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국어 교원 Apr 23. 2021

베트남 옛 왕조의 흔적

베트남. 2017년 7월 자유 원고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Nhà Nguyễn) 왕조(皇朝)는 세조(世祖)인 자롱(Gia Long)제를 시작으로 약 150년간 베트남을 통치했으며, 13대 황제까지 이어졌습니다(1802~1945). 응우옌 왕조는 후에 (Huế) 시를 도읍으로 정하고 왕궁인 다이 노이(Đại Nội)를 지었습니다. 다이 노이는 중국의 자금성을 모방하였는데, 길이는 640m고 넓이는 568m로 강력한 왕권을 상징하는 만큼 크고 웅장하게 지었습니다. 다이 노이는 1993년에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다이 노이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후, 후에 시는 역사 관광 도시가 되어 지금도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좌) 후에 왕궁 다이 노이 정면. / (우) 태화전(Điện Thái Hoà). 다이 노이의 정전(正殿)이다.
(좌) 황제 사당 / (우) 태황 태후전


응우옌 왕조는 국호를 월남(越南)으로 정했습니다. 그러나 월남은 베트남을 식민지화하려는 프랑스의 압박을 이기지 못했고, 결국 베트남은 1883년 제1차 후에 조약으로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습니다. 응우옌 왕조가 있는 곳은 월남 이전의 명칭인 안남(安南)으로, 북부는 통킹(Đông Kinh)으로 명명되었고, 황제는 실권이 없는 허울뿐인 황제가 되었습니다. 통치권을 빼앗긴 후에도 여러 근왕(勤王) 운동이 일어났고 응우옌 왕가도 프랑스에 대항했지만, 1945년 호찌민이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선포하면서 베트남 왕조도 모두 끝났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응우옌 왕조의 후손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먼저 프랑스에 통치권을 빼앗긴 시점부터 그 이후 황제들의 삶을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8대 황제 함흥히(Hàm Nghi)는 1884년 즉위하여 반 프랑스 운동을 주도했지만 프랑스의 강압으로 형 동카인(Ðồng Khánh)에게 왕위를 빼앗긴 후 프랑스 알제리로 유배당했습니다. 그는 알제리에서 프랑스 여성과 결혼하였고, 1943년에 사망하여 프랑스 도르도뉴(Dordogne) 지방에 묻혔습니다. 10대 황제 타이타인(Thành Thái)은 프랑스의 압력으로 퇴위한 후 아프리카 레위니옹 섬에 유배되었다가 사이공(지금의 호찌민)으로 돌아와 사망하였습니다. 11대 주이떤(Duy Tân)제는 아버지 타이타인제와 같이 레위니옹 섬에 유배된 후 1944년에 프랑스에 군인 신분으로 갔습니다. 그 후에 베트남으로 돌아와 베트남 민주공화국 최고 고문이 되었으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습니다. 응우옌 왕조의 12대 황제인 카이딘(Khải Định) 황제는 안남 왕조의 초대 왕이 되었고, 그다음 어린 나이로 즉위한 13대 바오다이(Hoàng đế Bảo Đại) 황제 때 응우옌 왕조는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바오다이 황제는 1945년 호찌민 임시정부 고문이 되었으나 1946년 홍콩으로 망명하였습니다. 그 후 1949년 베트남에 귀국하여 베트남 공화국(1955년 10월 26일부터 1975년 4월 30일까지 북위 17도 베트남 군사분계선 이남에 존재했던 나라이다.)의 국가 주석이 되었으나 민심을 잃고 퇴임하여 프랑스로 망명했습니다. 그는 1997년 프랑스 병원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는 프랑스인 모나크 뱅 튀(Monique Vinh Thuy) 여사와 결혼하여 딸을 낳기도 했습니다.


카이딘 황제릉. 시신은 동상 아래에 안치됨


(좌) 바오다이 황제의 가족들 / (우) 바오다이 황제의 첫째 부인인 남 프엉(Nam Phương) 황후. 절세 미인으로 유명하다.
노년의 바오다이 황제와 모나크 뱅 튀 여사


응우옌 왕조의 태조인 자롱 황제나 그의 아들 민망(Minh Mạng) 황제 등은 중앙 집권 체제와 절대 왕권을 지향했습니다. 강력한 왕권의 상징으로 건축한 왕궁은, 응우옌 왕조 시대 수도였던 후에 시에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화려한 시작과 반대로 끝은 씁쓸했습니다. 역사의 흐름 속에 왕족은 왕궁을 떠났고, 그들이 살던 왕궁은 현재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후에 왕궁은 화려하고 광대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만, 곳곳의 낡은 흔적과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몇몇 궁터는 베트남과 응우옌 왕조의 슬픈 역사의 한 면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이 살았던 왕궁은 세계문화유산으로 후에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 되어 역사 관광 도시 후에를 홍보해주고 있습니다.



                                                

(좌) 보수 중인 궁궐 / (우) 베트남 전쟁으로 훼손된 궁궐 터




                                                      

참고:

https://ko.wikipedia.org/wiki/%EC%9D%91%EC%9A%B0%EC%98%8C_%EC%99%95%EC%A1%B0%EC%9D%98_%EC%97%AD%EB%8C%80_%ED%99%A9%EC%A0%9C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hanwoolee&logNo=220285566378     


사진 출처:

-남 프엉 황후:

 https://namu.wiki/w/%EB%82%A8%ED%94%84%EC%97%89%20%ED%99%A9%ED%9B%84

-바오다이 황제와 모나크 뱅 튀 여사: https://www.pinterest.com/pin/158540849354189583


*이 글은 2017년에 베트남에서 국립국어원의 국외 통신원으로 활동하던 당시 쓴 기사입니다.

국외 통신원의 편지 (brunch.co.kr)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