데 다행히 근처에 치과가 있다며 같이 가서 통역을 해 주겠다 하셨다. 그런데 갑자기 운영요원 선생님 업무가 너무 많아져서 점심도 제대로 못 드실 정도가 되었다. 나는 다행히 그날 오후 근무를 하는 날이 아니었지만 운영요원 선생님한테 너무 죄송해서 할 수 없이 중급반 학생 쩜에게 연락을 했다. 쩜은 한국 유학을 준비하는 학생이었는데 중급반 학생 중에서도 한국어를 제일 잘했다.


나 : 쩜 씨, 미안한데 도와줄 수 있어요? 오늘 치과에 가야 하는데 통역이 필요해서요.

쩜 : 당연히 도와줄 수 있지요. 제가 세종학당 앞으로 갈게요. 선생님 헬멧 있으세요?


쩜은 내 연락을 받고 오토바이로 바로 세종학당에 왔다. 나는 쩜과 같이 운영요원 선생님이 알려주신 병원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갔는데, 병원은 아직 점심시간이 안 끝났다고 조금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나 : 그럼 우리 근처 커피숍에서 기다리고 있을까요?

쩜 : 아, 그런데 선생님... 혹시 시간 많으세요?

나 : 네. 오늘은 오후 근무가 없어서 시간이 많아요.

쩜 : 시간이 많으면 혹시 다른 데 가도 괜찮아요? 제가 작년에 진료받은 곳이 있는데 조금 멀어요. 그래도 새로 지은 곳이고 의사도 괜찮아요.

나 : 그런데 왜요? 거기가 더 좋아요?

쩜 : 여기는 국립 병원인데요... 음... 시설이 안 좋아요.


병원에 들어온 순간부터 쩜의 표정이 안 좋아 보여서 왜 그런가 했었는데, 시설이 안 좋은 곳이라서 그랬던 것이다. 국립 병원은 시설도 실력도 사립 병원보다 안 좋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쩜이 진료받았던 곳으로 갔다. 확실히 거기는 눈으로 보기에도 여기가 병원이 맞나 싶을 정도로 뭐가 없어 보였던 국립 병원보다 시설이 더 좋았다. 그런데 내가 따로 보관할 통이 없어 티슈에 싸 간 치아 보철물을 그대로 내 치아에 다시 붙이려고 하는 것이다. 깜짝 놀라서 쩜에게 ‘이거 깨끗하게 씻은 다음에 붙여 달라고 말해 주세요’라고 통역을 부탁했고, 치과 의사는 그제야 그걸 씻고 치아에 붙였다. 쩜은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내가 원하는 통역을 완벽하게 해 주었고 집으로 데려다 주기까지 했다. 유학 준비를 하고 있는 데다가 시험까지 있어서 바쁜 중에 나를 흔쾌히 도와주고, 본인 시간도 부족한데 나를 위해 멀어도 더 괜찮은 병원까지 데려다준 쩜에게 너무 고마워 맛있는 걸 사 먹으라고 돈을 주려고 했지만, 한사코 거절하는 바람에 주지 못했다.


아프면 서럽다. 외국에서 아프면 더 서럽다. 그런데 혼자 살고 있으면 더 더 서럽다. 외국에서 혼자 살면 주변에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는데, 아플 때는 그 감정이 몇 배가 되는 것 같다. 내가 옆에서 진심으로 걱정해주신 동료 선생님도, 한국에서 가져온 감기약이 떨어졌을 때 약국에서 약을 사다 준 운영요원 선생님도, 쩜 씨에게도 너무 고마웠다. 외롭고 힘든 외국 생활을 잘 지낼 수 있게 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주변 사람들의 따뜻한 온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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