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서의 하루 2
수도원에서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가는 강물처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흘러갔다. 특히 새벽 시간은 너무 조용해서 귀를 쫑긋 세우고 어떤 소리라도 들리지 않을까, 귀를 기울이곤 했다. 간혹 떼 지어 날아오르며 경쾌한 합창을 하는 새들의 지저귐이 수도원의 분위기를 더 성스럽게 만들었다.
본당에서 열리는 미사 시간도 한없이 느리고 고요했다. 물론 성가 소리도, 기도소리도, 파이프 오르간 하나에 맞춰 70여 명의 수사들이 부르는 중저음의 미사곡 소리도 깊고 은은하게 울려 퍼졌지만 고요하게 느껴졌다.
세상의 속도와 다른 속도, 수도원의 느리고 고요함이, 인간이 줄 수 없는 위로를 내게 주었다.
소박한 즐거움을 주는 시간 중의 하나는 식사시간이었다. 아침은 토스트와 잼, 몇 가지 과일과 소시지, 삶은 달걀 등이 뷔페식으로 나왔다. 수사들이 독일에서 직접 배워 와 만든다는 독일식 소시지는 굽지 않고 얇게 저며 빵에 얹어 먹는데, 소시지하면 의례 떠오르는 인공적인 맛이 아니라 심심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이 소시지는 일반인들에게도 인기가 많아 인터넷 주문이 많다고 한다. 점심은 간단한 반찬 몇 가지를 갖춘 볶음밥 같은 일품요리, 저녁은 국과 밥, 몇 가지 손이 많이 가는 반찬까지 갖춘 정찬이 나오는데 특히 밥이 윤기가 흐르면서 찰지고 고소하다. 수도원 부지보다 넓은 논에서 수사들이 직접 농사지은 쌀이라고 한다.
“ 식사를 하는 요 앞방에 역사관이 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식사 마치시고 둘러보세요. 그 유명한 겸재 정선 그림도 있고, 베네딕토 수도회의 역사도 잘 전시돼 있어요. ”
피정객들을 안내하는 수사님의 말씀을 듣고 역사관으로 향했다. ‘겸재 정선의 그림과 수도원?’ 뭔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흥미를 끌었다. 팻말도 없는 식당 맞은편 작은 방이 역사관이었다. 역사관에 들어서자 놀랍게도 진짜 교과서에서 보던 ‘겸재 정선’의 그림이 여러 점 걸려 있었다. 생전에 금강산을 여러 차례 찾아 그렸다는 겸재 정선의 그림 < 금강내산전도 >를 비롯해 <진경 산수화> <인물 산수화>등 교과서에서 많이 보던 여러 점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겸재 정선의 그림이 왜 수도원에 걸려있을까?
‘겸재 정선’의 그림과 왜관수도원의 인연은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장이자 문화인류학자인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1870~1956), 1908년 두 명의 선교사를 조선에 파견해 최초의 남자 수도원인 베네딕도 수도원을 만든 베버 신부는 1911년과 1925년 두 차례 조선을 방문한다. 그중 1925년 우리나라를 방문하고 돌아갈 때 겸재 정선의 21폭 화첩을 사 가지고 갔다.
이 그림을 ‘오띨리엔 수도원’ 측에서 계속 보관해 오다가 수도원을 방문한 한국 학자에 의해 이 그림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 수도회 측은 이렇게 소중한 그림은 한국으로 돌려주는 것이 낫겠다는 결정을 하고 한국 진출 100주년이 되던 2005년, 왜관 베네딕토 수도회로 영구 대여 형식으로 화첩을 돌려주게 된다. 국보급 문화재의 귀환은 국가적인 화제가 되면서 원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영인본 형태의 그림을 수도원 역사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겸재 정선’의 화첩을 사 가지고 갔던 베버 신부는 조선을 유별나게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1911년 조선을 처음 찾았을 때 놀랍게도 안중근 의사의 본가인 황해도 신천군을 찾아가 안의사 유가족의 사진을 찍어 남기기도 했다. 안중근은 당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인물로 일본에서 보자면 반역자나 다름없던 시절인데 베버 신부는 천주교도인 안중근의 유족을 찾아가 사진을 남긴 걸 보면 그가 조선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역사의식이 드러난다.
4개월 동안 조선의 풍습과 다양한 문화현장을 사진으로 찍어 남긴 베버 신부는 1915년 독일에서 <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문화와 풍습이 놀랍도록 생생히 남아있는 그 책에서 베버 신부는 ‘조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 내가 그토록 빨리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나라, 조선 - 노르베르트 베버 ”
그는 돌아간 뒤 자신이 소속된 성 베네딕도 수도회 소속 선교사들을 계속 조선으로 보낸다. 한양으로 들어와 활동을 하던 선교사들은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1920년 원산 교구로 이동을 한다. 이들은 함경남도 원산 외곽, 덕원 일대 150만 평의 땅에 붉은 벽돌로 세련된 수도원을 짓고 유치원과 학교를 만들었다. 독일인 특유의 부지런함과 <기도하고 일하라>는 베네딕토 수도회의 원리에 맞게 목공소와 인쇄소, 의료기관까지 세운 이들은 가난한 신자들을 구제하는 활동에 앞장선다. 역사관에 전시돼 있는 당시 함경남도 덕원 수도원의 사진들은 놀랄 정도로 현대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서 기쁨으로 사역하던 이들에게 1950년 한국전쟁은 참혹한 시련의 시기를 안겨준다. 소련군과 함께 수도원을 점령한 북한군은 ‘하느님’을 인정하지 않았고 ‘하느님’을 믿는 신부와 수녀를 인정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빼앗은 뒤 신부와 수녀들을 옥사덕 수용소로 끌고 갔다.
왜관 수도원 본당 앞에 있는 한 장의 그림은 당시 베네딕도 수도원이 겪었던 참혹한 역사를 역설적으로 그림 동화처럼 담담하게 표현해 놓아 더 인상적이다. 톱과 공구함을 들고 있는 목공 담당 수사, 인쇄 담당 수사, 농기구를 들고 있는 농사 담당 수사, 요리를 담당했던 수녀, 이들 모두는 옥사덕 수용소에서 순교했다. 당시 순교한 사람들은 25명의 독일인과 13명의 조선인 수사와 수녀들을 비롯해 모두 38명, 이들의 참혹한 이야기는 공지영의 소설 < 높고 푸른 사다리 >에 잘 묘사돼 있다.
차라리 먼저 죽은 이들을 부러워할 정도로 참혹했던 수용소에서 ‘죽는 은총’조차 받지 못한 채 살아서 모든 고초를 겪은 이들, 다행히도 그들은 전쟁이 끝난 후 독일의 노력으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독일로 돌아간 뒤 촬영했다는 한 장의 사진 속에 담긴 신부들의 초췌한 모습이 수용소에서의 고초를 대변하고 있다.
여기서 끝났다면 이야기는 그저 평범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번의 반전이 일어난다. 함경남도 덕원을 떠나 독일로 갔던 신부들 중 건강을 회복한 신부 10명은 1956년 다시 전쟁으로 폐허기 된 땅, 우리나라로 돌아온다. 이들이 정착한 곳이 바로 지금의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원’이다. 그들은 왜 38명의 동료를 순교로 잃은 끔찍한 땅, 전쟁의 폐허로 가난하기 이를 데 없는 땅으로 돌아올 용기를 냈던 것일까?
하느님은 이웃의 얼굴을 통해서만 인간에게 계시된다 - 유대인 사상가 에마뉘엘 레비나스
아마 그 시기, 하느님의 사랑이 가장 필요한 곳이 바로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을 차마 외면하지 못한 때문이 아닐까? 모든 것이 부서지고, 모든 이가 헐벗고, 정신적으로 어둡고 추운 밤을 보내는 이들의 이웃이 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기쁨으로 기꺼이 해 내는 이들을 볼 때 얼핏, 평소에는 보이지 않는 신의 얼굴을 발견하곤 한다.
다시 돌아온 그들은 조선인 수사들과 함께 왜관에 다시 인쇄소를 세우고, 목공소를 만들고, 학교를 세운다. < 기도하고 일하라 >는 베네딕도의 정신에 맞게 끊임없이 손을 움직여 노동하고, 틈틈이 기도했다. 서슬 퍼런 독재 권력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권력의 눈밖에 난 사진작가 최민식을 몰래 후원하고 ( 참고: 브런치- 푸른 눈의 신부가 거지 작가 사진집을 낸 이유) 많은 출판금지 책들을 찍어내며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일과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일조를 했다.
‘격동’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대한민국 근현대사 100년의 굴곡진 역사를 함께 걸어온 성 베네딕도 왜관수도원, 내가 성 베네딕도 왜관 수도원 <피정의 집>에서 보내는 하룻밤의 안식과 평안이, 온갖 시련과 고초에도 굴복하지 않고 신앙과 신념을 지키는 수고를 감당한 이들이 지켜낸 백 년의 역사와 이어져 있다는 생각을 하면, 백년의 하룻밤, 오늘의 안식은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