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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전 Jul 18. 2020

눈보라가 휘날리던 바람찬 흥남부두에

-메러디스 빅토리, 기적을 쫓는 여정 2

어두운 밤, 왜관 구 성당 뒤로 구름이 흘러가는 모습을 촬영해서 다큐멘터리에 이미지로 쓰고 싶었다.  그렇다면 성당 주변으로 어둠이 내려앉기 직전부터 촬영을 시작해야 한다. 카메라를 설치하고 기다리자 잠시 후 성당에 불이 켜진다. 이제부터 성당 뒤로 구름이 흘러가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면 적어도 3시간 이상을 촬영해야 한다. 저녁 7시 무렵부터 촬영을 시작해 10시까지 타임랩스 촬영을 하고 카메라를 껐다. 3시간 촬영한 그림을 방송에서 쓴다고 해도 겨우 15초 남짓 쓰게 될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확인해 보니 뒷 그림이 너무 짧아서 툭 끊기는 느낌이다. 이 컷을 쓰려면 다음에 다시 촬영을 해야 한다. 촬영 시간이 짧았다. 다음에는 3시간보다 훨씬 더 길게 촬영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경북 왜관 성 베네닥도 수도원 구성당


다큐멘터리는 온전한 '시간의 기록'이다. 


다큐멘터리는 시간의 기록이다. 좋은 다큐멘터리일수록 연출하지 않고 대상의 시간을 있는 그대로 기록해야 하는데 그럴수록 제작진에게는 더 많은 시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다룬 다큐도 긴 '시간의 항해'를 시작했다. 그러나 호기로운 기적을 울리며 출항을 했지만 여정이 만만치는 않다.


삶은 항상 그랬다. 파도는 쉬임없이 오고, 잔잔한 날들은 그닥 많지 않았다. 견뎌야 할 시간만을 남겨두고 기쁨은 늘 순간이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제작 지원이 당선된 기쁨은 잠시, 이제 순간을 기록해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야 하는 책임만이 남았다.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닿았던 거제도 앞바다

일단 70년 전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탔던 14,000명의 사람들 중 상당수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그나마 남아있는 사람들도 나이가 이미 80을 훨씬 넘었는데 그들을 추적하는 일도 쉽지 않다. 이럴 때 방송을 만드는 제작진은 절반쯤은 '셜록 홈즈'가 돼야 한다. 작은 단서라도 생기면 지치지 않고 추적을 해 나가야 한다. 


취재 도중 거제도 인근 지심도에 살고 있는 '만물박사 할머니'가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거제도에 닿는 70년 전 모습을 봤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름 조차 정확하지 않은 '나이 많은' 할머니를 찾기 위해 거제시청으로, 관련 주민센터로, 급기야 이장님까지 찾아 사정 이야기를 한다. 이럴 때 유일한 무기는 전화, 그렇게 몇 통의 전화를 이어나가다 드디어 그 '나이 많은' 할머니를 찾았다. 1950년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거제도에 닿았을 때 장승포에 살고 있었다는 할머니가  전화로 들려주는 이야기는 생생하다. 아버지가 당시 이장을 하셔서 주먹밥을 만들어 피난민들에게 나누어 주던 것을 본 기억이 있단다. 할머니를 찾았으니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제 시작이다. 모든 카메라 장비를 챙겨서 현장으로 가야 한다. 발품을 팔아 현장의 시간을 온전히 담아와야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이 채워진다. 


다큐멘터리 한 편을 만드는 일은 어쩌면 시간과 땀으로 한 편의 자수를 놓는 일과 비슷하다. 이런 조각들이 모여서, 가능하다면 누군가의 가슴을 울리는 근사한 한 편의 이야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길을 나선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이야기, 60인승 선박 한 척이 14,000명의 피난민을 구한 이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오히려 미국에서 많이 알려진 편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자료가 미국에 있는데 코로나 때문에 미국에 갈 형편이 여의치 않으니 다큐멘터리 항해의 앞날은 아직까지는 시야가 온통 흐리고 파고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눈보라가 휘날리던 바람찬 흥남부두에


우리나라에서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관해 추적할 수 있는 자료들은 거의 없는 편, 그나마 일반인이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거제도 포로 수용 기념공원 안에 있는 흥남 철수 기념비다. 이 기념비 옆의 조각상은 70년 전 흥남부두의 비극을 생생하게 잘 묘사해 놓고 있다. 

거제도 포로수용기념공원내 흥남철수비

기념비의 배 모형은 실제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8분의 1호 축소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실제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그렇게 큰 배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물망에 의지해 배를 기어오르는 사람들, 그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1950년 9.28 수복 후 북진하던 연합군이 후퇴한다는 소식이 들린 12월, 좌우 대립의 끔찍한 회오리 속 비극을 몇 년간 겪은 사람들에게 다시 다가오는 폭격의 굉음과 소문은 얼마나 공포였을까? 그들의 죄가 있다면 그저 살기 위한 방편을 모색했다는 것이다. 고향을 지키겠다는 선택을 한 부모들도 젊은 자식들의 등을 떠밀어 배에 태웠다.

고향 땅에서 피땀 흘려 이룩한 모든 것, 집과 살림살이, 논과 밭, 심지어 핏줄까지 버리고 그저 옷 보따리 하나 챙겨 배에 오른 사람들, 부모와 친척과 형제와 잠시 이별하면서도 떠나는 이도, 떠나보내는 이도 이 헤어짐이 평생의 이별이 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않았다. 그저 1,2 주, 길어야 한두 달쯤의 이별이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들은 배에 올랐다.


눈보라가 휘날리던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 가요 < 굳세어라 금순아 > 중


거제도에서 만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승선자 몇몇은 전부 1950년 12월, 흥남부두의 끔찍했던 추위를 말한다.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던 매서운 겨울 추위에 변변한 옷조차 갖춰 입지 못한 그들은 눈보라까지 휘날리던 흥남부두에서 며칠을 노숙하며 배를 기다렸다. 살을 에는 추위와 휘몰아치는 바람, 배고픔, 지칠 대로 지친 그들에게 기적처럼 한 척의 배가 다가왔다. 


바로 미국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였다.군함도 아닌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왜 전쟁의 한가운데 있는 함경남도 함흥에 도착한 것일까? 그리고 왜 피난민을 14,000명이나 태운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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